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빵빵 터지는 웃음이 나의 몇 안 되는 매력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무릇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리액션을 잘해주는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지 않은가. 주위의 사람들은 늘 웃는 얼굴인 나를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잘 웃는 점을 큰 장점으로 여기며 좋아했다.
그러다 어느샌가 잘 웃는 사람이고 싶지 않아 졌다. 어디선가 읽은 댓글에
잘 웃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감춘 슬픔이 많다.
는 한 문장을 읽은 후부터였다.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는 분명 잘 웃는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는 나의 아주 큰 장점이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한 줄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내 안의 슬픔들이 누군가에게 다 들켜버린 것만 같아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더는 잘 웃는 사람이고 싶지 않아 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웃지 않아야 하는 순간에도 참 많이도 웃었다. 누군가 나를 놀리거나 비웃으려는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도 나는 민망함과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웃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쭉 우울감을 품고 있던 나는 내색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웃었고, 사랑받고 싶어 웃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웃었다. 그렇다고 곤란하거나 민망한 상황에서만 웃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작은 즐거움에도 큰 웃음을 짓는 사람이었다. 뻔한 아재개그나 농담에도 웃음이 잘 터져 나오고 재미가 있었다. '그래, 나는 나의 웃음 뒤에 슬픔을 숨기는 게 아니라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인 거야!' 하고 생각하는 순간 떠오른 하나의 기억...
첫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의 기억이었다. 학부모 참여 수업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그날은 신체 놀이를 부모님과 함께하는 수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모든 아이와 부모가 두 명씩 짝을 지어 바닥에 깔린 터널 같은 천을 굴러서 통과하는 놀이를 했다. 한 팀 씩 순서대로 그 터널을 구르는 방식이었다. 아이와 끌어안고 그 터널을 구르면서 우리 두 사람은 엄청 많이 웃었다. 아이는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고 나 역시 재미있어 웃었다. 터널을 다 빠져나왔을 때 행사를 진행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이가 굉장히 크게 웃네요. 어머님도 재미있으셨죠?"
"네! 아이도 좋아하고 재미있네요! 집에서도 이렇게 놀아줄까 봐요!"
"애가 왜 이렇게 크게 웃는지 아세요? 이런 몸으로 하는 놀이를 안 해봐서 그런 거예요! 하하하"
선생님도 웃고 나도 웃었지만 마음이 아팠다. 몸으로 하는 놀이를 많이 안 해준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뼈를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난 웃었다.
10년도 넘은 이 날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애초에 내가 웃음이 많은 이유가.. 작은 재미에도 큰 웃음 지어지는 이유가.. 즐거움을 많이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의 최대 장점이 나의 치부가 되어버리는 순간이라니.. 또 하나의 아픔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의 웃음을 다시 나의 장점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뭘 어찌해야 할까? 먼저 나의 슬픔들을 처리해야 했다. 내 슬픔과 아픔을 처리해야만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의 슬픔을 배설해 내기로 한다.
생각해 보면 못할 것도 없다. 그 수많은 슬픔을 겪으며 살아왔음에도 나는 꽤나 괜찮은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잘 이겨내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해결되지 않은 채 묻혀 있는 내 내면의 '슬픔이 많은 아이'는 털어놓음으로 치유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