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걱정 하지 마, 삼촌 잘 따라갈 테니까."
혜지의 결혼식이 5월이라고 누이가 말한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드디어 30대 중반이 되는 조카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누이는 남해의 섬에 살았다.
누이는 어쩌자고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섬으로 시집을 가버렸다.
섬에 놀러 간 누이는 그 섬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날벼락같은 소식이었지만 나는 곧 섬으로 놀러 가도 되겠다는 생각에 곧 빠져 들었다.
1990년 어느 봄
혼자서 섬을 찾았다. 대학입시가 끝났다는 해방감과 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와 광역버스 그리고 다시 버스 무려 6시간이 걸려 완도항에 도착했다.
완도의 겨울 바다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선착장 인근에 생선을 말리는 그물만이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섬으로 가는 배는 작은 통통배였다.
손님은 나와 젊은 여자였다. 손님 두 명과 선원 두 명을 싫은 막 배는
그렇게 보길도로 향하는 2시 30분의 항해를 시작했다.
그 여자와 나는 흔들리는 배 난간을 잡고 해지는 남해 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보다 나이가 있어 보였는데 쓸쓸해 보였다.
고향인가요?
"아뇨"
"그럼"
겨울 섬을 가보고 싶어서요.
여자가 짧게 말했기에 더 긴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해가 져서 흔들리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바다인지 육지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 청별항에 도착했다.
청별이라 이름이 예뻤다. 창백한 푸른 별 지구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이윽고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버스가 잠시
멈추듯 하더니 미끄러지듯 바닷속으로 빠져 들었다.
조용한 바다에 별처럼 배들이 총총히 박혀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처음 섬에 갔을 때의 추억이 생각났다.
그래 5월이라고 그랬지... 좋은 때에 결혼하네.
응.. 너 꼭 와라. 당연하지
혜지의 결혼식 소식을 듣고 나자 나는 오래전 누이의 또 다른 조카와의 여행이 떠 올랐다.
아마도 조카가 고등학교 2학년때가 아니었나 싶다.
삼촌 저 지리산 여행해보고 싶어요.
이제 16살이 된 조카가 그런 말을 지난해 여름에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왜 갑자기 지리산 야… 지리산이 뭐 동네 뒷산인 줄 알아..
아. 그래도요.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다시 여름이 왔고 그 녀석은 배낭을 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
삼촌 작년 여름에 한 약속 잊지 않으셨죠.
그래.. 그래.. 그…
무슨 약속…
삼촌 왜 그래요.
작년에 지리산 가자고 했을 때 삼촌이 그래그래 하셨잖아요.
아.. 그래…
그랬다. 나는 작년에 조카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래그래 그랬던 것 같다.
아.. 그놈의 그래그래가 문제야…
그래 뭐 여기까지 왔으니 가보자.
대신 지리산천왕봉이 아니라 지리산 둘레를 걸어보자.
조카와 나는 그렇게 갑자기 지리산으로 떠났다.
첫 출발지는 화개장터였다.
터미널에서 떠난 버스는 구례 화개 하동을 지나 진주로 간다고 했다.
버스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전주를 지나 남원에 도착하니 멀리 지리산이 보였다.
야. 저기가 지리산이야..
엄청 크지..
네.
우리 저기 둘레를 한 바퀴를 돌아볼 생각이다.
산에는 안 올라가고요.
야.. 산에 올라가려면 산장예약해..
네가 갑자기 오는 바람에 예약을 할 수가 없었잖아..
하루 만에 가능한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휴가를 더 낼 수 없고..
지리산 천왕봉은 다음에 가보자..
너는 시간 많잖아
그렇죠. 저는 이제 고작 17살인데요.
버스는 구례에서 몇몇 사람을 내려 주더니 다시 화개를 향했다.
버스 창문 너머로 섬진강이 보였다.
섬진강은 상류보다 하류가 깨끗한 유일한 강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저 강안에 은어도 참게도 누치도 쏘가리도 각자의 속도로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유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니 맘이 편해졌다. 저렇게 느리고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나는 최근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머리가 아팠다.
삼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화개 다 왔어요.
어.. 그래
버스는 하동으로 가는 길에서 빠져나와 화개 터미널로 진입하고 있었다.
참게탕과 은어구이를 파는 집들이 즐비했다.
낚시 도구를 파는 집 어디나 있는 중식집에 커피숍과 여관들까지 여름휴가철을 맞은 화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가 화개장터예요?”
“어 그래?”
“왜 너음 처음 와보니?”
“아..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우리는 국밥집에서 국밥을 시켜 먹었다.
이제부터 걷기 시작이다.
잘할 수 있겠냐?
네!!
우리는 각자 15킬로가 되는 배낭을 짊어졌다.
삼촌 너무 무거운 것 같은데요.
조카의 무거운 짐 몇 개를 내 배낭에 넣고 나서야 우리는 첫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한 여름 열기로 익을 대로 익어버린 도로는 이미 더 이상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길이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바뀌면서 자동차는 씽씽 잘도 달리지만 걷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되었다.
아스팔트는 여름엔 쉽게 달아올라 열기로 후끈거리고, 한 겨울엔 빙판이 되기 십상이어서 바퀴가 아닌 두 발로 걷는 사람에게는 오래전 흙길이 마냥 그리울 뿐이다.
또 그 판판하기는 또 어떤가. 사람의 발은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야 자연스럽게 지압도 되고 피로도 풀어지는 법인데 그 반반히 포장된 길이라는 것이 걸으면 걸을수록 피로만 쌓이고 풀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길이 바퀴로 가는 여행이 아닌 걷는 여행인 것을 말이다. 인류의 최대 발명품 중에 하나인 바퀴를 포기한 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걷는 것뿐이다.
"야가 그래도 매형 닮아서 산을 잘 타고 잘 걸어 다니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라고 누이는 내게 말했지만 사실 걱정 될 수밖에 없었다.
"삼촌 걱정 하지 마, 삼촌 잘 따라갈 테니까."
"그래."
"걱정하지 말라니까. 삼촌." 조카 녀석도 이렇게 말했지만 지리산을 8월 한낮에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카는 가늠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다시 조카의 얼굴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 조카의 종아리 근육을 살펴보았다.
몇 년 만에 찾아왔다는 살인적인 폭염으로 구워질 데로 잘 구워진 8월의 아스팔트를 걷는 도보 여행이 조카나 나에게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삼촌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악양."
"악양?"
"그래 악양."
"악양에 가면 또 어디 가는 거야."
"회남재를 넘을 거야."
"회남재를 넘으면?"
"묵계치를 넘을 거야?"
그다음엔 어디냐고 물을 줄 알고 머리를 굴려가며 다음 고개를 생각하다 지도를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배낭 사이로 불었다.
우리는 화개장터를 빠져나와 섬진강변을 따라 걸었다.
"저 강이 섬진강이야, 삼촌 난 민물이 무서워?"
조카가 '민물'이 무섭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밀물'이 무섭다고 말한다고 생각했다. 조카는 바다에서 태어나 이제까지 자랐으니 썰물과 밀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다시 물어보니 조카는 정확히 민물이 무섭다고 했다.
"왜?"
"그냥 물색이 무서워."
"바다가 더 무섭지 않아?"
"바다는 별로…."
"그것은 네가 바다를 잘 알고 많이 접해서 그래. 민물도 바닷물과 같아. 무서워할 것 없어."
사실 나는 민물은 무섭지 않았지만 바다는 무서웠다. 바다에 들어가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가 나를 바다를 끌고 들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삼촌, 바다는 하나도 안 무서워."
"그것은 네가 바다에 살아서 그래? 매일 바다를 보고 있으니 바다가 무섭겠니?"
조카는 수긍하지 못했는지 민물이 무섭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것 같았다. 진안의 데미샘에서 출발한 섬진강은 진안과 임실, 순창, 남원, 곡성 그리고, 구례와 하동의 강처럼 순하고 소박한 지역만을 고루고루 지나다가 광양의 망덕포구로 흘러서 바다와 만난다.
조카의 말처럼 바다는 무섭지 않고 민물이 무섭다면 어쩌면 바다도 민물을 무서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물이 자꾸 차면 바다가 민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바다는 가끔씩 민물 때문에 떨지는 않을까?
"그래, 어쩌면 바다는 민물이 두려울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삼촌?"
"바다 말이야, 어쩌면 민물이 무서울지도 모르겠다고?"
"왜?"
"민물이 자꾸 들어가면 바다는 바다가 아닌 게 되잖아."
"치…. 지구상에 바닷물이 98%야 나머지 2%가 민물이고? 그런데 바다가 왜 민물을 무서워해!"
2%의 사람들이 98% 사람들을 지배하고 살고 있고, 98% 사람들이 2%의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카는 뭐라고 할까? 그러면 바닷물이 민물을 무서워할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에 대해 수긍을 할까?라는 생각에서 나는 애써 20:80이라는 파레토의 법칙을 이야기하려다 그만두었을 때쯤 우리 도보여행단은 화개와 악양을 잇는 섬진강변 길에서 유일하게 흙 길이 남아있는 부춘마을 도착해 있었다.
"삼촌! 지난번 학교 토론회에서 나는 댐을 건설하면 안 된다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댐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으로 주장했는데 댐을 반대하는 쪽이 이겼어!"
"그랬어. 어떻게?"
"댐 건설로 홍수예방 효과는 미약한데 생태계 파괴는 심각하다고 주장했지. 반대쪽에서는
홍수조절과 경제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던데?"
"그래서?"
"이 건설된다고 해도 홍수예방 효과가 적고 경제 발전은 건설만이 아니라 관광이나
생태문화사업을 통해서도 이룰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겼지."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조카 입에서 생태문화사업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조금 놀랬다.
"생태문화사업이 뭔데?"
"생태계를 잘 보전해서 관광이나 탐방과 같은 사업을 하는 거지."
"그래 그렇게 되면 지역주민들이 잘살게 되는 거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지역주민들도 민박이나 뭐 이런 것으로 잘살게 되지 않을까?"
"동강에 사는 분들이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인데 그분들이 민박이나 탐방사업을 할 수 있을까?"
"하기는 우리 동네도 관광지라서 사람들이 꽤 오기는 하지만 바다양식을 하지 않고 관광객만 상대해서 살기는 어렵지. 그래도 동강댐이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낫잖아 그지?"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조카가 어떤 논리를 통해 토론을 했는지 궁금해서 애써 댐 건설을 찬성해 봤지만 댐 건설은 고등학교 1학년 토론 시간에도 이기지 못하는 비약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득 보다 실이 많은 게 댐 건설임에도 정부와 건설업자들은 여전히 댐을 건설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도대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댐을 만들어야 만족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는 이미 2만 개 가까운 댐이 만들어져 있고 대형 댐만 1200개가 넘는다. 우리나라는 댐 숫자로 세계 7위이고, 국토 면적 당 댐 밀도는 단연 세계 1위다. 그런데 매년 물난리가 나고 홍수로부터 대단히 취약한 나라다. 이미 댐으로 물난리를 막아야 한다는 말을 다시 하기에는 미안한 숫자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들은 여기저기 호시탐탐 댐 건설을 위한 계획들을 수립하고 있다.
아이들도 공부 잘하기로 하고 용돈을 달라고 하면서 공부를 못하면 다시 손을 내밀기 미안한 법인데 매년 물난리를 막지 못하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이미 포화상태인 댐을 만든다고 손 벌리는 것도 창피한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어쩌면 민물은 댐을 무서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흘러가고자 하나 머물게 하는 것, 그래서 물을 감금하는 댐을 만든 인간을 향해 물은 물의 길이 아닌 인간의 마을과 길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조카가 민물을 무서워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자신들의 자유를 막는 인간들에 대한 원망이 민물에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들의 설움과 한탄 그리고 원망이 담겨 물색은 어두워지고 무서워지는 것은 아닐까? 조카는 물의 마음을 이해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섬진강변 길에서 얼굴과 손이 검은 노인 한 분이 멍하니 지리산 자락을 바라보고 있다. 저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 이 길이 악양 가는 길 맞죠." 나는 악양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그냥 물었다.
"여기가 악양 가는 길이지."
"할아버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는 오래전부터 피어난 얼굴의 검버섯과 희끗한 머리 그리고 앙상한 체구와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내가 질문하자 주름진 얼굴을 실룩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김노인 올해 나이 80으로 이곳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17살 먹던 나이에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한 광산에서 일했고 해방이 되어서야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해방된 지리산에는 빨치산이 누비고 있었다. 그는 빨치산이 젊은 사람은 모두 죽인다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거문도나 부산을 전전하며 타향살이를 했다.
"그냥… 갑갑해서 나왔지."
"네."
조카와 나는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배낭을 내려놓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있을 때 좀 전에 만났던 노인이 그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노인은 우리가 앉아 있던 마루에 앙상한 엉덩이 한쪽을 걸치더니 이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노인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그는 올해 나이 80살로 이곳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17살 먹던 나이에 강제징용으로 일본의 한 광산에서 일했고 해방이 되어서야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해방된 지리산에는 빨치산이 누비고 있었다. 그는 빨치산이 젊은 사람은 모두 죽인다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마산과 부산을 전전하며 타향살이를 했다.
그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돌아와 결혼을 했는데 신혼생활 3개월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징집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남겨두고 다시 생사를 넘나드는 군인이 되었다. 그는 결국 7사단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선을 지켰다.
"매일 아침 이 밥이 마지막이다, 이 밥이 마지막이다, 했는데 결국은 살아남았어."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와 평생을 농부로 살았지만 지리산 산촌에서의 농사 또한 힘겹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초가집을 개량한 집 한 채가 전부다.
그는 자신이 상이용사도 아니어서 한 달에 정부에서 주는 7만 원으로 생활한다며 상이용사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노인의 눈가에는 시나브로 눈물이 맺혀 있었는데 어느 부분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는 모르겠다.
징집을 받던 징용이 나와도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든지 어떻게든 빼돌렸으니까.. 우리처럼 돈 없고 힘없는 사람만 그렇게 살았던 거지, 내가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서 숟가락이라도 팔아서 아이들 학교에 보내려고 했어
"내가 크던 때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면서기가 되고, 중학교 나오면 군수와 서장이 되고 고등학교 나오면 도지사가 되던 시대였지."
노인은 자신의 인생이 징용과 도피, 군대, 농촌살림으로 이어지는 힘겨운 삶이 된 이유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교육을 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는 돈이 있었을 것이다.
"징집을 받던 징용이 나와도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든지 어떻게든 빼돌렸으니까…. 우리처럼 돈 없고 힘없는 사람만 그렇게 살았던 거지, 내가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서 숟가락이라도 팔아서 아이들 학교에 보내려고 했어."
노인과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나는 조카의 눈치를 살폈다. ‘조카는 이 노인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 교육이라는 권력으로 가는 마지막 차표조차 구하지 못해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했을까?’하고 조카를 찾아봤지만 조카는 이곳에 나룻배가 있었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를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삼촌, 나룻배가 없는데."
조카는 나룻배가 없다는 것이 실망이었는지 나룻배를 찾고 싶어 했다. 그것을 찾아서 무엇에 쓰려는 것일까?
노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의 힘겨움을 모두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에는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쁘다. 우리는 오늘 악양을 지나 회남재를 넘어야 하고 오늘 저녁 텐트를 치고 자야 할 곳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노인의 말을 어디쯤에서 중단시켜야 할지 몰랐다. 어느새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노인에게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담배 한 가치를 꺼내 피워 물고는 물끄러미 섬진강을 바라보며 이미 늙어버린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아마 오래전 젊었을 때 강에서 수영하던 젊은 날의 강한 어깨를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걷기도 불편하지만 한 때 그에게도 힘이 넘치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카의 나이에 그는 징용에 끌려갔다.
"아버지 이야기 잘 들었어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더운데 너무 힘들게 고생하지 말고 천천히 가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제까지 그의 힘겨운 인생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그의 힘들게 고생하지 말라는 말이 조금은 현실성이 없다고 느껴졌다. 다시 도로에 돌아온 우리를 반기는 것은 더욱 뜨거워진 아스팔트였다.
"삼촌, 저 할아버지 너무 힘들게 사셨다. 그렇지?"
"그래 우리 현대사가 그대로 담긴 인생이구나."
섬진강은 강열한 8월의 햇살에도 묵묵하게 하류로 흘러갔다. 지리산과 백운산 그리고 그 많은 지류에서 새로운 물들이 강으로 흘러 들어왔지만 강은 하나가 되어 흘러갈 뿐이었다. 그 끝이 어딘지 물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민하지 않았다. 흘러 들어온 것은 어딘가로 다시 흘러갈 뿐이니 말이다.
화개를 지나면 악양이 나오고, 악양의 회남재를 넘으면 청학동이 나온다. 악양에 접어든 우리는 곧바로 회남재로 향했다. 회남재는 악양 초입부터 12km 정도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다.
악양은 고기 잡는 투망을 넓게 펼친 것 같은 모습이다. 투망이 펼쳐진 곳에 들이 넓게 펼쳐 있고, 투망을 쥔 손에 해당되는 곳에 회남재가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투망의 끝자락, 즉 봉추돌이 달린 곳에 해당된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를 본 동네 할머니들은 쉬어가라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우리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수행자라도 되는 것처럼, 쉬어가라는 요청을 번번이 묵살했다.
"갈 길이 멀어서요." 사실 갈 길이 멀긴 했지만, 쉬지도 못할 만큼 바쁜 여정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마 한여름의 열기를 뚫고 가는 도보여행자의 강인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순전히 객기였다.
그분들의 선의를 무시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낮의 태양이 정중앙을 가리켰다. 더위는 마치 폭염을 담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악양면에는 식료품 가게 몇 군데와 버스 정류장,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이 있다. 면소재지에 없어서는 안 되는 3가지(정류장, 우체국, 농협이 골고루 있으니 면소재지로서 위상은 지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막걸리를 판매하는 주조장도 있다.
이 면소재지의 특이한 점은 부동산이 두 곳이라는 것. 조그마한 면에 부동산이 왜 두 곳이나 있을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법이라는 경제상식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땅을 찾는 외지인이 많다는 이야기다.
투망의 한쪽 끝에서 시작한 길은 중간쯤 돌아서 다른 한쪽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어져 있다. 가운데에는 회남재로 향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을 사이에 두고 날줄로 연결된 마을길이 이어지고, 그 길옆엔 다랭이논이 투망의 그물코처럼 다닥다닥 걸려 있었다. 회남재로 향하는 길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삼촌, 회남재는 여기서 얼마나 걸려?" "아마 3~4시간 정도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 빨리 걷자." 악양 초입부터 눈에 들어온 회남재를 향해 한 시간 동안 걸었지만 회남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아스팔트의 퀴퀴한 기름내와 열기 때문에 땅은 여름에 더 힘들 것이다. 땅속 생물들의 외침은 그렇다 쳐도, 등줄기에서 물처럼 흘러내리는 땀줄기는 몸속 수분을 다 배출해야만 멈출 것 같았다. 조카의 몸도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오후 3시. 태양은 산간마을을 폭염으로 덮어버렸다. 열기 때문에 힘이 빠져 아스팔트 오르기를 멈춘 조카는 뜨거운 아스팔트에 엉덩이를 붙였다가 풀숲으로 옮겼다. 조카는 배낭을 메고 앉아서 다리를 쭉 뻗고는 머리를 젖혔다. 더는 못 가겠다는 표정이었다.
"삼촌,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 너무 덥다. 방귀 뀔 힘도 없는 것 같아. 이거 너무 힘들다. 아빠가 공부가 제일 쉽다고 했는데 오늘에야 그 의미를 알겠어!"
조카는 편하게 교실에 앉아 공부하던 순간을 떠올린 것 같았다. 하지만 조카는 아직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힘든 그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열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여기서 벗어나면 곧 그냥 추억으로 남을 뿐이라는 것을.
"야, 얼른 가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었다. 조그만 더 가면 회남재가 나올 거야."
조카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겨우 힘을 내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든 첫 발을 내딛는 게 힘든 법. 조카는 그 첫 발을 다시 내디뎠다.
"어떤 대열의 속도를 결정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뭐긴 뭐야. 그 대열에서 가장 느린 사람이지. 우리 대열의 속도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삼촌이 앞서 가고 있지만 속도를 결정하는 건 너라고. 알았어?" 조카는 힘없이 대답했다.
회남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계곡이 나오고 농지가 나오기도 했지만, 마지막 언덕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 언덕에 오르면 길은 꺾이고, 오른 것만큼 긴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늘은 파랬다.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이 길 끝에 뭐가 있긴 한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열기도 이어졌다. 아스팔트길을 터벅이며 오르느라 몸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길은 이어졌기에 우린 가야 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3시를 넘어섰다. 회남재의 긴 아스팔트도 이제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막이 내리는 종점에선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아스팔트를 보수하고 있었다. 한낮의 열기를 식힐 그늘도 없는 그곳에서 포클레인은 토사를 옮겼고 인부들은 길을 치우고 있었다.
우리는 판자를 이용해 만들어놓은 갓길로 그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인부들이 먹다 남긴 수박이 보였다. 순간 수박을 먹고 싶은 욕망이 한낮의 열기처럼 맹렬하게 솟구쳤다. 조카 녀석도 수박이 먹고 싶었나 보다. 우리 둘은 수박에서 시선을 잠시 멈췄다가, 서로 얼굴을 보고는 씩 웃으며 길을 재촉했다.
드디어 길고 긴 아스팔트길이 끝났다. 하지만 아직 회남재를 다 오르지 못했다. 정말 길다.
"아저씨, 이 도로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아세요."
공사장의 책임자로 보이는 덩치가 큰 사내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이미 이 도로 끝까지 가본 경험이 있기에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금 서운한지 "여기가 끝입니다"라고 맥 빠진 대답을 했다.
그는 아마 나에게 대단한 선물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때 늦게 알은체 한 것을 후회했다. 그냥 사내의 선심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어도 되었을 것을 말이다.
우리는 드디어 회남재의 그 긴 도로를 통과했다. 아스팔트가 끝나고 산길이 이어졌다. 적당한 자갈과 흙 그리고 길 가득 덮인 질경이를 밟고 가야 했다. 길 옆 물가에는 까치수영이 흰 꽃을 바람이 흔들며 우리를 환영해 줬다.
"삼촌, 좀 쉬었다 가요" 조카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은 건넸다. 그러고 보니 쉬지도 않고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다. 20kg 다 되는 배낭을 메고 긴 오르막을 한 시간이 쉬지 않고 걸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조카와 나는 길가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조카는 숨을 고르면서 아직도 길이 멀었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많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도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가본 것도 도로 끝이 전부니까.
나는 수첩을 꺼내서 줄 하나를 그었다. 그리고 조카에게 물었다. "욱아, 이 선을 손대지 말고 길거나 짧게 만들어봐라?" 조카는 삼촌의 뜬금없는 질문에 수첩에 그어진 선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삼촌, 손대지 않고 어떻게 선을 길거나 짧게 만들어?" 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 선 밑에 작은 선 하나를 그었다. 그리고 조카에게 물었다. "이제 좀 전에 그은 선이 길어졌지?" 조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카는 펜을 가져다 다시 긴 선을 하나 그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면 이 선이 짧아지네?" "근데 삼촌 이것은 왜 갑자기 그린 거야?"라고 조카는 물었다.
"세상에 모든 일이 이처럼 상대적이라는 거야? 네가 아까 물었잖아 길이 얼마나 남았냐고?" "그것도 어떤 사람은 길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짧다고 하겠지 안 그래?" 조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출발하자!"
조카와 나는 무거운 배낭을 다시 추슬러 메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카에게 지금 걷는 길은 얼마나 길게 느껴질까? 우리는 잠시 침묵하며 걸었다. 한 여름의 열기는 늦은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고개를 숙일지 몰랐다. 나는 조카의 젊음과 탄탄한 종아리도 한 여름의 열기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기를 기원했다.
생각보다 회남재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길이 끝나고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오르막길에는 항상 마지막이 있는 법이다. 회남재의 길고 긴 길도 서서히 끝나고 있었다.
회남재 정상에는 청학동으로 가는 길과 묵계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졌다. 오른쪽으로 가면 묵계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청학동이 남쪽으로 가면 악양이 나온다고 되어 있었다. 산길로는 시루봉과 구제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묵계로 향했다.
오르막이 그만큼 힘들어서였을까? 우리는 휘파람을 부르면 호기롭게 산길을 내려왔다. 하지만 벌써 건너편 산에는 우리가 넘어야 할 다음 재인 묵계치가 보였다. 하지만 다음의 어려움이 보인다고 해서 지금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않을 필요까지는 없다.
묵계로 가는 길은 다행히 시멘트 길과 자갈길이 적당히 있어 걷기에 좋았다. 또한 검은색에 섹시한 나비와 화려한 색으로 맘껏 치장한 나비들이 길 앞에서 춤을 추었고 방울꽃은 우리의 여행을 축복하듯 방울방울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서 지프차 한 대가 산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아마 저렇게 산길을 올라서는 오늘 우리가 느끼는 기분을 평생 느끼지 못할 것이라며 걸어온 자만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회남재를 오르던 그 긴 시간을 충분히 보상받을 만큼 우리는 행복했다.
묵계치를 내려오면 묵계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산에서 흘러오는 물은 가둬놓는 일종의 물감옥이다. 산에서 흘러온 물든 이 저수지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이들은 잠시 들어온 순서를 잃어버리고 저수지에서 빙빙 방황하다가 건너편 출구를 통해 다시 긴 여행을 하게 된다.
우리는 묵계 마을 앞에 다리 밑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계곡이 흐르는 곳에 텐트를 치고는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보통 저녁때는 밥을 많이 해서 저녁으로 먹고 다시 다음날 아침에는 누룽지를 해 먹으며 남은 밥은 점심 도시락을 만든다. 이런 식사는 혼자 여행을 많이 다닌 나의 경험에서 나온 가장 편안한 식사준비방법 중에 하나였다.
조카는 저녁을 먹자마자 텐트 안으로 직행하더니 잠이 들었다. 곧 코 고는 소리가 들렸으나 계곡물소리에 묻혔다. 나는 옆 텐트에서 야영하는 사람들과 앉아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들은 낮에 잡은 물고기에 밀가루를 묻힌 다음 기름에 튀긴 물고기를 안주를 먹고 있었다. 나도 몇 점 먹었으나 맛은 비릿했다. 그들은 친척 사이로 부산에서 산다고 했다. 작은 슈퍼를 하고 있으며 그냥 살만 하다고 했다. 옆에 펜션은 하룻밤에 15만 원인데 이 값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50대 중년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이 정도 가격이면 싸다고 했으며 친척이라는 남자는 비싸다고 했다. 텐트나 치고 자면 될 것이지 무슨 펜션이냐며 낭비라고 했다. 그들은 나의 대답도 기다리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아주머니의 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이유는 그 남자가 그 여자보다 윗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결국 나이 먹은 사람이 이기기 쉬운 법이니 말이다. 펜션 가격이 비싸거나 싸거나 하는 문제는 나에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자 나는 텐트로 돌아왔다. 조카는 여전히 코를 골며 하루의 피로를 코로 풀고 있었다. 나도 조카 옆에 몸을 뉘었다. 무엇인가 생각하려 했지만 곧 잠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어제 술을 함께 마셨던 부산에서 온 일행이었다. 아침에 일이 있어 일찍 떠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짐 몇 개를 옮겨 주었다.
그들이 떠난 개울가는 다시 물소리만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떠나야 할 사람은 그들뿐이었던 모양이다. 삼신봉과 청학동을 지나 흐르는 물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서서히 밝아지는 세상을 바라봤다. 잠자리 한 마리가 젖은 날개를 텐트 끝에 앉아 쉬고 있다.
밤새 지리산에는 물소리가 엄마 잃은 아이 울음소리처럼 징징거리며 울어댔다.
잠자리 날개 젖은 이른 아침부지런한 매미는 벌써 짝을 찾는 긴 울음을 시작했다.
어제의 피로는 묵직하게 근육에 남아있고 까닭 없이 눈꺼풀엔 아이처럼 눈곱이 자라고 있었다. 작은 텐트에서 조카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밤새 동침한 모기는 통통히 살이 쪘다. 피로를 푼 우리도 맘껏 배를 채운 모기도 모두 행복한 밤이 그렇게 가고 다시 아침이 밝아왔다.
저수지로 흘러가는 물을 담아서 누룽지를 끊인 다음 조카를 깨웠다. 조카는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제 이름을 부르자마자 일어섰다.
"밥 먹고 출발하자, 우리 갈 길이 멀잖아." 조카는 "네"하고 짧게 대답했다. 아침 누룽지는 맛이 좋았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정리했고 길을 떠났다. 묵계 초등학교를 지나 잠시 청학동 가는 도로를 걷다가 묵계치로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묵계치를 향해 오르는 길가에는 자귀나무가 꽃을 피워 달콤한 향내가 길가에 가득했다. 자귀나무는 향기가 좋고 집에 심으면 집안이 화목해진다 해서 집과 집 주위에 많이 심는 나무로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해보면 절로 행복해질 듯하다.
고갯길을 오르는데 지프 한 대가 멈춰서 어디 가냐고 묻는다. 차를 타라는 것이다. 개량 한복에 수염을 기른 사내는 우리가 지금 도보 여행 중이라고 말하자 묵계치는 그렇게 높지 않고 험하지 않으니 쉽게 넘어갈 것이라고 말하고는 자기 차에 우리를 태우지 못한 것이 서운한 듯 고갯길로 올라갔다. 지프가 오른 길을 따라서 우리도 고갯길을 올랐다.
묵계 터널을 걷는 것은 산속에 심장을 걷는 것처럼 서늘한 기분이기도 했고 굉음을 내고 달려가는 자동차의 공포를 정확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일종의 자동차 공포 체험장이기도 했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이 터널 안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자동차가 어떤 느낌을 주는지 체험을 해보게 하고 싶었다. 아마도 진절머리가 나서 차를 쳐다보는 것도 잠시 동안은 주저하게 될 것이다.
조카와 나는 지겨운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터널 안은 특유의 탁한 공기와 서늘함과 자동차의 굉음 때문에 가파른 오르막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터널에는 언제나 끝이 있는 법이다. 20여분을 걷자 드디어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하게 밝아오는 터널의 또 다른 입구이자 출구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강열한 열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터널 넘어 8월의 아스팔트에는 아지랑이가 수도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묵계 터널을 빠져나오면 하동에서 산청으로 군을 옮겨 타게 된다. 묵계 터널을 내려와서 곧장 밑으로 내려가면 거림계곡이 나온다. 거림계곡으로 지리산 세석평전으로 오르기도 하는데 나는 한 번도 거림계곡으로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거림계곡에서 민박을 하는 아주머니에게 중산리 넘는 고갯길을 물어보니 자기는 잘 모른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도 그 고갯길을 몰랐다. 단지 그 고개를 넘으면 중산리가 나온다고만 했고 정확하게 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 청년들이 마을 점포에 있어서 길을 물었지만 중산리 고갯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너무 오래되어서 길이 없을 것이라고 했고 젊은 사람은 가보지 않아서 길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드신 분들이나 모두 오래된 산길을 몰랐다.
단지 나이 드신 분들이 아마 위로 올라가면 길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만을 듣고 우리는 길을 찾아서 산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분의 말대로 내서보건소에서 꺾어서 오르막으로 계속해서 오른다가 왼쪽으로 꺾어 올라가야 했는데 길이 아주 가팔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묵계치를 넘어 중산리까지 쉬지 않고 왔더니 점심 먹기 전에 도착했다. 시원한 중산리 계곡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8월의 태양은 여전히 우리의 머리 위에서 작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길만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은 여러 가지다. 인생도 그렇고 길도 그렇다. 더구나 산길이라는 것은 일반 도로나 마을을 연결하는 길보다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고 찾기도 어려운 법이다. 일반적인 길이 사람과 차가 다니는 것이라면 산길은 짐승도 가고, 풀도 가고, 산죽도 가고, 사람도 가기 때문이다.
중산리에서 라면에 배를 채운 우리는 중산리를 빠져나와 동당리를 지나 산길로 내원사로 가기로 작정했다. 사실 이 길은 넘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도책에는 분명히 길이 표시되었기 때문에 나는 별 다른 고민 없이 산을 넘는 길을 선택했다.
중산리에서 동당리로 가느다란 산길이 이어진다. 아래쪽 계곡에 놀러 온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계곡과 산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길 옆으로는 무속인들의 집이 보였다. 그들에게 내원사로 넘어가는 길을 물으니 아는 이가 없다. 모두 지리산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라 산길을 모르는 것 같았다. 산길을 넘어가려면 산과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생각에 가느다란 외줄기 산길을 더 깊이 들어갔다.
한 여름의 열기는 산속에까지 전해져 땀은 뚝뚝 떨어지는데 반바지 차림의 우리를 산죽을 잘라 놓은 것들이 장애물처럼 우리를 가로막는다.
더구나 산죽이 다리를 공격하던 길까지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곧 자취를 감춰 버리는 것이 아닌가? 뒤따라오는 조카는 말없이 따라오고 있지만 앞서가는 나나 뒤따르는 조카나 키 넘는 산죽처럼 답답했다.
" 우리 여기서 내려갈까?"
"어떻게 올라왔는데 포기해 삼촌!"
"그래 좀 더 가보자."
산속을 헤맨 지 2시간이 지나 어느덧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갈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고개를 들어 산 위를 보니 정상이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길은 보이지 않지만 조릿대 숲을 손으로 헤치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마음 한편에는 올라가면 길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는 했지만 혼자 가는 길이 아니고, 조카의 체력을 감안할 수 없다는 점과 물통 속에 물이 텅 비어 있다는 현실적인 조건 그리고, 오후 4시라는 시간이 내원사까지 가서 야영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산속을 헤치고 올라가는 발 밑에 영지버섯이 보였다. 이런 깊은 산중에 영지버섯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우리는 산 정상을 향해 가쁨 숨을 몰아쉬며 올랐다. 다행히 조카는 씩씩거리면서도 그 험한 길을 쉬지 않고 따라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절벽처럼 가파른 산길을 그것도 키 넘는 산죽을 헤치고 올라가는 것은 그렇게 쉽거나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난관인 것이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위로 올라가면 산은 언젠가는 정상을 허락하는 법이다. 오후 다섯 시 드디어 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올라가니 뚜렷하게 산길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고 마루를 잇는 길만 보인다. 우리는 내려가야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또다시 무리수를 두었다. 한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했고 입이 바삭바삭 타 들어갔기 때문에 속히 물을 먹어야 했다. 결국 산길도 아닌 길로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무작정 아래로 향해 내려갔다. 산죽이 없는 길이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듯이 말이다. 큰 고생을 해본 사람은 작은 고생은 고생처럼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둘 다 말없이 산길을 내려오는데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겨우 외줄기로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 하나가 해결되면 다음 일도 쉽게 해결되는 법인지 물줄기가 시작한 지점부터 고로쇠 수액을 받는 호스라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라인만 따라가면 길이 나온다. 이런 것을 우리는 확신이라고 한다. 우리는 드디어 첫 민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내려오니 내원사가 보인다. 캠핑장을 찾아 내려가는 데 차에서 떨어진 수박이 한 덩이 굴러다닌다. 조카와 나는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떨어진 수박을 주워 들어서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수박 같았다. 세상이 이런 것이다. 배부르고 편하게 걸어왔다면 차에서 굴러 떨어져서 반쯤 깨진 수박이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는가! 배도 고프고 물만 먹고 산을 하나 넘어오니 굴러 떨어져 깨진 수박조차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내원사 계곡 근처에는 큰 야영장에는 휴가를 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처럼 배낭을 메고 온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통해 산행을 시작하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내원사는 오직 절과 계곡이 있을 뿐 지리산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겨우 텐트 칠 곳을 발견하고 거기에 지친 몸을 뉘일 수가 있었다. 옆 텐트에서 산하라는 노래가 들린다. 지리산 산속에서 듣는 산하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지리산 산하에서 그렇게 길고 긴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우리는 밤재로 향했다.
길고 긴 아스팔트 길이 이어졌다. 조카와 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길고 긴 길을 걸어 올랐다.
밤재를 지나서 함양으로 향했다.
밤재를 내려와 알 수 없는 어느 마을에 텐트를 쳤다.
함양까지 도착했을 때 조카도 나도 너무 지쳐 버렸다. 우리는 다음을 약속하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다음 해가 되었을 때 조카는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조카는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나의 일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오후 5시에 전화가 왔다.
누나였다.
욱이는 병원에 있다.
나는 바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별일이 아니기를 빌었다.
하지만 조카는 급성백혈병이었다.
C감염에 걸렸는데 감염치료제로 먹은 약의 부작용이었다.
강남 성모병원 병실에 누워 있는 조카를 만났다.
"삼촌 왔어요"
"그래"
"젊은 놈이 이렇게 누워 있으면 어떡해"
"그러니까요" 하면서 녀석이 환하게 웃었다.
욱이는 군대에 제대한 지 일 년이 되지 않았다.
젊고 튼튼한 아이였다.
나는 농담처럼 아이에게 삼촌은 서브 3리를 다시 할 테니 너는 건강을 찾아라......
나는 당시 마라톤을 하고 있었고 3년 동안 마라톤 서브 3리에 도전하고 있었다.
서브 3리는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우리는 웃으면서 약속했다. 삼촌 그게 어려운 거야......
뭐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열심히 해야 가능한 일이지..
너도 건강 잘 챙기고......
아이는 병실에 누워 밖을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병실에서나마
즐거운 대화를 하고 웃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구례로 내려왔다.
일주일이 지났다.
오후 7시쯤...... 누이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우리 욱이 하늘나라로 갔다."
무슨 소리일까?
떠났다고….
욱이는 치료를 받는 도중 폐렴에 걸렸고
면역력이 없었던 아이는 그렇게 쉽게 가버렸다.
전화를 받고 바로 서울로 갔다.
도착했을 때 막 아이를 태운 응급차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믿을 수 없었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던 누이...... 뭐라 위로의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어떡해.. 어떡해......
소리치는 누이를 보면서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목포에서 이틀을 있다가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목포의 장례식장
조카의 고향의 섬이었다.
조카의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이 목포의 장례식장에 찾아왔다.
“어쩌냐 어쩌냐.. 땅을 치는 할머니의 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조카의 친구들은 퉁퉁 부은 얼굴로 조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 조카가 짝사랑했다던 아니가 혹시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저 친구 중에 누굴까?
아마도 왔을 것 같은데.
장례식장을 나왔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슈퍼에 가서 담배를 하나 샀다.
담배를 끊은 지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얀 담배 연기가 하늘로 사라졌다.
휴…
삼촌 담배 피우세요.
어.
저도 하나 주세요.
그래라..
지난번에 서울에서 만나 조카의 사촌누나였다.
다시 만났구나…
네. 삼촌 잘 있으셨죠.
그래..
우리는 장례식장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조카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카는 참 착하고 좋은 녀석이었는데 그래서 하늘이 먼저 데려갔을까?
그러게요. 저하고도 맘이 맞는 아이였는데요.
오래전에 조카와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적이 있어?
혹시 그 이야기 들었니?
네..
욱이가 항상 자랑하더라고요.
삼촌이라 지리산을 걸었다고요.
그래 남은 거리를 함께 걷기로 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했네…
저도 욱이랑 약속한 것이 있는데요.
뭔데.. 다음에 만나면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래.. 들어가자…
장례식장은 눈물의 바다였다.
조카는 진도 수목장에 안치되었다.
바다와 산이 보이는 넓은 곳이었다.
조카가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가을과 겨울 마음에 구멍이 생겼다.
출근길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누나를 닮은 사람, 조카처럼 젊은 아이들만 봐도 가슴이 시큰거렸다.
녀석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정말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보다 몇 백배는 더 건강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23살 생일을 하루 남겨두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녀석과 약속 한 첫 해 남원 마라톤에 참가했다.
하지만 아이가 떠나고 제대로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11월 23일 눈이 조금씩 내리던 매우 추운 날씨였다.
남원 마라톤에 참가 3시간 23분이라는 기록을 얻었다.
2014년 동아에서 3시 13분에 달렸고 그해 중앙에서는 3시간 2분 13초로 아쉽게
서브 3리를 하지 못하고 2014년을 보냈다. 달릴 때마다 조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2014년 중앙 마라톤에 2분 13초로 서브 3리를 하지 못하고 실패해서 그해 진주에서 도전했지만 또 실패했다]
2015년 장흥마라톤과 섬진강 마라톤 대회 신청을 했지만 이것도 싱글이나 20분대...
여전히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미 떠났고 약속을 지킨다고 아이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오다 넘어져 부상을 당했다.
그해 5월 부족한 근력을 키우기 위해 산에서 달리다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얼굴이 엉망이 되었지만 3일을 쉬고 다시 달렸다.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여름 기회가 왔다.
경남마라톤 선수들이 구례에 전지훈련을 온 것이다.
매일 그들과 함께 뛰었다. 2년째 5킬로 19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 지 20일 만에 트랙에서 5000m 18분 33초에 달리게 되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사천대회에서 철저하게 무너졌다. 문제는 물이었다. 여름 대회 참가한 적이 없다 보니 탈수 문제가 심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출발 전에 1.5리터나 되는 물을 마셨버렸고 결국엔 설사로 망쳐 버렸다. 사실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3시간 25분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다.
[ 6월부터 10월까지 매일 새벽 5시에 운동장에 나와 달렸다.]
그리고 얼마 전 익산대회도 35킬로 까지 서브 3리 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실패...
3시간 9분에 들어왔다.
중앙대회가 다가오자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몸은 좋아졌다.
8월에 400킬로 9월에 450킬로를 넘게 달렸고 10킬로도 38-9분이 여유롭게 달려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익산대회 후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드디어 11월 1일 중앙마라톤 대회 날이 되었다.
새벽기차를 탔다.
구례에서 0시 4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다.
오래전 조카의 나이 무렵에 지리산에 가기 위해 탔던 그 철길이다.
곡성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구불구불 따라오던 새벽 섬진강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구례구역에 가득했던 산꾼들...... 나도 그 속에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구례구역을 향했지만 나는 서울로 간다.
새벽 4시 15분 용산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은 5시 30분이 첫 차였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냥 눈만 감고 있었다.
역에서 내리자 준비해 간 밥을 먹었다.
전철을 타고 잠실운동장에 도착했다.
아침 온도 0 도였다. 춥다.
시간은 착착 다가온다. 7시 20분 천천히 조깅을 한다.
15분간 조깅을 하고 출발점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꼭 해보자......
아침 8시 드디어 출발이다.
첫 1킬로미터를 5분에 뛰었다.
아마 서브 3리 주자 중 내가 가장 느린 페이스로 1킬로를 뛰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후 추월이 시작되었다. 함께 뛰는 동료와 함께 페이스를 조금씩 올려나간다.
5킬로 22분이다. 서브 3리에 조금 미치지 못한 속도다. 하지만 10킬로 지점 42분이다.
서브 3리를 가능한 페이스다. 하지만 조금 더 페이스를 올린다. 15킬로 지점을 1시간 2분..
충분하다. 할 수 있다. 물도 먹지 않았다.
25km 반환점을 돌 때 내 상태를 점검했다.
1. 정신상태 좋음, 2. 다리도 좋음, 3. 팔도 좋다. 4. 자세.. 좋다.
모든 것이 정상이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0km 2시간 5분...... 충분한 시간이다.
이제 12km 55분 동안 달리면 된다. 하지만 지금부터 가장 힘든 시간이다.
작년에 30km 도착 시간이 2시간 6분이었다.
하지만 그 후 점점 느려져서 3시간 2분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차린다. 차가운 바람이 휑하니 불어온다.
여전히 앞에 있는 주자들을 추월하고 있다. 앞서 가는 주자들은 바라보면서 추격하듯 달려간다.
아직도 다리 상태는 좋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마지막 언덕이 보인다. 작년에 여기서 굴복했다. 오늘은 가볍게 치고 올라간다.
그리고 내리막 의식적으로 좀 더 힘 있게 달려간다.
마지막 운동장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리고 더 힘을 내서 질주한다.
드디어 트랙이 보인다.
한 발 두 발 드디어 골인...... 2시간 58분 13초......
시계가 멈췄다.
다리가 흔들거린다.
조카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삼촌 해냈어. 우와 삼촌 멋지다...... “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눈물이 난다.
화창한 날이다.
서울에 사는 선배들이 응원을 나왔다.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남부 터미널에서 구례로 행하는 버스를 타려고 보니 차가 매진이다.
강남터미널로 행했다.
남원으로 가서 구례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오후의 강남은 차로 가득했다.
남원행 버스시간이 다가온다.
멀리 강남고속터미널이 보인다.
선배들은 여기서부터 걷는 것이 더 빠르단다.
차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왜 그러지….
병원 앞이었다.
강남 성모병원 아이가 떠난 곳이다.
병원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이가 살았을 때 마지막 만난 곳이었고 약속을 했던 장소였다.
욱아 삼촌 약속 지켰어......
알지..
사랑해....
잊지 않을게….
야. 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어.. 누나
혜지가 결혼식장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누나와 매형의 눈에 눈물이 보였다.
그 눈물의 의미를 나는 알 것 같았다.
나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혜지야 잘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