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손님. 심장이 뚫린 아이
중증외상센터라는 드라마를 봤다. 보통 사람은 평생 볼 일이 없는 몸 안의 장기들을 과감히 만지며 수술하는 장면이 있었다. 심장파열로 찢어진 심장을 꿰매는 장면이었다. 보통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는 표현을 하는데 정말 찢어진 심장이 드라마 소품인지 실제 심장인지 헷갈리 정도로 리얼했다. 찢어진 심장에서 피가 튀였다.
또 다른 환자는 사고로 쇠파이프가 몸을 관통했다. 수술에서 주먹만한 굵기의 쇠파이프를 몸에서 뽑아냈다. 말 그대로 중증외상센터의 상황들이었다. 이런 일들이 일상이라니 놀라며 드라마를 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났다. 눈에 보이면 차라리 이해나 쉽지...
나는 뭐.. 중증내상센터인가...
상대도 탓할 수 없는 외상도 아닌 내상. 내 상처의 원인은 내적인 메커니즘이여서 대신 치료도 못해준다니... 심장의 파열이나, 쇠파이프가 몸을 관통한 모습이나...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 순간에 이해가 된 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에서 휠체어를 탄 아이를 보고 '일어나서 걸어'라고 말하는 아이는 없다. 아무리 심하게 장난하는 아이들도 그정도는 못봤다. 그러나 지적장애 친구에게 '왜 그렇게 못해, 잘 좀 해..'라고 하는 아이들은 많다. 자폐아이나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그래서 이해를 못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잘할 것 같기 때문이다. 반복된 행동을 하면 비난을 받고 심지어 나쁜애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오늘 나의 이 쓸쓸함과 외로움은 구멍 난 심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구멍으로 사랑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주고받은 사랑은 남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은 다 구멍으로 빠져나갔나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감각들을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렵다. 애초에 이해의 영역이 아닌 감각의 영역이다.
드라마에서는 몇 시간도 모자란 수술을 30분에 마치고 회복한 환자와 사진까지 찍던데.. 내 마음의 명의는 보라돌이가 아닌 내 몫이라니... 현실은 나에게 냉정하게 느껴지지만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살려는 놓을 수 있지만 다시 회복하고 살아가는 건 환자의 몫입니다'라고 말하는 의사의 말 것처럼, 보라돌이는 '스스로 해 내야 합니다. 저는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자신의 발로 움직여야 합니다.'
어제는 함께 여행 온 일행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일주일 정도의 여정이 더 남아 있다. 함께 지내며 즐거웠던 수많은 기억들이 있지만 나는 허전함과 쓸쓸함에 몸에서 통증이 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을 누릴 즐거움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운전사 : 누군가가 그러더라 소중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도, 공기도..
심장이 뚫린 아이 : 어제 드라마에서 너무 급하니까 위생잡갑을 잘라서 우선 심장을 봉합하던데.. 나도 너무 위급한 거 아닌가요? 사랑이 다 빠져나가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운전사 : 위기감이 느껴지는 구나. 참거나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있잖아. 마음은 그게 우선 봉합하는 과정이야. 마주하는 것. 나는 너를 피하지 않고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심장이 뚫린 아이 : 그렇네요.
운전사 :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했는데,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더 시원해지겠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심장이 뚫린 아이 : 나를 두고 가지 마!..라고 어이없죠.
운전사 : 아, 그 말을 하고 싶구나. 차마 그런 말이 이 상황과 맞지 않으니까 참았구나. 참았으니 통증이 생기고 허전해져서 심장까지 뚫린 것 같구나.
심장이 뚫린 아이 : 네, 맞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지..뭐.. 이런 현실과 내 생각의 괴로가 클 수록 힘든 것 같아요. 공허하고 외로워져요. 말하기가 더 어려우니까요.
운전사 : 그래, 그렇지. 그런걸 미해결과제라고..하는 것 같더라.. 누군가와의 이별을 건강하게 해보지 못했으니 이별이라는 상황에서 늘 촉발되는 거지. 이런 걸 자극에 자동화 되었다고 하더라.
심장이 뚫린 아이 : 그렇네요. 자동반응.. 그런 거네요. 상황이 이해되니 좀 진정이 돼요.
운전사 : 그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몸이 바로 말해주네.. 목이 조여 오는 느낌, 심장이 아픈 느낌, 몸이 껍껍이 덮어진 느낌들이 흐려지는 것 같아..
심장이 뚫린 아이 : 엇그제 무기력을 만나며 명치가 아팠던 것보다는 더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아요.
운전사 : 그래, 다행이다. 자동화된 패턴을 알아차렸으니 이제 수동으로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볼까?
심장이 뚫린 아이 : 좋아요!
운전사 : 친구와 함께 하며 즐거웠던 일은 어떤 거였어?
심장이 뚫린 아이 : 저녁에 방에서 창밖의 경치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 거요. 비슷한 또래로 나눌 수 있는 공감대가 있어서 그런지 한마디에도 빵빵 터지며 웃었잖아. 새로운 곳을 여행 다니고 경험하는 것보다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운전사 : 함께 하는 게 좋았구나. 살아온 시간 덕분에 난이도 높은 말들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게.. 말그래도 웃픈 일들.. 삶이 그런거래.. 하며 넘길 수 있는 여유들이 있는 게 좋았구나.
심장이 뚫린 아이 : 맞아요. 뭔가 채워지는 느낌,. 잘해왔다고 격려받는 느낌들.. 우리 다 그렇게 잘 살아왔고 살아갈 거라는 위로들.. 이 가볍게 나누는 말들에서 느껴졌어요.
운전사 : 그랬구나. 너의 심장에도 닿아서 따뜻한 시간이었구나.
심장이 뚫린 아이 : 그랬어요. 심장이 뚫린 느낌은 따뜻함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별개예요. 따뜻함을 느끼면서 뚫린 심장을 작게 만들거나 메우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마음에 채워질수록 저절로 작아지는 거였네요.
운전사 : 그렇구나. 네가 지금 얘기하니까 나도 알게 되었어. 그래서 긍정심리학이 발달했나 보다.. 한순간에 선택은 한가지니까.. 여하튼.. 따뜻함이 느껴지니 지금은 몸의 감각은 어떻니?
심장이 뚫린 아이 : 긴장이 어깨와 목, 심장, 팔에서 많이 내려갔어요. 가벼운 느낌이 들어요. 얼굴에서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고 웃음이 나는 듯해요.
운전사 : 심장은 어떻니?
심장이 뚫린 아이 : 그래도 지난 감각적으로 작아진 느낌이에요. 이를 테면 이제 외로움은 주인공이 아닌 느낌..
운전사 : 그렇구나... 신기하네. 몸은 참 신기하다.. 보라돌이는 상담을 마치고 항상 '참 잘했어요'라고 하던데...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온다... '우리 오늘 정말 잘했어!'
심장이 뚫린 아이 : ^^
우리 오늘 정말 잘했어!
성큼 성큼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더 나빠지지 않았고, 그대로 버려두지도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