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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든밍지 Feb 28. 2024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착상이 안 되는 이유를 누가 좀 알려주세요

  약 1년간 시험관을 했지만 배아이식은 두 번째다. 이번에는 신선 이식이라 난자 채취를 하고도 계속 걱정이 되었다. '배아가 3일을 버티지 못하면 배아이식도 할 수 없다. 이식 예정일이 잡혔지만 당일에도 취소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난자 채취 후 3일 동안을 걱정 속에서 보냈다. 그래서인지 새벽에 자꾸 잠이 깼다. 병원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 보는 게 일상이었다.


  배아 이식 당일까지 병원에서 연락은 없었다. 남편과 이식하러 가는 차 안에서도 "지금 연락이 오면 우리는 돌아가야 해..." 그런 소리를 하며 도착했다. 다행히 이번 차수에 채취된 난자는 살아남았고, 이식할 수 있었다. 지난번 배아까지 3일 배양 배아 2개를 이식했다. 첫 이식이 여름이었는데 두 번째 이식은 겨울이었다. 4개월을 꼬박 걸려 모은 두 개의 배아, 신선과 동결 배아가 1개씩인 게 왠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지난번 넣었던 질정이 단종되어 아예 다른 방식의 질정을 처방받았다. 다행히 인터넷을 보고 몇 번 사용해 보니 지난번 질정보다는 사용하기가 훨씬 수월했지만, 여전히 편해지지는 않았다.


  배아 이식 후에 정신과 신체 모두 최대한 감정의 동요 없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핸드폰으로는 끊임없이 '착상에 좋은 음식, 배아 이식 후 운동' 등의 검색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호기로운 결심과 달리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눈물샘은 마를 줄을 몰랐다.


  처음엔 병원의 잘못된 안내로 인해 난임상담사와 전화를 하다가 울었고, 그다음엔 아빠의 퇴임식을 준비하고, 축사를 쓰며 울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상태였는지 꽤 스트레스를 받고, 에너지 소모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피검사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만 잘 보내자고 다짐했건만, 왜인지 평소보다 다사다난했다. 아빠는 퇴직을 했고, 남편은 승진 소식을 알렸다. 세탁기는 고장 났고, 고쳤으나 또 고장이 났다. 낑낑대며 코인세탁소에 다녀왔고, 세탁소 근처 새로 생긴 카페에서 디저트 무료 쿠폰이 당첨됐다.


  이게 뭐 다사다난한 일인가 싶겠지만 사회와 거의 단절된 채 병원과 집만 오가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엄청난 사건이 많은 한 주였다. 마냥 슬픈 일만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멘탈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착상에 좋은 음식' 목록 어디에도 없던 치킨을 먹으며, 슬픈 예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피검사를 3일 앞두고, 이번에는 절대 임테기의 노예로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인터넷으로 주문도 하지 않았지만, 결국 직접 사러 가기 위해 패딩을 입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지난번에는 그나마 하루에 1번 확인하였으나, 이번에는 하루에 2번씩 임테기를 확인했다.


  기대가 컸다기보다는 결과가 실패더라도 확실한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히려 제일 처음 임테기를 할 때만 희미한 두줄이 보이는 것 같다. (사실 내 눈에만 두줄일 것이지만..) 그 후로부터는 또렷하게 한 줄로 보였다. '피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아직 모른다'가 병원의 안내사항이며, 내 멘탈을 지키는 마지노선이었으나, 마음은 어느새 새로운 병원을 찾아보고 예약까지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준비성이 철저한 성격 탓에 항상 1안과 2안을 준비했다. 직장상사들은 이런 내 일처리 방식을 좋아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항상 실패를 염두해야 하는 성격은 일말의 희망을 꿈꾸는 것은 사치라고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실패할 경우를 대비했지만, 스케일이 좀 남달랐다. 직장인이 오랫동안 안주머니에 사표를 품고 다니듯 이번에 실패하면 1년 동안 다녔던 병원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고, 변화의 시점이라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피검사 당일, 이미 결과를 예상해서 그럴까. 병원 가는 길이 싫었다. 출근길에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버스 안에서도 조급하거나 답답하기보다는 그 시간이 더 길어도 상관없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회피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 걸려 도착한 병원에는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여기까지 온 걸음이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미 생각하고 왔다. 근처 좋아하는 빵집의 들러 빵을 샀다. 오픈 시간을 이미 확인해 왔고, 살 빵까지 정해왔다. 빈 손으로 돌아가면 너무 허무할 것 아닌가. 빵을 사러 온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

  

  오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피검 수치는 0점대였다. 구차하게 자세한 수치를 물었으나, 1 미만은 자세한 수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까 먹은 빵이 목구멍에서 나오기라도 할 듯 목놓아 울어댔다.


  지난 1년간의 내 시험관 성적표는 보잘것이 없었다. 네 번의 난자 채취와 두 번의 이식, 거듭된 실패를 감당할 만큼 정신력이 강하지 않았다. 길고 긴 우울의 도돌이표였다. 시험관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명확했다. '난소기능저하', 하지만, 착상이 실패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보통 3번 정도 착상실패를 하게 되면 여러 검사를 하게 된다는데 그때야 알게 되는 것인가.


  햇살이 잘 들어오는 남향집에서 블라인드를 굳이 쳤다. 낮이지만 어두컴컴한 방안에 누웠다. '3일 배양 배아는 원래 착상이 잘 되지 않는다. 늦게 자서 그렇다. 영양제가 부족해서 그렇다.' 등등 오만가지 흠집을 찾아냈다. 어쩌면 난자채취만 잘 되면, 배아만 잘 이식되면 바로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착상 전까지의 과정에만 집중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미 실패를 예상하고, 병원 전원 결심을 했던 나는 아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배아 이식을 하고, 그 시간을 온전히 성공하기를 바라기보다는 실패를 마주했을 때 다시 일어날 지푸라기라도 만들어 놓는 데 힘을 쏟았다. 정말 나다운 결정이었지만, '이 슬픈 예감도 왠지 내가 만든 것일까.' 자책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런저런 일로 너무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연말, 연초 극성수기로 삼신할머니가 나에게는 다녀가지 않은 것인가, 도대체 언제 다녀갈 예정인지, 다녀갈 생각은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장 보러 가다 마주친 타로/사주라고 쓰인 상점 앞에 가만히 멈춰 서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저기에 답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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