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얼굴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희웅 Feb 06. 2024

판두

 정류장 앞 편의점 계단에 대엿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앉아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그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녀의 흉내를 냈다. 그때였다. 소녀는 수줍게 웃으며 나에게 손으로 만든 하트를 날려줬다. 예상 못 한 소녀의 사랑스러운 공격에 나는 치명상을 입고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쓰러져 가며 소녀에게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손으로 만든 하트를 날렸다. 소녀는 방긋 웃으며 엄마에게 달려갔다. 모처럼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좋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어느새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행복해하는 내가 보였다. 며칠 전 동네 모임에 참여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 많았다. 어쩌다 보니 내 옆자리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앉아 있었다. 사실 어른들끼리의 대화는 형식적인 인사와 궁금하지도 않은 근황을 묻고 나면, 딱히 할 말도 없었다. 하여튼 재미가 없다. 내 옆에 아이에게 몸을 돌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메롱’ 하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아이는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다시 몸을 돌려 ‘메롱’ 하며 혓바닥을 또 내밀었다. 아이는 두 번씩이나 메롱을 당하니 억울한 듯 나를 툭치며 불렀다. 아저씨 소리에 나는 눈을 감고 ‘메롱’ 하며 혓바닥을 또 내밀었다. 아이도 내가 몸을 돌릴 때 ‘메롱’을 했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기에 내가 또 이긴 셈이다. 이렇게 ‘메롱’ 몇 번이면 아이들과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다. 한 아이가 관심을 가지면 주변에 있던 아이들도 나에게 관심을 둔다. 그럼, 그때부터 이름도 묻고, 나이도 묻고 (여기서 아이가 8살이면 나는 7살이라고 말하며 형 또는 누나라고 부른다.) 이야기는 시작된다.     

 

 열 살 채원이는 판다 인형을 안고 있었다. 

“누나, 판다 인형 나 줘?”

“판다 아니거든.”

“그러면 이름이 뭐야?”

“판두야. 판다가 만두를 좋아해서 판두야.”

“그러면 판두 나 줘? 내가 깨끗하게 목욕도 해주고, 밤에 잘 때 안고 잘게.”

“안돼. 판두는 내 거야.”

나는 구경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호소했다. 

“누나가 나에게 판두를 안 준데. 판두 주라고 이야기 좀 해줘.”

나에게 판두를 주라는 아이와 판두를 주면 안 되다는 아이로 나뉘었다. 그때 판두를 줘야 한다는 아이에게 묻는다. 

“판두를 줘야 한다는 이유는 뭐야?”
 “채원이가 판두를 괴롭혀서요.”

“너는 채원이가 판두를 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판두는 채원이랑 오래 살았어요.” 

“그러면 판두가 좋아하는 만둣국을 먼저 먹는 사람이 판두를 가져가는 건 어때?”

 “좋아요.”     


 아이들은 시작 소리와 함께 허겁지겁 만둣국을 뚝딱 해치웠다. 그렇게 만둣국을 먹고, 귤을 까먹으며 놀았다. 멀리서 지켜보던 채원이 엄마가 다가와 아이와 놀아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들이랑 정답게 노는 모습 같아서 보기가 좋아요.”

나는 울면서 채원이에게 고자질했다.

“누나, 아줌마가 나에게 할아버지래?”

채원이가 발끈하며 말했다.

“할아버지 아니고, 아홉 살 동생이거든.”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창문이 닫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