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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t. 그 아이가 소망을 이루었네

연재를 마치며

by 제롬

(연재로 발행을 해야 하는데 그냥 올려서 같은 글을 연재로 다시 발행했습니다..ㅠㅠ)




신념은 좀처럼 변화되기가 어렵다고 한다. 신념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나의 여러 신념 중 하나는 '혼자서 할 수 없다'이다.


이런 나의 신념과 달리 주변에서 종종, 아니 자주 듣는 말은 '잘한다'는 말이었다. 마지막 상담을 마치고 나는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다는 나의 신념을 재확인하였을 뿐이었지만 상담사는 달랐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담사는 보고 있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인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긍정적으로 나를 표현하고 있었다.


샘은 아무 문제 없어요. 그건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예요.


상담사는 보라돌이를 닮았다. 그의 귀여운 외모와 달리 깊은 통찰과 맑은 영혼을 가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착각이 만든 환상일 수도 있고... 여하튼 나는 보라돌이 상담사를 신뢰한다. 그럼에도 보라돌이 상담사와 만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내 힘으로 걸어가길 요구했기 때문이다.. 안내..뭐 조력..그런거..


'선생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일관된 말이 마지막까지 힘들었다. 뭔가 의지하고 싶었고 알려주길 바랐기 때문인지 그 말은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참고 이성적으로 말을 했다.

(그런 의미로 나의 핵심감정은 분노일 것 같다. 화를 참아 습관감정이 슬픔이고 이내 무기력과 우울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지도 모르겠다..)


나: 공부를 하는 게 좋을지, 상담을 계속하는 게 더 좋을지 모르겠어요?

보라돌이: 다 좋아요. 선생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지금까지 하신 대로.


나: 공부하는 것도 좋은데 그런 방법,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게 저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가 않아서요. 이해한다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 반응이나 불안이 줄어드는 건 아니잖아요. 개인상담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보라돌이: 아무 문제없어요. 저는 상담윤리를 지킵니다. 문제가 있는데 그만하자고 하지는 않지요. 아무 문제 없이 정상입니다.


나: 그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제 생각이 문제인가요?

보라돌이: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 올해 제가 직장에서 적응이 어려웠던 것들.. 문제가 된 것은 지금까지 제가 했던 방법이 잘못돼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게 맞는 거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 같아요.

보라돌이: 문제는 언제든 생길 수 있죠. 그럴 때도 있죠. 잘할 때도 있는 거고.


나: 그럼, 공허함은 어떻게 하죠?

보라돌이: 없는 느낌. 좋지 않나요? 고요하고 없다는 그 느낌.


나: 허탈하네요. 제가 공허한, 희망하지 않는 느낌을 갖고 있으면서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렵잖아요.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는 게. 학부모를 만나고 '얘는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어떻겠어요!

보라돌이: 괜찮을 것 같은데요. 반응은 모르잖아요. 사실을 인정하게 돼서 반가워 할지도. 늘 긍정적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어요.


나: 잠을 잘 못 자는 것은요..

보라돌이: 좋겠네. 그 시간에 뭐 하면 되겠네. 나는 너무 잠이..(웃음)


나: 네. 저도 이제 자는 건 포기하고 차라리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문제는 낮에 실수를 한다는 거예요. 운전을 하니까. 오늘 올 때도 벽에 백미러를 박았어요.

보라돌이: 각성이 높으니까. 운동을 해야 해요. 걸어요. 발에 자극을 주면 돼요. 아주 중요해요.


나: (말처럼 쉬우면 벌써 했지.....라는 생각은 속으로 했다) 샘은 세상에 문제 될 게 없다고 보시나 봐요? 정상의 범주가 엄청 넓으신 거죠?

보라돌이: (웃음) 맞아요. 문제 될 게 없어요. 다 잘하고 있고 정상이에요. 불교에서 말하는 전제가 뭐예요? 삶은 고통이라고 했어요.


나: 사는 게 고통이다. 그게 전제이다.

보라돌이: 샘은 잘 살아왔어요. 아무 문제 될 게 없어요. 저는 알아요. 샘이 잘 할 거라는 것을.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나: 저는 몰라요.(이제 자포자기.. 더 말해도 이 샘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도 절실함을 받아 줄 것 같지 않다)

보라돌이: 한 내담자가 있었어요. 창의적이고 일도 잘하고 그래서 회사에서 사람들의 미움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뭐 자살시도 하고 병가를 쓰게 되서 왔어요. 상담을 받고 돌아가서 이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자기는 그 일이 너무 좋아서 계속할 거라는 거예요. 누가 뭐라고 하는 건 상관없어요. 자기 자신으로 살면 돼요.


나: 그래요... 그러고 보면 저에게 두 개의 나선형의 원이 있어요. 하나는 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아이가 이제 미술치료 박사를 마치고 만다라 그림을 이용한 심리치유 강의를 한다는 거예요. 만다라 워크북도 만들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아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특수교사가 되었다는 거죠. 제 삶은 이 두 개의 원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보라돌이: (놀라워하며) 반복되는 게 아니고 완성된 것이죠. 제 눈에는 그 아이가 소망을 이루었네요.


나: 그렇게 볼 수도 있죠... 놀랍죠. 그때도 그림으로 치유를 받았는데 지금도 저는 그림으로, 만다라로 치유를 해요. 그때처럼 꽃잎을 그리며..

만다라 드로잉을 하고 작년에는 워크북을 만들어서 수업이나 강의에 쓰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알았어요. 만다라로 제가 치유받고 있다는 게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요.

특수교사가 된 것도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다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정말 아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돌봐야 하는 사람, 부족한 사람, 버거운 사람에게서. 그런데 제가 특수교사가 되었다는 게 너무 놀랍지 않으세요. 그걸 특수교사를 한지 몇 년 후에 알게 되었어요.

보라돌이: 그 아이가 소망을 이루었네.


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 아이가..

보라돌이: 이 얘기를 해주고 싶은데 왜인지 모르겠어요. 스승님이 계셨는데 자신이 왜 사는지 궁금해서 수행하면 알게 된 것은 성장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데요. 좀 다른 차원으로 가볍게 얘기하면 우리는 지구에 성장하기 위해서 온데요. 선생님은 그런 의미로 성장한 거죠.


나: 그래서 더 상담을 안 해도 된다?

보라돌이: 선생님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


나는 이제 내면아이를 만날 준비가 되었으니.. 상담을 제대로 시작해 볼까요?



라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심지가 지구핵에 닿아 있는 보라돌이 상담사는 그저 웃을 뿐 선택을 내 몫으로 남겨두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상담을 마치고 녹음을 다시 들어보며 곰곰이 다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상담사의 말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의 프레임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대체로 나는 나를 '견뎌온 삶'이라는 프레임으로 설명을 했고 보라돌이는 '훌륭한 전략'으로 살아온 삶으로 보았기 때문에 상담장면에서 나는 대체로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보라돌이의 눈에는 내가 심각한 내담자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니라고 나는 심각하다고 호소하고 싶었지만 구질 구질한 것 같아 최대한 조신히 상담을 마무리했다.. 상담자에게 이런 속마음까지 말해야 하는 건지 이렇게 최대한 안정된 모습을 하며 걸러낸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나는 상담사가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을 한다... 이러니 직장에서는 오죽할까...


...


새벽에 빠르면 1시. 잘자면 3시에 일어난다..

오늘은 3시에 일어나 보라돌이의 말처럼 할 일을 했다. 다시 잠든 건 6시였다. 오늘도 컨디션은 육신의 분리가 예상된다. 다시 일어나서 느껴진 불안으로 가슴이 조여 오는 게 느껴졌다. 불교는 삶은 고통이라는 걸 받아들인다 해도 이렇게 외로울 것까지 있나.. 또 화가 났다. 비몽사몽 일어나 책상에 앉아 긴 장문의 톡을 오타와 함께 보냈다.

결론은 '나는 상담을 원한다'였다..


상담을 하며 '나는 도와줄 수는 있지만 발을 움직이는 건 선생님이어야 한다'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결국 내 발로 가게 만든 보라돌이는... 갑이다..





연재를 마치며,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같이 아파해주시며 위로를 적어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깊은 밤, 또는 이른 새벽에 혼자 있는 시간에 공존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한텀의 상담을 마치고 이제 겨우... 정말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치유할 시점에 온 것 같아요. 그전에 잠시 쉬었다 상담을 받으려고 합니다. 저는 유난히 상담을 받으며 힘든 것 같아요..

다시 상담을 받을 때는 좀 가볍게 받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다음 연재는 저에게, 상담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글을 적어보고 싶어요.

편안한 숨을 쉬는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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