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지 선생

내 몸이 허공에 용수철처럼 솟구쳤다.

by 윤수현

한 번만 더 어느 누군가의 발길이 다녀 간다면 나는 더 이상 삶을 영위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미 허리께쯤이 짓이겨져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의 끈질긴 생명력이 잘 버텨주고 있다.


그냥 억새풀 속에서 억세게 살길을 찾았어야 했다. 또 그 되지도 않는 모험심이 발동해서 습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아스팔트 길을 건너서, 말랑말랑한 흙과 들국화와 토끼풀이 평화로운 그곳으로 가기를 원했던, 그 순간부터 무언가 또 잘못되었을 것이다.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고 있다. 더 가벼워진 내 몸은 메마른 아스팔트 위에 더욱 밀착해 가고 있었다.


기적처럼 그녀가 왔다. 여섯 달도 넘는 시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녀였지만, 나는 그녀의 체취를 정확히 기억한다. 그녀에게선 엷은 베이비파우더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왔었다.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놀랍도록 흡사했다. 나는 짓이겨진 허리를 부여잡고 그녀의 눈길에 내 간절함을 전해보려 애를 썼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다.


그녀는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마음은 진실로 나를 구해주고 싶어 하는데, 손은 부들부들 떨고, 어떻게 하든지 나와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싶다는 마음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운하지만 이해해야 했다. 아쉽게도 나는 호감형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장 길면서도 끝은 날렵하고 튼튼해서 나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정도의 나뭇가지를 주우려고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며 뒤졌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녀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녀가 마음에 쏙 드는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고, 이윽고 내 몸이 허공에 용수철처럼 솟구쳤다.

순식간에 나는 억새풀 천지에서, 부드러운 흙과 노란 들꽃과 토끼풀 사이에 떨어졌다.


그녀는 부들부들 떠느라 이번에도 힘 조절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또 기절했다.

그래도 괜찮다.


그녀 덕분에 다시 또 살아났다.

그녀는 또 한 번 나를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