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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좀 해 주세요.

열 번째 손님,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이

by 제롬


저 멀리 정류장에는 아이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어둑어둑해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몸집보다 훨씬 큰 종이판자를 들고 있어서 눈에 띄었다. 나는 못 본 척 가고 싶지만 저 아이가 그 곳에 계속 서 있을 것을 알기에 버스를 세웠다. 이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운전사: 탈래?


배고픈 아이: (배고픈 아이는 대답 대신 피켓을 잘 보이게 들어 보인다.) '밥 좀 해 주세요'


운전사: (아니, 그냥 말하면 되는데... 피켓까지..) 버스에서 무슨 밥을 해 달래?


배고픈 아이: 저는 배가 고파요. 이게 실제 밥이 아닌 건 아시잖아요...


운전사: 그래, 밥... 그래 우선 타... 네가 먹고 싶은 게 실제 밥은 아니겠지...


배고픈아이: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버스에 오른다.) 진짜예요. 아닌가.. 모르겠어요...


운전사: 우선 여러 마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 너도 앉고 싶은 곳에 앉으면 돼.. 이 차는 토토로의 버스처럼 넓어지기도 길어지기도 하고... 어느새 작아지기도 해..


배고픈 아이는 장난감 주방요리세트를 가방에서 꺼내더니 좌석 앞에 놓는다. 장난감은 신기하게도 크기가 아이가 주방요리를 하기에 딱 맞는 크기로 조정이 된다.


운전사: 여기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돼. 누구나 할 수 있고 시공간이 연결되어 있어서 한순간에 어느 지점으로 갈 수 있도 있고 몇 개의 시공간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어..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니?


배고픈 아이: (기다렸다는 듯이) 네! 동시에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사실 동시에 가려고 하지 않아도 동시에 생각이 나요.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던 초등학교 6학년 점심시간이요. 저는 한 개 남은 짜파게티를 맛있게 만들어 도시락에 담아 갔어요. 너무 바보 같게도 굳어버린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었을 때 그 순간이 굳어진 짜피게티처럼 남아있어요. 지금도 맛있는 걸 먹을 때면 그장면이 생각이 나요.


그래서 요즘에 참가하고 연수가 문제예요. 연수를 주관하는 선생님은 밥의 중요성을 알고 새벽에 제일 좋은 재료를 사서 직접 참가자들 밥을 해주시죠. 유명한 박사님이지만 아침마다 장을 보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좋은 한식집 사장님인 줄 안다고 해요. 자신의 중요한 가치를 실천하시는 것인데.. 저는 그 밥은 먹을 때마다 배가 채워지지 않아요. 고팠단 배가 자꾸 생각나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아요.


운전사 : 배고픈 아이야., 네 말대로 짜파게티 사건으로 감정들이 계속 너로 존재하게 하는구나...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주는구나. 그건 밥때문이라기보다 그 순간 느꼈던 수치심 때문이겠지. 얼마나 챙피했겠어..


배고픈 아이 : 네. 그래요...


운전사 : 정성들인 음식을 대접받는 순간에도 너는 배고팠던, 수치스러운 아이로 돌아가니 그 순간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겠어. 그런 순간이 오히려 피하고 싶었겠다.


배고픈 아이 : 네, 맞아요. 차라리 밥을 안먹을까 생각도 했어여. 정말 정성 들인 음식들인데 말이죠. 가끔은 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참가한 사람들과 재밌게 얘기를 하며 먹을 때는 그래도 나은 것 같아요.


운전사: 보라돌이 상담사가 그랬잖아. '우린 그런 경험을 했는데 어쩌겠냐'라고.. 그런 경험을 했으니 우린 다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우리에겐 너무 타당한 경험이지. 맛있는 걸 보며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은 거... 어쩌겠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우리의 감정을 인정해 주는 거야. 비난하지 않는 거야. 괜찮다고 말해주는 거야.


배고픈 아이: 운전사의 말을 듣고 좀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아요. 정말 가능할까요?


운전사: 그럼. 가능하고 말고... 우선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보자...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시냅스를 만들고 기억의 변형을 가져온다고 하잖아. 전망 좋은 곳에 우선 버스를 잘 정차해 볼게.. 이 버스는 일반버스였지만 또 순간 캠핑카로 변신도 돼. 뭐든 가능하지..


배고픈 아이, 두려운 아이, 부러운 아이, 참착한 아이, 무기력한 아이, 사랑이 빠져나간다고 말하는 아이... 모두 저 멀리 석양이 지는 캠핑장에 둘러앉았다.


운전사: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먹어볼까?


배고픈 아이: 이렇게 거창하게 캠핑장에 식탁을 펴고... 바비큐도 아니고 김치볶음밥? 에이...


운전사: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어때?


배고픈 아이: 역시.. 잘 알고 있네요.. 맞아요. 저는 바비큐보다 김치볶음밥을 좋아해요. 그리고 그 위에 반숙 계란프라이가 엄청 중요한 걸 알고 있죠?


운전사: 알고 말고.. 계란프라이는 한수저에 한 번씩 꼭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이 준비할게.. 니가 먹고도 남을만큼..


충만할 만큼의 양과 부족할 것 없는 마음들이 긴장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게 했다.


맛있게 밥을 먹었다.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저. 맛있게 밥을 먹었다.




상상 속에서 운전을 하고 상상속에서 또 밥을 먹는다. 상상으로 풍족한 감정을 느끼며 미소가 지어진다. 내 뇌는 이런 상상의 작업들을 하며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낸다.


먹는 건 즐거운 거야.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실제 밥이었다.. 실제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냥 외로웠고 배고팠다는 것을 이해받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상상이지만 그것을 직접 재경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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