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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마

첫번째 손님. 할머니

by 제롬 Jan 24. 2025

보라돌이 상담사의 말에 따라 내 인생버스의 운전대를 잡아 보기로 했다. 나역시 그말에 동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인생을 대신 운전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이 체념이 너무 쓸쓸해서 한참의 시간동안 마음이 아팠다. 지난 상담에서 나눈 말이 기억이 났다.


나: 몇 번이면 될 것 같은데 그냥 대신 해주면 안되요?

보라돌이: 정말요?

나: 네. 몇번이면 채워질 것 같아요.

보라돌이: 정말요? 많이 찾아다니셨잖아요. 이미 많이 시도해보셨잖아요. 그리고 저에게도 오신거죠.

나: ... ...


상담을 받으며 위로와 지지를 받고 싶었고 그것이 내가 상담을 신청한 목적이었다. 공허함이 신체화 되어 걸음을 걸을때 무겁고 몸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몸의 증상들이 궁금했고 그건 아마도 내 삶의 무게 같은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상담사에게 나의 무게를 말하고 깊은 위로를 받고 그 힘으로 다시 걸어가길 바랐다. 그런 정도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보라돌이 상담사는 내 발로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 난이도가 높다. 감정을 토로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감정의 대청소 같은 것을 기대했던 나의 방법으로는 나아질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한텀의 상담을 마쳤고 다시 상담을 시작하기 전 예정된 여행을 가게 되었다. 한 달간의 시간에 숙제같은 마음들을 적어 보기로 했다. 나는 이 버스가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운전대를 잡고 운전해 보기로 했다. 별 수 없다.


그는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정직다. '진실만이 나와 선생님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라고 보라돌이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자신을 이세상에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나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 말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왜 그럴까..


혼자 날지 못하는 새는 도퇴되는 자연의 섭리처럼, 솜털밖에 없는 나를 낭떨어지에 떨어뜨리는 것 같다. 언젠가 등반을 갔다가 돌아갈수도 앞으로 갈 수도 없을 만큼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그럴때 어쩌겠나 그냥 앞으로 가는 수밖에..


첫번째 손님은 할머니다.




지난 상담 중에 보라돌이는 그 어린아이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나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 보다 다른 사람이 중요하네요.라고 보라돌이는 말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엄마는 집을 나갔고 할머니와 아빠가 키워주었다. 동네사람들은 지나가며 '아빠한테 잘해라, 할머니가 고생이 많다. 엄마가 나쁜 년이다'. 등등의 말들 '네가 잘해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를 되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나는 7살, 8살, 또는 9살부터였을까. 나보다 다른 사람의 말이 중요해졌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나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뭔가 내 잘못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게 앞에 내 책임으로 마무리라도 해야 살 수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나를 더 두렵게 했다. 모호하고 막막한 삶은 오히려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섣불리 내 탓으로 정리한 탓에 오래도록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게 가장 쉬운 선택이었지만 책임은 가장 크다.


마음속으로는 '아빠를 잘 챙겨라'는 말을 들으면 이 산을 저쪽으로 옮겨야 할 것처럼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알겠다고 꿀떡처럼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부끄고 수치스러웠다.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날까 봐 불안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는 이제 겨우 7살, 8살인데 아주머니 보시기엔 제가 지적장애인 아빠를 챙길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세요? 대신 아주머니가 좀 챙겨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저는 못하겠어요. 제가 크면 할게요....'라는 말을 했으면 더 나았을까? 그럼...... 아마도 욕을 바가지로 들었을 것이다.


세상 제일 어려운 일은 솔직해지는 것이다. 나는 그게 참 어려웠다. 그때는 더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할 것 같은 행동을 하는 착한 아이가 되기로 했다. 실제 착했던 것은 아니다. 착해 보이는 아이가 되어 아빠를 챙기고 할머니의 장사 바구니를 대신 들고 다녔다. 착한 척, 내 마음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할 수록 그 괴리감에 괴롭고 죄책감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제철 야채를 담은 소쿠리를 머리에 지고 장날이면 팔러 나가셨다. 그 큰 소쿠리가 손으로 잡지 않아도 떨어지지 않고 머리에 있는게 신기했다. 할머니의 소쿠리에는 부추가 자주 담겨 있었다. 한 묶음 500원. 나는 늦은 밤 마루에 앉아 부추를 다듬어 한 다발로 만들었다. 손이 아무져 깔끔하게 잘한다고 할머니는 칭찬해 주다. 할머니는 장날 부추를 판 돈으로 500원짜리 소보로 빵을 사가지고 오셨다.


하루에 7~8번 정도 들어오는 시골버스. 막차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버스는 사람들을 한가득 실고 먼지를 풀풀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려 마을 앞 정류장에 정차했다. 한 명씩 내리고 이내 할머니가 소쿠리를 힘겹게 내리며 모습을 나타내면 나와 오빠는 달려가 소쿠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소보로 빵을 집으로 걸어가며 먹었다.


그 순간이 즐거웠다. 그 순간이 할머니에게 미안했다. 할머니는 그 고단한 일을 우리 입에 들어가는 소보로 빵을 보면서 위로받는 듯 보였다. 흐뭇하게 웃으며 꺼칠꺼칠해진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쓸어주며 눈빛에서는 '이 어미도 없는 불쌍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정성을 다해 나를 보살펴 주었다. 나를 새깽이라고 렀다.


그런 할머니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큰아버지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지만 나에게 여행이라고 말하고 이민을 준비 것이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13살 나는 이별 후에 있을 외로움과 죄책감이 두려웠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가 떠나고 아무 느낌도 느끼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뿐이었다. 하느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지금껏 꿈에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우리 아이의 얼굴을 보드라운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가끔 할머니의 숨결을 느낀다. 문뜩 쓸쓸해지는 밤에는 아이의 손바닥을 내 얼굴에 갖다 댄다. 36.5도.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마음을 녹여 준다.


내 마음버스에 첫 번째 손님은 할머니이다. 그런 할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는 7살 나도 옆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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