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일하는 사람들
“너 지금 손님 뺏았지!”
“무슨 소리야! 물어봐서, 대답했는데, 손님이 사간 거 어쩌라고!”
“재고 물어봐서 재고 보고 온 사이에 이 미친년이!”
“재고 수도 파악 안 한 니년 탓이지, 내 탓이냐!”
싸움이 났다. 파는 만큼의 인센티브를 받는 사람들은 예민했다. 그리고 이번 판매 실적으로 다음 계약을 할 수 있는 이모, 언니들은 치열했다. 마트에서 예민하게 경쟁이 붙는 기간에는 나이와 경력은 상관없었다. 다들 생계를 위해 일터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가끔 감정이 격해질 때면 사회에 나와 감정을 숨기고 일하는 느낌보다는 본능적인 감정에만 충실할 때도 많았다.
“봤제?”
“네..”
“평소에는 다들 온순한데, 이 시즌만 오면 이렇다.”
“무섭네요.”
“그래도 동글이 니는 눈치 안 보고 잘 팔대. 딱. 이 앞에서만.”
“이모님께서 먼저 잘 알려주시고, 지도해 주셔서.”
“말을 이리 이쁘게 한다. 안 그래도 이번주 매출 터졌드만.”
“제품이 선물하기 딱 좋잖아요. 제가 운이 좋았죠.”
“사장님이 니 보러 온다카드라. 밥이나 묵자.”
어색한 자리였다. 건식이모님이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사람. 그냥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에, 평범한 등산복을 입고 있는 아저씨였다. 밥도 대형마트 근처에 있는 시장의 한 허름한 김치찌개집이었다. 사장님이라고 하면 정장을 입고, 비싼 고기를 사줄 것 같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내심 기대했지만 별거 없다는 생각에 긴장은 되지 않았다.
“아영 씨?”
“네.”
“우리 여사님이 엄청 칭찬을 많이 하시더라고. 알바로 아까울 정도라고.”
“감사합니다.”
“이번에 우리 울산 쪽에 매장을 하나 여는데, 거기 맡아서 해볼 생각은 없나? 매출 나오는 거 딱 보면 감이 오거든.”
“네?”
“페이도 엄청 좋다. 건식이모님 이 일 하면서 애들 다 대학 보냈고, 울산은 지역 옮겨야 하는 문제도 있고 하니까, 내가 집도 다 해줄 거고. 복지. 지역 옮겨서 가야 하는 거니까, 숙소 개념으로 일시적으로 잡아줄 거고-”
“아이고, 사장님. 우리 아영이는 법대생입니다. 법대.”
“그렇지? 역시 공부 잘하는 사람이 똘똘해. 그래서 매출도 잘 올리고, 느낌이 있잖아.”
“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고시공부할 건가?”
“희망사항이긴 합니다.”
“왜? 법대 가면 판검사 하겠다는 마음으로 딱! 해야지.”
“그렇죠, 그런데 학비도 마련해야 하고.”
“그러니까- 결국 돈이야. 이 공부도 돈이 뒷받침되어줘야 하거든. 그러니까, 매장 가서 한 2~3년만 딱 일하고, 그 돈으로 공부하면 딱인데 말이야. 똑똑한 애들이 영업도 잘하거든. 요령을 알아. 그래서 공부만 하다가 세월 보내는 거만큼 아까운 거 없거든-”
“공부만 하면 되지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기 죽이지 마이소.”
“아니, 여사님도 그렇잖아. 현실 아니까.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이잖아. 결국에 그 판검사 왜 하는 건데- 대의를 위해서 하는 거겠어? 결국 돈이야. 아영 씨- 딸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잘 새겨듣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연락하고.”
“네.”
마트에서 일하면서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어른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아영 씨-아영 씨-라고 불러주니, 그들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새기면서 가볍게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대학으로 돌아간 그 이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법대니까, 당연히 사법고시를 응시를 하거나, 공무원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될 때까지 하면 되는 거라 생각해서 시간의 흐름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안될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만약에 안되더라도 대학을 나왔으니 어디론가는 취직하겠지,라는 막연함이 있었다. 역시나 나는 그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대학생이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현실을 다 이해하기에는 어렸다. 나의 미래는 두루뭉술했고, 현실을 아직 몰랐고, 생각이 없는 백지였다.
“우리 동글이. 아영이는 잘할 껀데요, 왜.”
“아영 씨는 잘할 것 같아. 좋은 인재지. 공부 힘들고 생각 있으면 연락 주던가.”
김치찌개국물에 밥을 비벼 먹으면서 건네는 작은 명함. 회사로고와 이름, 전화번호가 있는 진짜 어른들의 명함이었다. 학교에서는 성적으로 인정받고, 대학생이 되는 나는 대학교의 이름과 학과로 인정받았는데, 사회에서는 매출로 인정을 받았다. 공부가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어엿하게 어른으로서 벌어드린 돈으로 생활하는 나를 잠시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던가에 나의 통장 잔고를 생각했다.
사장님과의 식사는 끝이 났다. 사장님은 다른 매장에도 가봐야 한다며 갈라섰고, 건식이모와 나는 팔짱을 낀 채 마트로 돌아갔다.
“동글아.”
“네.”
“사장님, 좋은 사람이다. 고졸출신에, 경남지역 쪽 마트에 다 물품 입점시키고, 물건 댄다. 자기도 자리 잡기까지 힘들었다 카데”
“아, 대단하시네요.”
“그체, 고졸인데, 웬만한 명문대 나온 사람보다 잘 벌고, 사람 좋고, 근데- 그거 말해줘야 안다. 말 안 하면, 그냥 아저씨다. 마트에 물건대는 아저씨.”
“네?”
“사는 게 있다이가. 돈이 다가 아니거든.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는 이쪽으로 오지마라. 지금은 알바이고 하니, 이 일을 한다 하지만은. 이걸 업으로 하려고 온 게 아니다이가. 좋은데 들어갔으면 어려운 공부해가, 편하게 인정받으면서 살아야지. 알았제? 명함은 지갑 깊숙이 넣어두고 추억이라 해라. 아무리 힘들어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이 일. 나중에 해도 안 늦다고. 그러면서 버텨라. 알았제? 특히 여자는 올라갈 수 있는 만큼 오를 수 있으면, 올라야 한다. 그게 기준이 돈이 되어서는 안된다이”
“네, 저 대학 가서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여기 일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할게요.”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딱 – 돈 받는 만큼 해라, 니가 그 돈을 받는 거는, 앉을 곳 하나 없는 곳에서 꼬박 8~9시간을 서서 수많은 낯선 사람들 상대하는데 주는 돈이다. 그 돈이 결코 많지 않다. 알았제.”
나는 내가 받는 돈이 많다고 생각했다. 젊은 내가 어려운 지식 없이, 가만히 서서, 낯선 이들에게 말 한번 붙이다가 나의 근무시간을 채우고 나면 돈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마음 상할 때도 있고, 다리가 너무 아파서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나는 이 돈이 많아서,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이모님에게는 적은 돈이었다.
이모님과 나의 일당을 따지자면 분명 차이는 있으나, 이모님과 나의 경력을 비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차이였다. 끽해야 만원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일급제와 월급제로 따지고 보자면, 월급제의 그녀가 돈을 더 많아 보일지라도, 일급으로, 시급으로 따지면 미미한 차이였을 것이다. 그렇게 머물러있는 이 일의 급여는 단순히 돈의 기준이라기보다 머무는 시간에서 가치 없이 내버려지는 고인 그 무언가 쯤에 불가했다.
사회에서 처음으로 인정받아 받은 명함은 지갑 깊숙이 밀어 넣었다. 사장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동글아! 스카우트제의받았다며”
“아, 네.”
“정직원! 업체랑 직접 계약해서. 들어보니까 조건 되게 좋던데, 갈 거야? 생각해봤어?”
“야! 그만해라. 동글이 학교 가야지, 이제 한창 꽃 필 나이 미칬나! 야, 엄마가 마트 취직하라고 여 보냈겠나”
“언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디 그 자리가 그냥 나와. 요즘 뭐 대학 나와도 취직도 잘 안된다는데, 실속 챙겨야지.”
“동글이는 법대다이가.”
“아니, 뭐- 막말로다가 법대 나왔다고 해서 다 판검사 되는 거도 아니고, 미리 돈 벌고, 그 돈 모아 사장님 하면 되지.”
“가라! 뭔소리고!”
커피언니였다. 점심을 먹다 옆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다른 마트직원이 이야기를 한듯했다. 나는 잘 몰랐지만, 그건 분명 파격적인 제안이었음은 확실했다. 취업걱정은 없겠다며 웃으며 지나가는 이모님들과 연봉에 관심 많은 언니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건식이모가 건넨 말을 까먹은 채, 괜히 우쭐해 있었다.
“엄마! 나 오늘 건강식품회사 사장님한테 명함 받았어!”
“왜?”
“나 일 잘한다고, 울산에 매장 하나 맡아보지 않겠냐고.”
“그래서”
“아니, 월급도 많이 주고, 정년이 따로 있는 거도 아니고, 다들 엄청 부러워하더라,”
“그 일 하려고?”
“아니! 그랬다고. 나 법대 나와도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알았다. 수고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내일 일이나 가.”
엄마는 내가 법대에 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어디 취업할 거리도 마땅치 않고, 사법시험 말고는 길이 없는 것 아니냐 했다. 여자니까, 그저 무난하게 취업 잘되는 과에 가서 취업을 하고, 적당한 자리에 시집을 가고, 가정을 지키기를 바랐다. 그런 무난하고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하여, 나의 대학은 나의 인생을 성취하는 것으로서의 수단이 아닌, 그저 시집 잘 가는 수단정도로만 여겼다. 그랬기에, 법대를 싫어했다. 기 센 여자. 그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도 못한 채. 허황된 꿈만 꾸는 애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특별하게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특별한 사람들만 갈 것 같고, 대의가 있는 사람. 아니면 집안이 법조인인 사람. 그들만이 가는 특별한 곳에 간다고 했을 때,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라며 비난했던 엄마였다. 그 비난과 함께 마트에서 가서 현실을 보라고 떠밀었던 마트일. 그 속에서 적응하며 즐겁게 일하는 내 모습이 또 마음에 안 들었던 엄마였다. 적당한 자리에서 적당한 일만 하기를 원했다. 그 기준에는 ‘돈’의 액수는 중요치 않았다.
단순한 임시직인 나는 마트 구석구석을 보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본다. 각자의 사정들이 있다. 그리고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고학력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잘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들의 기준에도 '돈'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돈'이 최선이 아니었다. 그들만의 기준으로 제각기의 사정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 그게 어른이었다. 저마다의 기준에 부합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 임시직인 나는 그 기준을 잡지 못했다. 그 기준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금 잠시나마- '임시'라는 단어의 테두리 안에서 다리를 걸쳐가면서 생각을 해볼 기회가 있는 것이었다. 어른으로 커가는 건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