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을에 여름이 그립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시절이 생각나는, 그 시절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시절 노래가 모두 한 곡쯤은 있을 것이다. 도토리를 열심히 주워 모아 결제했던 노래도 있을 것이고, MP3에 고이 간직했던 노래도 있을 것이다. 채널을 돌리다 <놀면 뭐하니?>의 '가을 노래 타나 봐' 특집을 이제 서야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요새 나는 가을 노래가 아닌 여름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곡은 바로 여름에 배우기 시작해 아직도 치고 있는 'Summer'라는 피아노곡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의 주제곡이다. 사실 이 노래는 몇 달 전 조금 더 쉬운 버전으로 배운 적이 있었다. 나름 피아노 실력이 향상되자 원곡보다는 쉽지만, 전에 배웠던 것보다는 어려운 버전으로 다시 치고 싶다고 피아노 선생님께 얘기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이 곡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어 내내 찝찝했었다는 생각도 있었고, 특유의 밝은 노래 분위기가 좋기도 했다. 지금껏 꽤 많은 연주곡을 배웠다. 디즈니 OST도 있었고, 이루마의 곡도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에서 배운 노래를 내 음악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듣는다거나 배웠던 노래를 다시 배우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Summer' 만큼은 달랐다. 여름 느낌이 물씬 나는 이 노래를 집에서도, 산책할 때도 이상하게 당겨서 듣곤 했다.
가을은 없던 센치함이 갑자기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지나간 추억과 시절 인연들이 자꾸만 생각나는 일이 많다. 얼마 전 대학 동기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인사할 만큼 친하지도 않았던 '얼굴만 아는 사람'인데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간 친구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결혼식이 끝나고 간 카페에서 우리는 그 시절 얘기를 참 오래 했다. 그때가 좋았다고, 어쩌면 그때의 기억을 추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어느새 '라떼는 말이야~' 스러운 얘기들을 늘어놓는 나이가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길가에 터져버린 은행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익숙하게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에서 노래를 틀었다. 인기차트도 좋고, 아이돌의 신곡도 좋고, 가을 노래도 좋지만, 손이 향하는 건 역시 'Summer'다. 눈으로 보는 풍경과 귀로 듣는 음악 사이에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지만 어느새 익숙해진다.
발라드의 계절인 가을에 뜬금없이 꽂혀버린 'Summer', 이 곡만큼은 잘 치고 싶었던 나의 욕심이었는지, 순수하게 이 노래가 좋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조금이나마 분명한 건, 나는 이 계절에 지난여름이 그립다는 것이다. 과거를 자꾸 돌아보게 된다. 지나가버린 여름이, 과거의 시간이 유독 그리운 건 그때의 시간과 마음이 유난히 치열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난히 짧은 이 가을, 온전히 즐기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유독 지나간 계절을 되돌아보는 건 어쩌면 가을만의 특권인 것도 같다. 오늘은 무슨 노래를 들을까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약 두 달가량의 'Summer' 앓이를 끝내고, 가을 노래를 들어볼까 싶다가도 어느새 마음은 캐럴로 기운다. 'Winter Wonderland'를 틀었다.
이제는 여름을 보내줄 때이다. 어느새 마음은 가을을 느낄 겨를도 없이 건너뛰어 다가올 겨울을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을은 즐기기엔 항상 너무 짧고, 아쉽다.
사진출처 : MBC <놀면 뭐하니?> 202회(2023.09.23.)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