천둥번개와 함께 세찬 비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밤이었다. 비에 젖어 진흙으로 변해버린 길을 밟으며 마커스와 블레어는 버려진 주유소를 향해 걸어갔다.
“저리 가죠.” 블레어는 주유소 안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비를 피하고 밤을 보내려는 셈이었다. 태연하게 말한 그녀의 목소리 사이로 드디어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피로감이 드러났다. 마커스는 말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주유소의 지붕 아래로 들어오자마자 블레어는 자신의 자켓을 걷고 어깨를 살폈다.
“태울 만한 걸 찾아요. 내일이면 기지에 도착해요.”
블레어가 마커스에게 말했다. 그녀가 이를 조금씩 악무는 모습에서 어딘가 좋지 않아 보였다. 말을 끝마친 후에도 블레어는 다시 어깨로 눈길을 돌려 자신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다쳤어요?” 마커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뚝뚝했지만 그 말에는 블레어를 걱정하는 의도가 스며들어 있었고, 블레어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괜찮아요.” 블레어는 다시 마커스와 눈을 마주친 채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블레어와 마커스는 여전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커스는 블레어에게 눈을 떼지 않으면서 땔감을 찾아 다시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마커스가 걸어 나가면서도 블레어는 그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에게 특정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블레어는 자신의 권총을 옆에 달린 쇠사슬 끈에 달아 두고, 자신의 자켓을 벗어제꼈다. 그녀는 상처를 치료할 겸 빗속에서 샤워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켓을 벗은 블레어의 상반신에는 티와 끈,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답답함이 풀려 편안한 듯 눈을 살짝 감았다.
마커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유소 앞 평야를 걸어 나가 버려진 자동차 한 대로 접근했다. 그런 와중에, 블레어는 자신의 샤워 및 의료 키트를 들고 주유소 중앙에 있는 우물로 걸어 나갔다.
키트를 우물 턱에 놓고 나서, 블레어는 자신의 가슴 앞에 묶인 나시의 끈을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끈이 풀리고서 블레어는 나시티를 벗었다. 자신의 다른 옷가지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인 브래지어를 입은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블레어의 속옷은 전쟁 이전 여성들이 착용하던 브래지어와는 달리, 검은 천과 벨트 등 고정장치를 이용해 만든 물품이었다.
나시를 옆에 내려놓은 블레어는 자신의 두 손을 가슴 정중앙으로 가져가, 그곳에 있는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다. 블레어는 풀린 브래지어를 두 손으로 잡고, 마치 날개를 펼치듯이 브래지어를 등 뒤로 벗어냈다. 답답한 옷감을 전부 벗어내고 알몸이 된 상반신으로 빗속에 서 있자, 전쟁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잠깐의 자유와 해방감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브래지어 역시 옆의 나시티와 키트 옆에 내려놓은 다음, 앞의 우물에 깊이 고인 물을 한 움큼 집어다가 자신의 상처를 적셨다.
전기체와 같은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해고, 세상은 텅 비게 되었다. 나탈리는 자신의 생존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들의 복장이 세계가 멸망하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탈리가 옷을 갈아입겠다며 의류매장을 찾아 떠나고, 에밋이 그녀를 따라간다. 나탈리는 파티를 하다가 갑작스런 침공에 정신없이 도망친 경우였기에,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탈리의 상의는 마치 인어의 비늘처럼 빛나는 장식이 된 하얀색 나시였다. 그 아래로는 검은색 브래지어가 은은하게 비쳤으며, 어깨 쪽으로는 두 끈이 삐져나왔다. 나시가 길지 않은 편이었기에 그녀의 아랫배와 배꼽이 보이기도 했다.
나탈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불이 꺼진 쇼핑몰에 홀로 남아 있던 것이 언제였는지를 생각했다. 형편이 좋지 않은 집안에서 자라난 그녀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나 새벽, 대규모 쇼핑몰에 숨어들어 각종 음식을 훔쳐 먹거나 옷을 가져가 입었다. 가끔씩 그곳에서 수면을 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성인이 되어 가난에서 벗어난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돈으로 비싼 여행을 온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외계인의 습격에 나탈리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모든 것이 잘 될만 같았던 여행에서, 어느새 자신의 가장 불행했던 과거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자신을 발견한 나탈리의 마음이 쓰라렸다.
여성의류 매장에 들어간 나탈리는 자신의 배낭을 유리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외계인의 공격을 피해야만 했기에 빠르게 움직이려 했으나, 나탈리는 어느새 오랜만에 느끼는 적막함과, 어둠이 주는 이상하지만 고요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젖어 급한 마음을 버렸다.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린 전구 목걸이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전구가 외계인의 존재를 알려 줄 수 있었다. 쇼핑몰 반대편에서 에밋의 모습을 본 나탈리는 안심한 채 옷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옷장에서 가장 편해 보이는 셔츠를 집어 들었다.
한편, 에밋은 마네킹에 입혀진 자켓을 벗기고 있었다. 날이 추웠기에 그 자켓이 탐스러워 보인 것이 사실이다. 에밋은 자켓을 입으려던 찰나, 우연히 눈을 흘긴 건너편에서 옷을 갈아입는 나탈리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탈리는 자신을 향해 등을 올린 채 상의를 벗어젖히고 있었다. 상의를 벗자 그녀의 맨 등과 거기에 채워진 브래지어 끈이 드러났다. 에밋은 순간 넋을 잃고 나탈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몸을 돌려 새로운 셔츠를 집어들려던 찰나, 나탈리는 역시 우연히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녀를 바라보는 에밋을 보게 되었다. 둘은 아무 움직임 없이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브래지어와 청바지만을 입은 채 에밋을 바라보던 나탈리는, 순간 에밋의 주변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기체 외계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던 나탈리는 자신의 원래 나시를 다시 입은 다음 도망쳐서 옷장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뒤에서 무언의 시선을 느낀 블레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등 뒤에서 마커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를 생각하지도 않고 탁 트인 이곳에 나와 옷을 벗고 몸을 씻다니. 마커스 외에 다른 누구나 무언가가 이곳에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블레어의 등 뒤에는 마커스가 보이지 않았다. 끝없는 비가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녀는 서서히 몸을 돌려 완전히 그쪽을 바라보고 섰다. 세차게 내리는 비 사이로 마커스도 기계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였다. 그것은 옷을 집은 채 몸을 가리고 어딘가에 주저앉아 있는 여성이었다.
나탈리는 외계인을 피해 옷장 안에 숨었다. 한동안 어둠 안에 잠겨 있던 그녀는 순식간에 검은 시야 앞에 나타난 비의 형상에 놀라 했다. 겁을 먹었지만 얼마 뒤 비의 형상 안에서 한 여인이 나타나자 나탈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됨을 느꼈다. 나탈리는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하거나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빗속의 여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탈리와 블레어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얼마 후 마치 시간이 다 된 듯, 둘의 형상은 서로 앞에서 재빨리 희미해지고 사라졌다. 블레어나 나탈리 그 누구도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자신이 본 여성은 누구이며 자신이 환영을 본 것은 아닌지를 생각했다. 그녀들은 곧 옷을 다시 갖춰 입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맞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녀들이 겪은 일에 대한 설명은 영원히 듣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녀들이 겪은 일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나탈리와 블레어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들의 귀를 타고 점점 멀리 퍼져 나갔다. 그것을 믿는 자도, 그것을 믿지 않는 자도 비슷했지만 중요한 점은 이야기가 퍼졌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마다 달랐지만 이야기 자체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멸망한 세상, 가장 순수하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태초의 물질인 물은 서로 다른 멸망의 세계를 살아가는 두 여인의 이야기를 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