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손님의 반전
손님을 태운 버스는 생각보다 안전하다. 난폭운전에 난리부르스를 칠 것 같았는데 하고 싶은 말을 해서 그런지 모두 얌전히 창밖 풍경을 유유자적 바라보고 있다. 정감이 느껴진다. 큰 요동없이 다음 손님을 맞이하러 가는 저 먼 곳에서 '이제 더 이상 조연으로 살지 않겠다'는 메아리도 들린다..
세 번째 손님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13살 아이다. 이 생각은 지금껏 '조연'으로 살게 했다. 이제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주연으로 살아가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 지..
따뜻했던 할머니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나갔던 13살 아이는 혼자 남았다. 오빠와 아빠가 있었고 먼 곳에는 엄마도 살고 있었지만 나는 회색빛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했다.
지금의 내가 인생 버스를 운전하며 13살 상처받은 그 아이를 만나 얘기를 나누어 본다.
운전사(성인자아): 오래 걸렸어. 너를 만나러 오는 것이. 지난번 상담에서도 너는 등을 돌린 채 나를 보지 않았고, 나도 외면했었지. 보라돌이 상담사가 그 공간으로 가서 너에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말하고 네가 보라돌이를 만나는 것도 싫어했었어..
보라돌이는 나에게 너를 만나야만 변화될 수 있다고 했어.. 나는 한참을 생각하고 며칠을 마음속으로 품은 후에 이 글을 쓰며 내 안의 공간을 만들 수가 있었어...
13살 아이: ... ... 나를 보러 오는 게 그럴 일인가..ㅜㅜ
운전사: 나는 너를 볼 용기가 없었어. 이제 힘을 냈으니 한번 믿고 우리 얘기를 나눠보자... 나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고 듣고 싶은 말도 있거든.
13살 아이: 그래 볼까요.. 뭐...
운전사: 고마워. 너는 할머니가 떠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었잖아.
13살 아이: 그랬었죠.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너무 좋았어요. 안 그랬으면 엄마가 방학 때 나를 할머니에게 다시 보낼 때처럼 그 고통을 느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니까요.
운전사: 그게 지금까지 효과가 있더라. 성인이 된 지금도 이별을 할 때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친한 샘의 아빠가 돌아가셨다거나 심지어 친한 샘의 남편과 이별 소식을 들었을 때도 슬프지가 않은 거야. 그때는 좀 난감하고 난처하고 그래..
13살 아이: 그렇겠네요. 좀 곤란하겠어요..
운전사: 그럼에도 나는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잖아. 그래서 적당한 제스처를 해서 그 상황을 잘 넘어가곤 해.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으니까.
13살 아이: 그렇겠어요. 소중한 사람들의 이별인데 미안하겠어요. 이런 과정으로 우리도 자연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될 수 있을 까요?
운전사: 보라돌이 상담사가 그러더라고..
"제가 아는 심리치료의 핵심 이론은
과거를 재경험하면서 변형이 되어야만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에요"
13살 아이: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무엇보다 자유로워지고 싶은 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에요. 그게 참 사람을 힘들게 하죠..
운전사: 나도 알고 있지..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너를 만나러 온 거야. 할머니와 이별이 가져온 것은 상실감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 지금도 그 생각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거든. 겉은 멀쩡 한데 나는 속에서는 늘 휘청거리는 것 같아..
13살 아이: 그래요? 어떻게 그렇게 오래갈 수 있어요? 운전사는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운전사: 맞아.. 나는 너보다 30년도 더 넘게 살았지... 그런데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생존과 관련된 기억이라서 뇌간이라는 곳에 새겨진다고 하더라고. 인간이 언어와 글을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본능의 뇌라고도 한데.. 우리 뇌에 새겨진 거지.. 비슷한 상황에서 자동화된 감정이 올라온 데.. 지금 해야할 것은 마음 챙김을 하면서 그 자동화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어.
13살 아이: 안타깝네요...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렇다는 게 충격적이네요.. 어떤 노력을 해야 한대요...
운전사: 놀랍다.. 네가 뭔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방법을 궁금해하니까..
13살 아이: 지금껏 30년도 더 넘게 화내고 슬퍼하고... 우린 할 만큼 했잖아요. 이제 방법을 알려주는 보라돌이가 있으니 그 방법으로 한번 해 봐요.
운전사: 그.. 그래... 그렇지... 미안하지만 외면하고 싶었는데... 나는 사실 자신이 없거든...
13살 아이: 나는 정말 아무도 없었지만, 성인인 나는 다르지 않나요?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운전사: 다르지. 다르고 말고. 나는 지금 너무 예쁜 아들과 따뜻한 남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 네가 바라던 대로 선생님도 되었고, 심지어 박사도 잘 마쳤지... 그러게..
13살 아이: 그런데 왜?
운전사: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왜? 불안하고 공허한 걸까...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너를 그냥 두고 어쩌면 감추고, 묻어두고 살았기 때문인 것 같아. 나는 너를 보는 게 너무 두려웠거든. 아플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
13살 아이: 내가 그렇게 보는 게 힘들었어요?
운전사: 어...
13살 아이: 어떤 점이요?
(지금 누가 누굴 위로하고 있는지....)
운전사: 너는 생각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너에게 의지하며 말을 하게 된다... 내가 너를 오해했을 수도 있어. 아주 약하고 힘이 없다고..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그냥 들어봐 줄래?
13살 아이: 네.. 저는 꼭 그렇지는 않은데~
운전사: 그래.. 나의 오해였을 수도 있고 내가 가진 두려움이었을 수 있어.. 옛날에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하잖아.. 할머니가 떠나고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시작된 것 같아.
성실하고 노력하면서도 맨 마지막에 가서 결정은 다른 사람이 해 주길 바라는 거지.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으니까.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이 생각은 여러 곳에 영향을 미쳤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표현하거나 표시 내는 것은 위험하니까 조심했지. 아주 조심했지. 그러니까 두려움과 긴장감이 늘 함께 하게 되더라고. 공허함에 내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더라.. 결국 상담까지 받게 되었고..
13살 아이: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열심히 산거 아니에요?
운전사: 열심히도 살지 않으면 어떡하겠어.
13살 아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정말 어려웠겠어요..
운전사: 어렵지. 처음엔 안 믿더라고. 얼마 전 새로운 학교에서 만나서 친해진 샘이 '샘은 반전이에요. 저는 샘을 강사로 처음 받고 연구회 회장도 했다는 것을 알아서 이렇게 외로워하는 사람인 줄 몰랐어요. 우와 반전!' 이러더라고. 내가 좋아하는 샘이라서 웃었지만 사람들은 정말 모르겠다 싶었어. 이렇게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기면 의지하고 싶어지는 견고한 댐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어. 그게 심할 때 몸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더라고..
13살 아이: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말이네요. 마음속과 겉이 다르다는 것이 그만큼 큰 차이라는 거잖아요.
운전사: 그만큼 열심히 산거다...
13살 아이: 그게 아니었다면 마음속과 겉도 비슷하면 반전도 아닐 테고 겉으로는 잘하는 사람인데 속으로는 할 수 없다는 차이도 없을 거 아니에요?
운전사: 똑똑하네... 그건 인정하지. 열심히 산 거... 지금의 결과들은 모두 내가 하루하루 만들어 온 것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 하다.. 이번에 한 달간 여행을 떠나며 책 한 권을 챙겼는데 그게 '삶이 나를 더 잘 안다'라는 책이거든... 여러모로 나를 믿어보자는 방향으로 나도 가고 있었나 보다..
13살 아이: 할머니가 떠나고 매일 꿈을 꿨잖아요. 두 그림자가 쫓아오면 도망가다가 건물 첨탑에서 떨어지는 꿈. 그 그림자를 미술치료 하면서 알게 되었잖아요.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위로해 주는 건데 무서워서 도망갔던 거..
운전사: 그랬지. 알고 보니.. 그 두 그림자를 만나고 낮에도 이제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을 만큼.. 사실은 두려움이었지 실제는 나를 도와주려던 거였다는 거를 알게 되었을 때 참 놀라웠지. 혼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13살 아이: 맞아요. 매일 그 꿈을 꾸고 기운이 쭉빠졌었죠. 아침에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갈 때 버스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때부터 나는 버스를 좋아했어요.
운전사: 맞아. 너는 버스를 좋아했지. 특히 밤에 타는 버스를.. 그것 때문인지 '인생버스'를 운전해야 한다고 했을 때 반가운 면도 있었어. 네가 좋아하는 걸 알았으니까.
13살 아이: 저를 태워주고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참 힘든 시기였지만 나는 고통만 있지는 않았어요. 알잖아요. 밝게 지낸 면도 있다는 것을.
운전사: 알지. 사람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했다는 걸...
13살 아이: 이제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요. 그럼에도 살아냈고 이렇게 선생님에, 아이들의 엄마로서 따뜻하게 품고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 사람이 이렇게 외롭고 공허하게 산다는 건 너무 아까운 것 같아요.
운전사: 뭉클하다.. 이게 웬일이니... 너에게 내가 위로를 받고 있으니..
13살 아이: 잘 살아왔어요. 그리고 대단해요. 누구라도 다 이렇게 해내지는 못했을 거예요. 누구보다 제가 알죠. 그게 얼마나 힘든 거라는 걸요.
운전사: 그래... 이래서 보라돌이는 다른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고 했구나..
13살 아이: 이제 나는 좋아하는 버스 좌석에 앉아서 갈게요. 창밖 풍경을 보며 놀게요. 제가 좋아하는 자리 알죠.. 앉아서 갈게요. 또 아이들을 만나서 우리가 잘 이겨낸 시간들을 만나 봐요..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 하지 않아도 힘이 있으니까요.
운전사: 그래., 너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더 생각나면 말을 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좋은 사람을 찾는 데 노력했고 그런 사람에게 위로와 지지를 받는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보라돌이 상담사는 내 발로 움직이라고 했고, 자신은 다만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참 야박하고 잔인하게 느껴졌지만...
일상을 보내며 기대고 싶은 마음은 너무 허전하고 쓸쓸하게 나를 만들었다. 더이상 그런 기분으로 내 삶을 채우고 싶지 않기에 나는 마주해 보기로 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난리 난리.. 칠 줄 알았던 아이들은 모두... 적당히 자신의 말을 하고.. 이미 온전한 듯 존재하고 있었다..
세번째 손님의 반전이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참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