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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롬 Dec 25. 2024

별똥별에게 하고 싶었던 것

2024. 11월  끼워 맞춘 해피엔딩  

어찌됐던 한단락 정리는 필요하다. 안그래도 생각많은 머리속은 언제나 여러생각들로 활성화 되어 있는데.. 현실까지 정리되지 않은 난제는 나를 더 어렵게 만든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끼워 맞춘 해피엔딩의 결론은 '모든 것은 투사였다'이다. 




나는 무엇엔가 고마워했고 그 보답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동안 괜찮은 척하고 다니느라 조증처럼 굴었다. 이제 보니 그렇다. 약의 부작용을 경험하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어느 느낌이 조금 더 나은 것인지 선택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한번 쳐진,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고 약을 먹은 증상 내지 후유증 이게 더 힘들었다. 업무도 달라진 후라 가슴 뛰는 것은 참을 만할 것 같았다. 나는 약을 끊는 것을 선택하고 수면제만 처방받았다.


변경된 나의 자리에서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으니 '괜찮아 보여야 하는' 거품이 빠지고 나는 좀 다운되었지만 잔잔하니 살만했다. 세상은, 아니 학교는 내가 아니어도 무너지지 않았고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지, 나의 업무변경의 사연들에 큰 관심과 영향이 없어 보였다. 이제야 내가 괜찮은지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업무가 바뀐 상황을 이제 나만 잘 받아들이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상담을 받기로 했다.  

어린 시절이 나에게 준 결핍은 '아무도 없다'였다. 내가 필요한 순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반복될 때 나는 이제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아니라 구조가 필요한 아이가 되었다. 누군가의 구조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불행인지 착각인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생존력 있게 혼자서도 살아남아 사회적 기능을 하는 인간이 되었지만 '돕는 자와 도움이 필요한 자'로 남모를 기준을 만들어 강자와 약자만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어른이 된 나는 대부분은 '돕는 자'를 자처했고 내가 설정한 약자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돕지 않으면 죄책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힘 있던 20대, 30대는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뛰어다녔다. 묻지도 않았는데 눈치 100단으로 먼저 나서서 했다. 돕는 역할을 할 때 내 삶이 안전해지는 듯했다. 이런 삶의 프레임을 알아차리고 40대에 와서는 내 발이 땅에 있는지 확인하며 속도를 늦추려고 노력했다. 가끔은 알아차리고 심호흡으로 나를 조절해 가며 살기도 했지만 대체로 나의 숨보다 발이 빨랐다.


문제는 돕는 것에만 있지 않았다. 내가 강자로 설정한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대에도 있었다. 안정감이 있고 심지가 굳어 보이는 사람에게 나는 기대고 싶어 했다. 물론 말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혼자 실망을 했다. '왜 저 사람은 나를 도와주지 않지?'라는 생각으로 서운하고 야속해했다. 그래서 이 프레임은 나를 더 지치게 하거나 외롭게 했다. 어느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별똥별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에는 '외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나는 너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큰 기둥을 잡고 혼자 씨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건 교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내적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별똥별을 향해 있었지만 사실은 어린 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를 돕고 싶었던 거다. 이제야 적당히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상담을 받으며 심리학 서적에 나온 증상들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흠칫 놀랐다. 나는 좀 더 외로움을 타고 좀 더 일을 좋아하는 정도라고 생각했지..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주요 증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어린 나',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있었다. 여실히 드러난 지금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상담을 받고 온 날 잠을 못 잤다. 모르고 살았던 게 더 나은 걸까? 아니면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게 다행인 걸까? 아직 헷갈리지만 별똥별과 나 사이에서 일어난 역동의 진원지를 찾아서 시원했다. 열쇠를 찾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써 놓은 글이다.)

결핍감은 집착을 만든다. 정말 불행한 것은 다른 것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을 보고 느낄 여지를 없앤다. 어린 시절 엄마가 집에 없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되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이미 ‘엄마’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모든 일은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가 기준이 되었다. 이 기준에 따라서 해석이 되니 항상 위축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없고 친구들은 엄마가 있었다. 이 말은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이들은 모든 것을 가졌다는 뜻이다.

 

집단상담은 보통 1박 2일 또는 2박 3일간 열린다. 처음 참석한 집단상담 두 번째 날 여름이라는 별칭을 사용하는 20대 후반 여자 선생님을 만났다. 첫째로서 동생을 챙기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애처롭게 바라보고 공감을 해주었다.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있는데 힘들었다며 눈물을 흘리는 여름 선생님이 괜히 밉기까지 했다. 참다 보니 화가 점점 커졌다. 그게 뭐가 슬프냐고, 엄마가 있는데 뭐가 슬프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엄마가 있고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애환을 딱 한 가지 기준으로 나눌 수는 없는 일인데 나의 기준은 분명했다. 나는 엄마가 있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친구 집에 들렀을 때 친구 엄마가 신발을 내어주며 잘 다녀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말할 수없이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내가 초라하다는 증거들을 수없이 만들 수 있었다. 이른바 비합리적 신념으로 '나는 초라하다'는 신념을 만들었다. 이런 게 아동기부정적경험(ACE)의 후유증이다.


조벽, 최성애박사가 쓴 정서적 금수저, 정서적 흙수저에서 미국은 아동기부정적경험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년 암치료에 들이는 의료비용보다 높아졌고 성인이 되어 마약, 약물중독, 자살, 이혼율의 평균 40%가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애착손상, 발달트라우마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는 것 같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는 않은 것 같다.. 여전히 가정보육을 위한 지원보다 영아기부터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을 사회적 양육시스템으로 구축하려는 것을 보면 그렇다.


여하튼 애착손상으로 인해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집착하게 된다. 집착은 균형을 잃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그런 지점이 있기 마련이고 성장해 가며 점차 균형을 찾게 된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결핍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어릴수록 자신을 지킬 힘이 없으므로 불안은 생존과 직결된다. 그때 느낀 감정은 좀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게 된다. 생명을 유지하는 뇌의 부위인 뇌간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아동기 부적 경험(ACE) 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유이다.

 

공감 교실 워크숍에서 사례 발표 시간이었다. 은주선생님(가명)은 대구에서 근무하는 초등 교사이다. 반 아이 중에 자신처럼 동생을 챙기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2학년 담임인 은주 샘은 9살인 은희를 보면 애처롭다고 했다. 자신도 어린데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과 아침밥을 같이 챙겨 먹고 등교를 한다고 했다.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의 숙제를 봐주는 은희(가명)를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고 한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유난히 마음이 가는 아이들이 있다. 때론 부러운 눈으로, 때론 안쓰러운 마음이 한가득 담아진다. 아이들을 보면서 선생님도 성장한다. 은주샘은 그런 자신을 돌보며 은희를 보면서 '대견하다, 잘하고 있다'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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