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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든밍지 Feb 07. 2024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약의 부작용이 느껴진 거야~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 이 글의 전 이야기는 작가의 매거진 <나의 병원일지>에 연재하였으나, 책 출간으로 인해 글을 내렸습니다. 전작 이후의 경험을 다루고 있으나, 시험관 시술에 관한 내용으로 전작을 읽지 않으셔도 이해에는 무리가 없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배아를 이식했으나, 실패가 확정되었다. 피검사 수치는 의심할 여지없이 0이었고, 그다음 생리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나마 희망적(?)이었던 건 난자채취와 다르게 한 주기를 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신선이식이 아닌 동결이식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이번 생리예정일은 연휴 틈바구니에 끼어있었다. 생리예정일이 항상 맞는 건 아니나, 혹시나 싶은 마음에 병원에 전화를 했다. 내 담당 의사와 교수는 모두 학회에 참석 중이었고, 사정을 들은 대직 의사는 4일 차 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5일 차에 병원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번 주기는 그냥 쉬어가라고 했다.


  실제로 연휴가 길어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이번 주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몸을 돌보기 위해 잠시 쉬어갈 여유 따위는 없었다. 휴직계에 명시된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한 달 반의 생리주기는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난소기능저하자에게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생리 어플이 항상 맞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보란 듯이 연휴 기간에 생리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임시공휴일에는 병원이 쉬지 않는다고 해서 4일 차에 가까스로 병원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과배란이 아닌 저자극 요법으로 시행하였다. 초기에는 보통 5일 정도 주사 없이 배란유도제를 복용한다. 저자극요법의 최대 장점은 배 주사가 없어 과배란 요법과 다르게 몸이 엄청나게 붓진 않는다.(그래도 붓긴 붓는다.)


  사실 그전 차수에서 약을 먹었을 때도 시야 흔들림이 1-2번 있었다. 보통 노트북을 할 때 시야 흔들림이 찾아왔었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었다. '컴퓨터 화면을 많이 봐서 그런가?' 정도로만 생각했고, 조금 흔들리다가 멈추곤 했다.

  

  이번에는 심상치 않았다. 약을 먹는 5일 동안 이틀 간격으로 시야 흔들림이 느껴졌다. 증상이 느껴지면 잠시 눈을 감고, 하던 일을 멈췄다. 가만히 있는데도 멀미가 나는 느낌이었다.


  시험관을 하면서 가장 큰 불편함이 뭐냐고 묻는다면 병원에 자주 가야 한다는 것, 자주 가는데 대기도 무진장 길다는 것, 심지어 돈도 많이 든다는 것, 조심해야 할 것도 많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단점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이번 차수를 하며 추가된 가장 큰 단점은 시간도 돈도 아니고 단연코 시야의 제약이었다.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던가, TV나 핸드폰으로 영상을 본다던가, 그림 그리기, 요리, 운동 등 일상생활에서 눈의 역할은 너무도 중요하다.


  시야 흔들림은 멀미처럼 어지러움을 동반해 영 불쾌하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반복되었다. 차라리 매일 밤낮으로 과배란 주사를 맞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저자극 요법으로 이미 시작했는데 중간에 바꾸기도, 멈출 수도 없었다. 그 시간을 그냥 버티는 것 밖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쉬는 시간이 꽤 많아졌다. 내 인생에서 그런 시간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소위 말하는 '멍 때리는 시간'이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고, 생산적이지 못한 그런 여유(?)는 시간 낭비쯤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지나고 보니, 약의 부작용이 아니라 몸에서 신호를 보낸 게 아닐까. 가끔, 아니 약 먹는 5일 만이라도 눈을 잠시 감고, 조금이라도 쉬어가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지친 몸은 열심히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약의 부작용, 오히려 좋아!' 이렇게 생각할 초긍정적인 사람은 역시 못된다. 시험관을 하며, 성격이 더 예민해지기도, 감정의 널뛰기도 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약의 부작용에만 사로잡히기보다는 '어쩔 수 없다. 잠시 쉬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자체가 큰 변화다. 넘어진 김에 잠시 쉬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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