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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지 않은 건 너의 잘못이야

여섯 번째 손님은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

by 제롬

새벽시간 사랑하는 아이들이 천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잠을 자고 있다. 잠자는 모습만은 정말 천사가 따로 없다. 나는 너무 예뻐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뽀뽀를 하고 축복의 마음을 전한다.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새벽녘에 기도를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처럼... 그 마음을 잊고 있었다.


그 마음을 잊은 결과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격차를 만들어 냈다.


마흔이 넘어서고 몇 년 후부터 희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게 허상은 아니겠지...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하나 이루어진 것을 자각하게 되면서 절망이라는 단어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불현듯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쉽게 희망을 잡으면 안되기 때문에 조심 조심했다.


나의 희망의 증거들은., 어려서부터 되고 싶었던 선생님이 된 것이고, 아들만 둘을 낳고 싶었는데 내 곁에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싶었는데 그도 내 곁에 있다. 거실이 있는 집에서도 살고 싶었는데 거실이 있는 어엿한 아파트에도 입주했다. 막연했지만 사범대를 다니면서 선생님을 가르치는 그 무엇도 되고 싶었는데 그것도 이루어졌다.


마흔일곱. 소박했던 꿈을 이루었다. 어디서부터 불어온 에너지와 시공간의 힘이 도움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내 발걸음으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매일매일 노력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문장 '나는 아무도 없어'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누리지 못했고 남은 것은 공허함과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더 잘하지 못한 나를 질책했다.


빠삐용은 '인생을 낭비한 죄'
나는 '희망하지 않은 죄'


순진무구해 보이는 빠삐용이 탈옥에 또 실패하고 다시 독방에 갇혔다. 그날 밤 꿈에 '제가 무슨 죄가 있나요'라고 물었다. 나도 딱히 빠삐용은 죄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주 큰 죄 '인생을 낭비한 죄'가 있었다.


나에게도 죄가 없어 보였다. 나의 환경에서 괴로워했고 외로워했고 눈물을 혼자 흘렸을 뿐, 누군가를 탓하는 것 대신 나를 탓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겠나 싶었지만 아주 큰 죄가 있었다. '희망하지 않은 죄'였다. 매순간이 희망의 증거였지만 내 삶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현명하지도 사실적이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나는 늘 노력했고 주변은 많은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었다. 내 죄는 '희망하지 않은 죄'였다.


보라돌이는 그런 나의 말을 듣고 한마디를 했다... "그 아이가 소망을 이루었네요." 관점의 차이는 하늘만큼 땅만큼의 차이를 가져온다. 보라돌이가 하는 말은 희망의 언어였고, 나는 절망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단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노력한거에요. 그냥 상황은 달라졌을 뿐 저는 늘 같은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어요.'라고...


오늘은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를 만나 보려고 한다. 운전사도 성인자아가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안정되거나 이성적인 파트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마음 챙김 한 성인자아'가 운전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운전사: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가다 보면 알 수 있겠지? 뭐든 내 안에 있는 거일테니까.. 너는 어떻게 왔니?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이하 두려운 아이): 이 버스에 탄 여섯 아이들이 순서 대로 탔겠어요? 아마도 동시에 탔을 걸요? 조용히 그냥 있었겠지.. 아시다시피 우린 늘 존재했잖아요.


운전사: 그래, 그렇네.. 뭐 딱히 어느 순간에나 있었지. 늘 어깨와 심장에서 진동으로 긴장으로 나에게 존재를 알려주었지. 네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할머니가 떠났던 13살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 늘 밤에 나타나 귀신처럼 쫓아왔었잖아. 밤마다 나를 점령했었지..


두려운 아이: 아마도. 두려움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니까 원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형체를 만들었던 것은 할머니가 떠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때부터 맞아요.. 나를 확실한 형체로 드러나게 한 거요. 아무도 모르게 밤마다... 의식에서 지웠으니 무의식에서라도 제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를 무시하려 할수록 드러내고 싶었어요!!


운전사: 그래, 그랬구나... 그때 너무 버거워서 그랬어... 그럼에도 두 개의 형체를 만다라 미술치료로 만나게 되었잖아. 한 달 동안 검은색만 칠하며 작업했던 때가 있었지. 다른 색은 칠을 해도 답답하기만 한데 검은색을 칠할 때 가슴이 시원해졌었잖아요. 7개의 검정색 색연필이 몽땅해질 때까지 작업하고 연수에 참여했었지. 그날밤 꿈에 오랜만에 두 개의 검은 형체가 나왔지.


두려운 아이: 맞아요. 매번 제가 느껴지기만 해도 도망 갔는데 그날은 어떻게 멈추고 나를 휙~ 돌아봤어요?


운전사: 나도 정말 놀라웠어. 호기심. 왜 쫓아 오는지 진짜 궁금하고 뭔지가 궁금했어. 그날 밤에 촉진자인 나무님과 한방을 쓰게 된 것도 신의 한수였지.. 안심하고 있었던 것도 컸어. 형체만 보여도 뭔가 느껴지기만 해도 나는 미친 듯이 도망쳤었는 데... 참 놀라운 일이다. 내가 어떻게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어! 너 누구야!'라고 소리치며 돌아봤는지.. 너도 망설임 없이 내게 그대로 다가오더라... 정말 놀랍게도 가깝게 오니 너는 금색망토를 한 귀여운 요정 같았지.. 케스퍼처럼.. 그리고 니가 말했잖아,


왜 그렇게 도망을 가..
우리는 너를 도와주려는 거야.
너는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늘 너와 함께 있어.



두려운 아이: 그래, 맞아... 너는 고작 13살이었는데 이 모든 일이 너 때문이라고 자책을 했잖아. 그 고통은 말도 못 하지. 그리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너는 무기력해 했지.. 이 두 개의 감정 자책과 무기력이 지금까지 너의 이렇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운전사: 그러게... 참 깊고 오래간다.. 그렇지?

보라돌이 상담사는 이런 걸 자동화라고 표현하더라. 비슷한 공기, 장소, 사람, 상황만 되어도 촉발되어 버리는 것을 자동화라고 하고 이것을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변형시켜야 한다고 말했어. 그걸 위해 상담을 하는 거라고 했지. 우리가 다음 과정에서 할 상담일 것 같아. 나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그리고 이게 과연 될까 하는 의구심이 있지만 우린 돌아갈 길이 없잖아. 무조건 고!


두려운 아이: 무조건 간다. 그렇죠. 안 간다고 해서 편안하고 행복한 게 아닌데 안 갈 이유가 없잖아요. 다시 직면하고 새로운 경험으로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게 지금까지 해왔던 우리의 방식이었죠..


운전사: 이제 희망을 품는 거니?


두려운 아이: 인생의 총량이 있다면 우리가 가장 적게 쓴 게 희망 아닐까요?


운전사: 그래. 그렇네. 계속 너의 이름을 두려운 아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너무 달라진 것 같아서. 어떤 틈도 보이지 않았는데.. 뭔가 나는 이 만남들을 하면서 계속 가슴에서 울컥 울컥한다. 이제 알게 된 것의 반가움과 이제 알게 된 것의 속상함이 같이 있어...


두려운 아이: 두려움 맞아요. 단지 저항을 내려놓은니 달리 보이는 거겠죠. 그 두려움의 실체를 보려고 사실은 많은 것을 했었잖아요. 많은 공부도 하고 상담도 다니고, 집단상담에서 표현도 해 보고..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차곡차곡 쌓여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이제 희망을 말해도 된다.. 그만큼 안심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정말 믿고 싶었던 거잖아요. 세상이 안전하다는 것을...


운전사: 그래. 안심하고 싶었지. 희망은 절망과 한 끗 차이라서 또 절망할까 봐 두려웠었지... 이제는 희망도 절망도, 행복도 고통도 모두 함께 있는 게 인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좋은 것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그런 인생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좀 놓여나는 것 같아.


두려운 아이: 그래요. 우리끼리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보라돌이를 만나면 이 부분도 뭔가 진행이 되겠죠. 우리가 중요한 건 마주하려 한다는 것.. 그것이겠죠.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를 만나는 것이 이렇게 아픔과 긴장을 동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기쁨처럼, 슬픔처럼 두려움도 그냥 하나의 감정일 뿐이었다. (소방관의 등장으로 순간 머리가 쭈뼜했다. 너무 방심하지 마...라고 하듯.. 참... 우리 파트들은 부지런도 하다...)


그럼에도 오늘도 한걸음 더 나아간 것. 그것은 희망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희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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