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보지 못한 고딕 소설
메아리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여인은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잠을 깼다.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과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은 그녀가 적지 않게 놀랐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어둠 속에 도사리는 존재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공포에 하얗게 질린 먹잇감의 모습을 보고 날카로운 미소와 함께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입맛을 다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 속의 그것들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여인은 미세하게 떨리는 몸과 어지러움이 안개처럼 차버린 머릿속을 진정시키며 앞에 깔린 어둠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했다. 이곳에서는 태양의 뜨거운 얼굴을 직접 마주할 수 없었다. 가끔씩 전해지는 그 간접적인 손길과 온도를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인 앞의 칠흑 같은 어둠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빠르게, 서서히 걷혀 나갔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호흡과 심장 박동 역시 규칙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그녀의 마음은 조용한 호수처럼 안정감을 되찾아 갔다. 이곳은 위험한 짐승과 포식자들이 도사리는 한밤중의 정글도,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악한 존재가 여인을 가두어 놓은 감옥도 아니었다. 여인의 팔과 다리 아래로는 부드러운 천으로 된 이불과 침대보가 느껴졌으며, 여인의 마음이 진정됨과 동시에 그녀의 땀에 젖어 있던 그것들은 다시 원래의 시원한 온도로 되돌아가 그녀를 몸과 맞닿았다. 여인의 주변을 순식간에 책장과 의자, 꺼져서 녹아버린 촛농과 가구 등이 둘러쌌다. 어둠이 걷히면서 드러난 공간의 크기는 꽤나 넓었다. 이곳은 여인이 지난 수 년 동안 살아온 방이었다. 그녀가 외모와 옷가지를 가다듬고 책을 읽고 쓰는 등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방이었지만 이따금씩 밤이 되면 방은 여인이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로 탈바꿈하곤 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그런 빈도가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이성을 되찾음과 동시에 잠이 완전히 사라진 여인은 몸을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계속해서 조각상 같은 자세로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곧 몸에서 쥐가 나거나 직전의 불안과 혼란이 다시 마음속으로 스며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자신의 몸을 드레스처럼 감싸고 있던 이불을 천천히 걷어낸 다음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촛불에 불을 붙이지 않고, 이제 다시 친숙해진 방안의 어둠에 의지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의 흐름이 속옷만 걸친 그녀의 속살을 간지럽혔다. 이는 그녀의 감각을 자극하며 정신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앞에 펼쳐진 보이지 않는 길, 저 앞의 깔린 어둠 어딘가에서는 바람만이 불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은 그곳에서 스며들고 있는 희미한 빛의 존재를 느꼈다. 어둠을 걷어내고 예민해진 그녀의 눈은 분명 그것을 보았다. 은은한 베일이나 한밤중의 바다처럼 조용히 물결치는 빛의 줄기를. 검은 밤에 스며든 작은 아름다움에서 그녀는 초콜릿 같은 깊은 달콤함을 느꼈다.
바람과 빛의 손에 이끌린 그녀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어느새 그녀는 방의 끝자락, 창가에 가까이 위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 창문은 열 수 없었으며, 설사 그것을 부수고 강제로 열어낸다 하더라도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광활하고 자유로운 바깥 세상이 아니라 거대하고 축축한 바위 벽일 것이다. 여인은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보름에서 길게는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바람이 불어오곤 했다. 그 선선한 바람은 주인 없는 주문처럼 불어와 그녀의 몸과 마음에 마법을 걸었다. 이런 신비로운 바람의 손길을 느낄 때마다 그녀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음 깊은 곳에서 느꼈다. 그녀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표면과 내면에서 모두 느껴지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바람을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다. 비록 그녀가 바람과 만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창가 옆에 기대어 선 채 눈을 감고 바람의 잔잔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정확히 어디서 불어오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기분에 놓여 있는지였다. 여인은 그렇게 바람과의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갔다. 너무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한밤의 만남은 공기의 흐름이 다시 멈추면서 끝이 났다. 공기의 흐름이 약해짐과 동시에 여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한 상태였으며 그것은 그녀의 표정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얼굴에는 또다시 끝나 버린 만남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나타났다. 후자의 경우는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감정이었다. 이곳, 한밤중에 바람과 만나는 것이 마지막임을 아는 데에서 우러져 나온 감정이었다. 지금은 여인이 이 방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바람과의 밀회가 끝난 다음 그녀는 침대 곁으로 돌아와 뒤늦게 촛불에 불을 붙였다. 사람의 손톱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의 작은 불꽃이었지만 그것은 방 전체를 뜨겁게 물들이고 새로운 모습을 주기에 충분했다. 여인은 눈이 부셨는지 얼굴을 약간 찡그렸지만 이내 촛불로부터 등을 돌린 다음 자신의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의존해 오늘 해야 할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밤을 보낸 만큼 그녀는 이곳에서 떠나야 했지만, 챙겨야 할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그녀 자신, 몸뿐이었다.
여인은 촛불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 목욕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가 잠겨 있던 속옷의 걸쇠를 풀어헤쳤으며, 그녀의 속옷은 그녀의 어깨와 가슴을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된 그녀는 흘러나오는 차가운 물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줄기는 바람이 닿지 못했던 곳까지 그녀를 쓰다듬었다. 바람보다 훨씬 차갑고 매정한 손길이었지만 물줄기는 여인의 몸을 깨끗하게 해주고 있었다. 눈을 감고 목욕실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는 물의 차가움에 몸을 조금씩 떨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물은 그녀가 지금까지 마시거나 몸을 씻던 물과는 달랐다. 짧은 목욕을 마친 그녀는 몸을 닦고 새로운 옷을 입었다. 여인은 자신의 가슴에 목걸이처럼 걸린 작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 성을 떠날 때까지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바늘이 제자리를 한 번 돌기 전에 그녀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여인은 우아하면서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드레스의 아랫부분을 들어 올린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촛불을 들고 방을 떠나기 전, 그녀는 뒤를 돌아 자신이 살아오던 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침대와 책들, 낡은 흔들의자와 작은 인형 그리고 조각상들, 무엇보다 바람과의 수많은 짧은 만남이 이루어진 굳게 잠긴 창문까지. 여인은 그것들에 눈길을 주며 물건과 공간 하나하나에 스며들고 서린 자신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곳을 영원히 떠나간다면 이곳에 남은 자신의 추억, 과거 역시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이곳에 내 흔적이 과연 영원히 남아 있을까? 여인은 이런 생각들을 거치면서 마음속에 한 줄기 피어오르는 슬픔을 느꼈다. 전부 다 자신과 함께 가져가고 싶은 욕구가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연기 한 가닥 같은 슬픔이 걷잡을 수 없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전에, 여인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는 방의 바깥으로 조금씩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곧이어 방문이 닫히고, 물건들은 여인의 기억을 품은 채 방에 영원히 봉인되었다.
작지 않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던 여인의 방과 다르게, 문을 열고 펼쳐진 복도와 성의 내부는 같은 공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가공되지 않은 바위들이 벽과 천장, 바닥을 이루었으며, 곳곳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습기가 차 있었다. 벽 이곳저곳에 횃불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길을 잃고 차갑게 식어 버린 이후였다. 때문에 몇몇의 횃불만이 밝히는 성의 내부에는 으스스하고 축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남아 있는 횃불들 역시 얼마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성 대부분을 잠식한 어둠은 이제 곧 성 전체를 완전히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모습만 본다면 이곳은 성이 아니라 동굴이나 지하 감옥에 더 가까워 보였다. 여인의 방 안에서는 들리지 않았던 거대한 메아리와 알 수 없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들이 여인의 귓속을 파고들자 그녀는 자신이 꿈속에서나 듣던 메아리와 목소리가 이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성에 울려 퍼지는 악몽 같은 메아리는 여전히 여인의 정신 속을 파고들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 아닐까.
여인은 자신을 지켜 주던 방의 아늑한 손길에서 벗어나 성의 음울함 속을 거닐었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으며, 그저 복도를 지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갈 뿐이었다. 거대하지만 사실상 텅 비어 있는, 메아리와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도 적막하고 외로운 성. 이 이름 없는 여인은 성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후 그녀가 떠나고 나면 이곳에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여인은 성 내부를 이동하면서 자신이 보는 것들에게 마음속으로 조용한 작별인사를 남겼다. 자신이 머물던 방만큼 애착이 가거나 중요한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성에서 살면서 한 번쯤은 본 적이 있던 공간들이기에 그녀는 아련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녀가 떠나간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있을 것이다. 물과 어둠에 젖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 채.
여인은 어느덧 성의 1층에 다다르게 되었다. 방에서 나와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여인은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다행히도 바늘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여인이 서 있는 곳은 1층의 가장자리였다. 그녀의 등 뒤로는 그녀가 걸어 내려온 계단들과 함께 성의 위쪽으로 향하는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다. 그녀는 낮은 천장이 만들어낸 그림자 안으로 들어와 횃불 두어 개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횃불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횃불의 손잡이를 집어 들었다. 뜨거운 불에 손이 데거나 떨어지는 불똥에 손이 다치지 않도록 불길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위치한 다음 그녀는 손잡이를 기울여 불길을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빛과 마주해 모습을 드러낸 바닥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는 의미의 기호와 문자들을 중심부에 품고 있었다.
한 걸음씩 움직이며 그림들을 살피던 여인은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녀가 멈춘 자리 앞, 그녀가 횃불로 밝히고 있는 바닥의 부분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다른 그림과 문자들로부터 마치 격리된 듯한 부분, 바닥에 충분한 여백을 둔 그곳에는 다른 것들로부터 차별화되는 기호와 문자 몇 개만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문장이나 구절인 것 같았다. 여인은 횃불을 내려놓았다. 차갑고 젖은 바닥에 맞닿은 횃불은 물기를 머금자 불길이 꺾여 조금은 작아졌다. 하지만 불을 완전히 끌만큼 물이 고여 있지는 않았기에 다시 어둠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여인은 이제 바닥에 맞닿은 횃불에 의지한 채 몸을 숙였다. 가까이서 바닥에 새겨진 구절을 들여다본 그녀는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드레스의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손을 꺼낼 때에는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주먹을 쥔 손가락의 틈 사이사이로 하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주먹을 폈다. 그녀의 손 위에는 작지만 정교한 데다 아름다운 보석 하나가 빛을 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이아몬드가 아님을 한눈에 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보다 가치는 떨어지고, 덜 아름다울지언정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오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평범한 보석이 아니었다.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에서는 무언가가 서려 있는 듯했다.
여인은 하얀 보석을 바닥의 알 수 없는 구절 위에 올려두었다. 보석이 구절 위에 위치를 잡자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구절과 보석이 놓인 앞, 그 어떤 문자나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고 오직 어둠만이 앉아 있는 바닥 부분에서 빛과 함께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보석의 빛이 바닥으로 스며들어 내부의 무언가를 깨운 것이다. 바닥에서 나기 시작한 빛은 보석의 그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하얀 보석은 자신의 빛을 나누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밝기와 안정감을 잃지 않고 구절 위에 놓여 있었다.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곧 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바닥에서 문이 열렸다. 문에서 뿜어져 나오던 수증기와 안개가 걷히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여인은 올바른 길을 찾아온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바로 여인의 최종 목적지였다. 시계의 바늘은 거의 제자리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여인은 바닥에 내려놓은 횃불과 보석에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우아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고 눈앞에 생겨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아래에서는 더 이상 빛줄기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앞을 분간할 수는 있었지만, 아래에는 오직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얀 보석은 여인의 모습이 바닥 아래로 서서히 사라져 가면서도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꺼져 가는 횃불들로 가득한 어두운 성 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존재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여인이 완전히 사라진 후, 횃불의 불꽃 역시 그녀처럼 어둠 속으로 존재를 감추었다. 보석은 성의 바닥에 홀로 남겨져 검은 우주에 외롭히 박힌 하나의 작은 별이 되었다.
여인이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도 여전히 횃불과 보석의 그것과 같은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계단의 끝에 가까워질수록, 여인은 자신의 앞과 주변, 그리고 사물들이 더욱 생생하고 자세하게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밝게 빛나는 광원도, 빛이 들어오는 틈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의 주변은 점점 밝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눅눅하고 음울한 느낌의 어둠은 사라지지 않고 안개처럼 그녀의 주변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여인이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그녀의 눈앞에는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정교하게 깎아 낸 직사각형 모양의 공간에는 그 어떤 물체나 특이한 점도 없었다. 다만 공간 중앙에 거대한 정사각형 모양으로 파여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인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정사각형의 물을 향해 다가갔다. 잔물결이 일고 있는 물 안쪽을 자세하게 볼 수는 없었다. 그 물 너머를 알려면 직접 물 안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여인이 하려는 행동이었다.
시계의 바늘이 마침내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것을 알리는 소리가 시계에서 짧게 남과 동시에 거대한 울림이 여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자신이 내려온 성의 위쪽에서 난 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이 들어가려는 눈앞의 물속에서 들려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여인은 자신이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었다. 마치 허물을 벗는 것처럼, 아름다운 드레스는 그녀의 몸에서 깃털처럼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옷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된 여인은 멈추지 않고 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자신의 발을 물에 담갔다. 한 손으로는 바닥을 짚은 채, 여인의 다른 발 그리고 두 다리는 물 안으로 완전히 잠기게 되었다. 그녀의 가슴은 어느새 다시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었다. 다리에서 시작한 떨림은 그녀의 온몸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여인은 지하의 모습, 성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여인은 물속으로 완전히 잠수했다. 성의 지하에는 드레스 한 벌 그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남게 되었다.
물속으로 들어간 여인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깊은 굴을 느리게 떨어지듯, 물의 흐름이 그녀를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를 둘러싼 물의 흐름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어둠 속에 놓여 있지 않았다. 하늘 위로는 일렁이는 달의 모습이 있었고, 주변에는 위쪽에서 내려오는 달빛을 받아 나타난 언덕과 멀리 있는 산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더 이상 성 내부에 있지 않았다. 자연물을 이렇게 직접 본 것이 얼마 만인지 그녀는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주위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겼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개껍데기로 된 속옷을 입은 그녀의 가슴과 팔, 배에는 반짝이는 비늘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으며, 두 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아름다운 청록색의 꼬리가 달빛을 받으며 은은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물속에서 숨을 쉬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공기뿐 아니라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어로의 변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여인의 얼굴에서는 기쁨의 표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여인은 꼬리를 흔들며 마치 유영하듯이 물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뒤로 물이 흘러가는 것을 알아채고, 이 정도 물의 흐름을 이겨낼 수 있는 자신의 힘에 놀랐다. 앞으로 바닷속을 누비며 더욱 유연하고 강하게 헤엄칠 수 있는 인어가 되어갈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쪽에는 자연물이 아닌, 하지만 산만큼이나 거대한 무언가가 떠 있었다.
물 속을 움직이는 성, 세상이 물에 잠긴 이후 그녀 같은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실어 나르던 마법의 성.
물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어가 될 때까지 사람들에게 하나의 집, 하나의 세상을 마련했던 성은 이제 텅 빈 귀신의 성, 하나의 과거이자 기억이 되었다. 성은 마치 역사 속으로 사라지듯, 저 멀리 달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바다 깊은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성은 언제까지 움직일 수 있을까? 성의 내부가 물에 완전히 잠기는 날이 올까? 무엇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다시 자신의 삶의 일부였던 성에 다시 가볼 수 있을까? 물속에서 사라져 가는 성을 바라보는 여인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질문들이 물방울처럼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그중 일부는 그녀 역시 아직 답을 몰랐지만, 그녀는 은연중으로 성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시 성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 역시 버리지 못했다.
성은 자신에게 걸린 마법의 힘을 사용해서 성의 사람들을 인어로 바꾸는 성스러운 의식을 진행해 왔다. 마지막 여인이 인어가 되어 바다로 떠나자 성에 걸려 있는 마법의 힘은 곧 그 효력을 다할 것이고, 그때쯤이면 성은 심해의 어딘가에 버려지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바닷속을 이동하거나 물을 견디지 못하는 성은 결국에는 물거품이 되어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다. 하나의 마법이 효력을 다하면서 존재가 안식을 맞이한다. 그와 동시에 탄생한 새로운 마법과 다시 태어난 존재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어 여인은 자신 이전에 먼저 인어가 되어 바다로 떠나간 수많은 이들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과 같은 이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인어 여인은 심해로 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성을 바라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미련 없이 바다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가보거나 탐험하지 않았던 바다를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곧바로 바닷속으로 잠수해서 헤엄쳐 나가지 않았다.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인어 여인은 위쪽에서 물결치는 바다의 천장인 수면으로, 그리고 그 위에서 춤을 추는 하얀 달을 향해 헤엄쳐 올라갔다. 달은 점점 커져 갔다. 여인은 더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갔다. 바다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인 수면에 마치 거울처럼 여인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으며, 여인이 수면에 가까워질수록 거울 속 자신은 점점 커져 갔다.
인어 여인은 드디어 수면 속 자신에게 돌진해서 그 모습과 충돌했다. 그녀는 드디어 수 년만에 바다 위로 떠올랐다. 수많은 물방울과 함께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물 밖에서 달빛을 받은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인어 여인은 성의 바위틈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강렬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했다. 바람도 그녀를 다시 만나 반가운 듯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여인의 몸에 묻은 물기와 만나자 온몸이 저리는 시원함이 인어 여인에게 느껴졌다. 여인은 이렇게 바람과 다시 입을 맞추었다.
여인은 바다 위로 나와 하늘과 바람과 달을 바라보며,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결정했다. 머나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동화책 속 인어, 아름답고 당찬 그 인어의 이름을 여인은 선택했다.
다시 물의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인어들이 헤엄치고 누리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음 운명, 세상이라는 이야기의 다음 장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바다 깊은 곳 숨겨져 있던 과거가 다시 살아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이 두 다리로 땅 위를 군림하던 시절, 동화와 신화 속 인어들은 단순 꾸며낸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미래를 위한 예언이었는지, 아니면 과거 실존하던 존재들의 기록이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에리얼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전부 다 사실일 지도 몰랐다. 과거와 미래, 시작과 끝은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은 바로 생명과 세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광활하고 푸른 바다에서 이루어진다.....
에리얼은 바람과 달을 벗 삼아 헤엄을 치며 새로운 여행을, 또 하나의 삶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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