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마로니에 수프를 만들 뻔했다.

밤과 꼭 닮은 마로니에 열매를 아세요?

by 고든밍지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어릴 때 꽤나 자주 들어봤던 노래다. 바로 '칵테일 사랑'이다. 나는 서영은이 부른 곡이 익숙한데 이걸 부른 원곡 가수가 마로니에라는 것은 얼핏 들어 알고 있긴 했다. 나는 혜화역 마로니에 공원을 자주 갔다. 병원을 오며 가며 익숙하게 지나쳤고, 대학 시절엔 밥먹듯이 가는 데이트 코스였다. 심지어 언니가 혜화동에 꽤 오래 살아 가족이 모여 종종 산책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로니에'라는 그 이름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했다.


날씨가 좀 선선해진 요즘, 산책을 자주 간다. 밤 산책은 보통 남편과 함께인데 그날따라 이른 저녁에 좀 걷고 싶어 혼자 집을 나섰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그런지 길가에 군데군데 떨어진 밤이 유난히 더 눈에 띄었다. 이런 산책로에 밤나무가 있으면 밤송이가 머리 위로 떨어져 사람들이 다치진 않을까 생각하며 걸었다. 익숙하게 공원을 한 바퀴를 돌고, 별생각 없이 다시 돌아오는데 더 많은 밤들이 보였다. '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까? 보통 추석쯤 밤이 열리는데 좀 빠르긴 하네.' 머리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손은 주섬주섬 밤을 줍고 있었다. 다섯 개만 주워가서 에어프라이어에 돌려먹을까. 아니다. 10개 정도 주워가서 겨울에 해 먹었던 군밤수프를 해 먹을까 생각하며 다시 부지런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글동글 예쁜 모양으로만 골라 주워온 밤을 씻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아무래도 길에서 마음대로 주워온 밤을 바로 먹긴 좀 미심쩍었다. 마침 소소하게 농사를 짓고 있는 친정 부모님을 주말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밤을 직접 보여주고 먹어도 되는 건지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이 없었는지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밤의 실체는 묻지도 못한 채 어느새 기억 속에서 잊혔다. 슈퍼문이 뜨는 밤, 달도 볼 겸 남편과 오랜만에 다시 밤산책을 나섰다. 유난히 큰 달을 보며 추석이 생각났다. 역시나 지나는 길에는 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남편에게 대수롭지 않게 잊고 있던 밤 얘기를 꺼냈다. 지난번 산책 때, 밤 몇 개를 주워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고 했다. 남편은 영 못 미더워했다. 특히 내가 주워온 밤이 뾰족한 가시가 있는 밤송이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을 가장 의심스러워했다. 그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집에 돌아오는데 마침 한 행인이 밤을 줍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것 봐, 저분도 주우시잖아. 이거 밤이 맞는 거 같아. 밤송이가 없는 건 아마 개량종이 아닐까?"

하며, 밤을 하나 주웠다. 남편은 어느새 가시가 없이 껍질로만 둘러싸인 열매를 집어 껍질을 벗겨내고는 안에 있는 밤을 꺼냈다.

"진짜 밤이랑 똑같이 생겼네. 네가 줍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몇 개 주워가자. 자, 내 주머니에 넣어."

인간의 오래된 채집 본능을 일깨워서였을까. 먹을 생각보다는 밤을 줍는 그 행위 자체가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듯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꽤 재밌었다. 우리의 의심은 어느새 확신으로 바뀐 채 남편의 양 주머니가 꽉 찰 때까지 밤을 채워 넣었다.


빵빵해진 주머니를 만지작대던 남편은 그래도 영 불안한지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 식물 갤러리에 물어보자고 했다. 나도 그제야 다시금 스멀스멀 의심이 올라왔다. 진짜 밤이면 벌써 누가 다 주워가고, 이렇게 길가에 버려지듯 굴러다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밤송이 없는 밤, 공원 밤' 등으로 서둘러 검색을 시작했다.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유튜브에서 찾아낸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주한 충격적인 결과, "밤과 꼭 닮은 마로니에 열매, 절대 먹지 마세요!" 등의 내용이 담긴 각종 게시물과 영상들이 많았다. 공원과 길에 떨어진 밤처럼 생긴 그 열매는 바로 마로니에 열매였다. '마로니에 공원의 마로니에가 마로니에 나무에서 유래됐다고?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라고?' 우리는 허파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서로 마주 보며 꽤 오래 실없이 웃어댔다.


마로니에 열매와 햇밤

이영자가 한 예능에서 군밤수프를 소개한 적이 있다. 평소 수프를 좋아하는 나는 단호박, 감자, 고구마 등으로 자주 해 먹다가 그걸 보고 군밤수프도 종종 만들곤 했다. 이번엔 하마터면 군밤이 아닌 마로니에 수프를 만들 뻔했다. 독성이 있어 먹으면 큰일 나는 지옥의 수프를 만들고, 좋다고 먹을 뻔했다. 마로니에 열매는 밤과 너무나 비슷하게 생겼다. 밤보다 더 밤같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산이 아니라 공원 가는 길에서 주웠고, 밤송이에 가시가 없었기에 그나마 의심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같이 신나게 마로니에 열매를 주운 것은 잊고 어느새 그걸 먹으려 했던 나를 본인이 살렸다며 열심히 놀려댔다. 나도 알아보고 먹을 생각이었다며 되받아쳤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먹기 전에 알아서 참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그나저나 마로니에 열매는 어디에 버려야 할까?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이 아니니 음식물 쓰레기가 아닌 종량제 봉투에 버려야 할까. 아무래도 괜한 짓을 열심히 한 것 같다. 표현할 수 없이 창피한 이 마음은 친정에서 보내준 진짜 햇밤을 먹으며 달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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