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운전사로 착각할 뻔 했어

네번째 손님은 침착한 아이

by 제롬

언제 탄 줄도 모르는 손님이 있었다. '침착한 아이'였다.


'13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 운전사(성인자아)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또 하나의 손님이었다. 언제부터 나와 함께 했었는지 잘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침착한 아이' 파트이다.


파트(part)는 말 그대로 나의 한 부분을 말한다. 내면가족체계치료(IFS)를 스터디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은 IFS 이론에 기반한 드라마 같다. 작가는 IFS 이론에서 말하는 파트들을 주인공 김고은을 통해 사랑스럽게 표현했다.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하나의 세포들로 표현하였다. 이동건 작가는 part를 세포로 표현하였고 이미 IFS를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 안의 파트들의 상호작용을 잘 표현해 주었다.


한마디로 유미의 머릿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세포들의 이야기이다. 이 인생 버스의 손님들처럼...


어제 나는 '13살 아이'라는 파트를 만났다. 그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림받은 아이'로 알고 있다. 그래서 피하고만 싶었다. 숨겨두었던 그 아이를 만난 것이다. 그 아이를 숨겨두었던 것은 유미가 사랑이 세포를 지하감옥에 가두었던 것처럼 내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였다. 사랑이가 등장하면 유미가 혼란을 겪고 웅이에게 온통 마음을 잃는 것처럼 나에게 이 파트의 등장은 위험한 것이었다.


나는 '13살 아이'가 등장하면 내가 무너질 줄 알았다. 등장만으로도 몸이 긴장이 되었고 지금껏 지켜온 나의 이미지는 망가지고 이성의 끝을 놓쳐 혼란의 도가니가 될 줄 알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13살 버려진 그 아이가 등장하는 것은 누군가가 구해줄 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지금은 보라돌이 상담사였지만 이상하게 상담 중에서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지 않았다.


그도 나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도와준다는 손길을 거부하고 나는 더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상담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 경험을 다룰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힘들다면... 다른 방식의 상담이 필요할지 모르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저도 확답을 해드리기가 어려워요.



보라돌이는 분명하고 단호하다. 그 말을 들은 나도 그 아이도 아프다. 나에게 너무 잔인하다. 이제야 비로소 바닥을 치고 나는 오기가 생겼다.


한결같은 보라돌이 상담사를 통해 나도 이제 단호하고 분명하게 '이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굴레를 내가 끊겠다는 것이다. 이런 서글프고 아픈 경험들... 세상에 혼자 남겨지고 비참해지는 처지에서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나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이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되뇌었다.


IFS는 참자아(Self), 파트(part)로 나누어지고, 파트는 보호자와 소방관으로 나누어진다. 13살 아이와 대화를 나눈 것은 나의 '침착한 아이'파트였다. 뭔가 이성적으로 정리하고 침착하게 만들었지만 self 고유의 특성인 연민, 친절함, 호기심, 평화 등의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묘하지만 달랐다. 차분하고 따뜻해 보이지만 뭔가 자유롭지 못하고 조심스러웠다.


'13살 아이' 파트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보호자'였던 침착한 파트와 대화를 하였다. IFS에서 보호자 파트의 역할은 말 그대로 메니저 처럼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자주 등장하는 파트인 보호자는 참자아(self)로 헷갈리기 쉽다. 너무 자주 등장해서 곧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나를 만드는' 파트는 언제부터 나에게 등장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중학생 때부터였을 것 같다. 조리 있게 말하고 침착하게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했다. 다소 무거워 보일 수 있고 진중해 보일 수 있게도 만들었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파트였지만, 뭔가 현실의 생동감이나 생생함에서는 멀어지게도 했다.


'침착한 아이'는 자주 등장했고 주로 나의 인격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침착한 파트를 주로 사용하며 공부를 했고, 강의를 했고, 연수를 기획하고 진행을 했다. 그러다 얼마 전 팀으로 하는 연수가 있던 날이었다. 그 전날 보라돌이와 개인상담을 하고 폭풍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내 마음은 온통 상담 중에 나눈 얘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저명한 00 교수와 팀으로 진행하는 연수였고 주강사, 모둠촉진강사가 함께 진행하는 긴 호흡의 연수였다. 과거를 알아가고자 오늘을 망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놓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려고 했다. 론 코츠의 '나의 상담의 목적은 내담자가 모든 곳이 축복이자 고통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심호흡을 하면서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만큼 오늘이 축복의 장이 되게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냥 모두 놓아버리고 이 축제의 장을 누리자는 마음이었다. 이 연수는 내가 걸어온 걸음이자 내가 누릴 오늘이니까. 연수를 마치고 의외의 피드백을 받았다. '오늘 너무 자유로워 보이더라, 처음 이미지는 차가운 커리우먼 같았는데 오늘 너무 좋아 보인다. 이런 캐릭터인 줄 몰랐다.. 등등'의 피드백이었다. 긍정적인 피드백이면서 내가 듣고 싶어하던 말들이었다.


침착한 아이가 등장하지 않은 그날, 나는 자유로우면서 지금 여기에 self로 존재하는 듯했다. 실수해도 괜찮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 자신도 있는 그대로 허용한 순간이었다. 자유로웠다. 늘 조심해야 하고 상황을 살피는 것이 기본 값으로 설정된 나에게 그냥 놓고 즐기는 경험이었다. 그 경험 때문이었는지 어제 나눈 것이 운전자(성인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착한 아이 파트가 네 번째 손님인지 첫 번째부터 옆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큰 파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제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고 싶다. 천천히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된다고 나를 더 이상 보호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운전자: 나는 진짜 운전자야. 너는 내 안에 있지. 그리고 나는 너의 존재를 인정하고 고마워하고 있어.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정도로 나와 함께 해주고 노심초사 나를 안전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해 주었지.. 한시도 쉬지 않고 상황을 살피고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어.


침착한 아이: 이제야 나를 알아봐 주는 군요. 내가 어느 순간에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당연히 이 버스를 운전할때부터 나는 옆에 있었죠. 내가 없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이만큼이나 유능하게 만든 것도 나라는 것을..


운전자: 알지. 나는 늘 나를 부족하게 여기고 작게 느끼지만 사람들의 피드백은 늘 잘한다. 열정이 있다. 리더십 있다.. 능력 있다는 말을 듣고 지냈잖아. 그만큼 노력해 준 걸 알고 있지... 대학교 때부터 나는 동아리를 만들고 회장을 하고 그랬잖아. 너무 긴장되고 무서웠지만 나는 하는 걸 선택했고 그날 만날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나눌 대화를 미리 적어보고 연습을 한 적도 있었잖아. 그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는 습관이 있었지..


침착한 아이: 맞아. 나는 정말 성실히 노력 많이 했어요. 그리고 이제 쉬고 싶어요. 이만하면 우리가 더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지금껏 살아온 것이 몸에 모두 배어 있을 테니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세포 하나 하나에 베어 있는 것이라 한순간에 멈출 수는 없을 거에요. 고른 숨을 쉬며 천천히 헤어져요..


운전자: 네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니까 떠나보내기가 싫을 만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어떤 순간에서도 내 마음이 두려움과 고통으로 휘몰아 칠때도 너는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침착하게 나를 만들어줬지. 그동안 애썼어. 언제든 이 버스에 앉아 쉬다가 더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길 바라..


침착한 아이: 그럴게요... 더 편하고 자유로운 곳으로..




침착한 아이.. 를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고마웠고 대견하고 애썼다. 참 많이 애쓴 침착한 아이. 고마워.

keyword
이전 04화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