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거리의 국내선이든 열두 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이든 여행자의 입장에서 비행기 탑승은 항상 새롭고 설렌다.
탑승교를 지나면서 보는 활주로의 광활함도 그렇고 얇은 카펫이 깔린 탑승교 안으로 내리쬐는 햇살마저 달콤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이 넓지 않으므로 국내에서 항공 이동은 섬으로 이동할 때, 그리고 서울-부산, 서울-포항 등 차량이나 기차로 다소 시간이 걸리는 구간만 운행하는 편이어서 항공으로 이동하는 편이 보편적이지 않은 편인 것 같다.
물론 서울과 부산에서 각자 생활을 하는 장거리 연애나 주말부부에게는 금요일 저녁 비행기와 월요일 새벽 비행기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다.
한 국가 내에서 운항하는 국내선의 개념을 미국으로 가져간다면 아주 광활해지고 노선도 정말 많아진다. 모든 주를 합쳐 생각하면 6가지 시간대를 사용하고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제외하고 미 본토 대륙만 따진다면 4가지 시간대를 사용할 정도로 큰 미국. 동부의 뉴욕에서 서부 로스앤젤레스까지 편도로 6시간이 넘게 비행을 해야 하고 뉴욕에서 하와이 호놀룰루까지는 무려 11시간이 걸린다. 11시간이면 한국에서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시간. 미국인들은 국내선을 탈 때도 뭔가 자부심을 느낄 것 같다.
몇 년 전 회사 휴가를 길게 허락을 받은 적이 있어 누나와 함께 미서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전체 여행 일정은 13박 15일. 은혜로운 퐁당퐁당 연휴와 연차를 몰아 쓸 수 있었던 회사 분위기, 내일처럼 내 빈자리를 백업해주는 팀 파트너 등등 많은 경우의 수가 겹쳐야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누구나 해외여행을 떠나고 싶어 해 예약이 정말 많은 성수기 시즌을 속된 말로 ‘쳐내고’ 나면 여행사 직원들은 비교적 비수기에 휴가를 길게 떠나기도 했다. 비수기 평일에 여행을 떠나면 공항도 덜 복잡하고 비행기 티켓값도 저렴하다.
어떻게 평범한 직장인이 이렇게 길게 휴가를 갈 수 있지? 그런 회사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고 업무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 업무를 백업해주는 파트너가 있었는데 해리포터 소설 속의 ‘깨트릴 수 없는 맹세’처럼 두 명의 약속이 중요했고 팀 내에서도 조율이 중요했다. 내가 파트너의 휴가 빈자리를 백업해주면 그 파트너도 휴가를 즐기고 돌아와서 내 부재 업무를 본인 일처럼 백업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팀원들 모두 누군가 휴가로 자리를 비우면 최대한 본인 일처럼 일을 처리해주기도 했다. 그래야 본인 휴가에도 맘 놓고 쉴 수 있고 또 내년에 그렇게 휴가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여행의 힘을 아는 여행사 직원이기에. 보름간의 내 휴가를 위해서 아득바득 평소보다 전화를 두배 받아가며 2인분의 일을 꾹 참고 해낸다. 내가 이걸 쳐내지 않으면 내 휴가도 망가진다는 생각이면 못할 일은 없었다.
친누나와 여행이라 하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나는 누나와 가는 여행이 무척 편했다. 내가 여행사 직원이니까 비행기 티켓, 숙소, 현지 투어 등등 모두 예약을 도맡아 했고 일정도 모두 내가 짰다. 간혹 여행사 직원 명함을 첨부하면 할인을 해주는 곳은 할인도 받았다. 누나도 동생이 알아서 일정을 짜주고 예약을 도맡아 하니 편하다고 했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맥주 한잔 하면서 다음날 일정에 대해 브리핑해주고 기상시간까지 알려줬다. 누나는 불평 없이 새벽에도 일어나서 준비를 했고 여러 번 여행을 갔어도 싸운 적이 없었다. 딱 하나, 배가 고파지면 까칠해졌기에 식사시간은 꼭 늦지 않게 맞추면 되었던 누구보다 편한 1인 가이드 여행 손님이다. 남매의 여행 스타일도 비슷해서 어느 도시를 가던 맛집이나 인스타 핫플에 얽매이지 않고 그날의 큰 일정에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걷기도 했고 끼니도 배가 고프면 근처에서 옐프나 트립어드바이저를 따라 들어가서 먹으면 다 맛있었다.
미서부 여행의 일정은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서 라스베이거스, 로스앤젤리스 여행을 하고 LA공항에서 빠져나오는 일정이었고 각 도시 이동은 미국 내 저비용항공사를 이용하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라스베이거스는 젯블루 항공을 이용했고 라스베이거스-로스앤젤리스는 버진 아메리카항공을 이용했다. 아. 그러고 보니 버진 아메리카항공은 인수합병으로 이제는 없어진 항공사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라스베이거스를 이동할 땐 젯블루를 이용했는데 여행개시 수개월 전부터 미리 예약을 했었기에 1인당 $70 정도로 아주 저렴하게 예약했었고 이 역시도 저렴한 티켓 중에서는 수하물까지 포함된 요금이어서 다른 추가 비용 없이 도시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국내선 청사로 도착해 체크인이나 수하물 보내기 등등은 모두 셀프로 진행해야겠다. 몇 년 전이었지만 그때도 모든 걸 온라인으로 체크인이 가능해서 미리 다녀온 블로거들의 참고 글을 공부하고 공부해서 좌석 지정도 하고 사전 준비를 하고서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 내에서 도시 이동이기 때문에 별다른 절차는 없었고 간단한 보안검색만 통과하면 되었고 악명 높다는 소문이 많았던 글들과는 달리 정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남매의 동공이 지진하게 만든 건 다른 일이었다.
젯블루 항공기 기내는 다른 비행기들과 큰 차이점은 없었는데 고개를 들면 확인할 수 있는 안전벨트 표시등이 뭔가 달랐다. 보통은 금연표시와 안전벨트 표시 두 가지가 점등되어 있는데, 젯블루 비행기에는 하나의 아이콘이 더 있었다. 바로 와이파이 심벌이었다. 기내 잡지를 펼쳐서 보니 비행기 운항 중에 와이파이가 이용 가능하다는 신형 기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료!
젯블루 항공기는 활주로를 빠져나와 이륙을 했고 이내 와이파이가 사용 가능하다는 안내와 함께 전파 심벌에 점등이 되었다. 휴대폰을 연결해서 ㅇ톡을 연결했더니 정말 된다. 우리 남매는 미서부 상공에서 부모님과 영상통화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동공 지진은 기내 서비스였는데, 저비용항공이어서 모든 서비스가 유료일 것이라는 생각에 음료와 스낵을 가득 담고 다가오는 객실 승무원의 눈빛을 둘 다 피하기 바빴다. 아. 우리 자리에 기내 카트가 멈췄고 승무원은 음료나 스낵이 필요하냐며 물어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무렇지 않게 감자칩을 먹기도 하고 머핀을 먹기도 하고 쿠키를 먹고 있기도 했다. ‘아, 기내에서 사 먹어 주는 게 국룰인가?’ 쭈뼛쭈뼛하며 우리는 구아바 주스 두 잔을 시켰다. 예상치 못한 지출일세. 알콜이 들어가면 더 좋지만 왠지 더 비싸고 사악한 가격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승무원은 밝게 웃으며 구아바주스를 건네주었고 감자칩이나 머핀, 쿠키 중에도 선택을 하라고 했다. 우리는 애써 괜찮다며 받지 않았고 두 시간 남짓 짧은 운항 시간 동안 구아바 주스만 있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마를 달라고 할지 무서워서 시키지 않은 것도 분명 있었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모든 기내 서비스는 무료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술도 무제한으로 시켜먹을 수 있었다. 이런 혜자스러운 저비용항공사가 있다니!! 맥주나 와인이 무제한일 뿐만 아니라 마티니나 잭콕 같은 간단한 칵테일 종류도 무난하게 만들어서 제공했었으니 기내 승무원들은 비행 내내 정말 바빠 보였다.
미국 국내에서 국내선을 운항하는 항공사는 FSC (Full Serviced Carrier) 외에도 LCC(Low Cost Carrier)도 많았기에 각자의 특색을 내세워 승객에게 어필을 하는데 젯블루 항공은 ‘추가 비용 없이 FSC처럼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을 앞세운 듯했다.
두 번째 이용했던 라스베이거스 - LA 구간 버진 아메리카항공은 한때 신선하고 충격적인 기내 안전 비디오로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같은 구간에 젯블루도 운항을 하긴 했지만 여러 항공사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선택을 했었다. 티켓값은 젯블루보다 더 저렴했다. 대신 위탁수하물, 공항 체크인, 탑승 순서 등등에 모든 추가금액이 붙었고 심지어는 짐이 빨리 나오게 하려면 추가금을 내야 하는 옵션도 있었다. 그리고 물을 포함하여 기내에서 제공되는 모든 서비스는 유료였다.
우리 남매는 기다리는 시간조차 줄이고 싶었기에 우선 탑승과 수하물이 빨리 나오게 하는 옵션을 구매했다. 가격은 합당했고 만족했다. 긴 보안 체크 줄을 단 몇 달러에 새치기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보딩이 끝난 후였는데 모든 좌석에 VOD 서비스가 장착된 기재였는데 몇 자리가 고장이 나서 제대로 구동이 되지 않았던 것.
이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기장이 기내방송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보통은 껐다가 켜면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기내의 VOD 서비스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하나의 단말기가 아니라 모든 좌석의 VOD 시스템이 연결된 본체가 기내 어디엔가 있고 이 본체에서 모든 시스템이 구동되는데 재시동을 하려면 이 본체를 재부팅을 해야 하는 상황. 게다가 재부팅에는 한 시간 이상 시간이 소요되고 안전을 위해서 모든 승객이 하기했다가 다시 탑승을 해야 했다.
비행기는 만석이었고 모든 승객이 VOD를 즐길 권리가 있기에 항공사는 당연히 재정비를 하고 출발해야겠지만 항공기 운항에 차질이 생기고 시간을 맞춰 이동하는 여행자들에게 피해가 갈게 뻔한 상황이었다.
기내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남매 역시도 LA 공항에서 픽업 서비스를 요청해두었기에 비행기가 지연이 되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픽업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취소하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야 하나 상의하고 있을 때 다시 기장의 기내방송이 시작되었다.
“현재 기내 VOD 시스템을 다시 살펴보았는데 모든 좌석에서 원활한 재생을 위해서는 재부팅이 불가피합니다. 재부팅에는 1시간 이상 소요될 예정이며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모든 승객은 수하물을 가지고 하기하셔야 하며, 재정비 후에 재 탑승할 예정입니다. 다시 LA로 출발 예정시간은 지금으로부터 1시간 20분 이후입니다.”
여기저기서 한숨과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내용이 끝이 아닌지 방송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다음 기장의 한마디에 모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승객분들께서 동의를 해주신다면 VOD 서비스를 재정비하지 않고 출발할 수 있습니다. 조금의 불편을 양해해 주시면 정시에 LA에 도착이 가능합니다. 그 대신 운항중 모든 좌석에 음료와 주류, 스낵류를 무제한으로 제공할 예정입니다. 현재 지상에 요청하여 기내에 충분한 음료와 주류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재치 있는 기장의 방송이 들리자 어디에선가부터 휘파람과 박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승객이 동의를 한 듯 박수갈채를 쳤고 우리 남매도 공짜 술 소식에 기분이 좋아 물개 박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그럼 출입문 닫고 출발하겠습니다”
하나의 뮤지컬을 보는 느낌이었다. 기내 비디오 고장 정도는 공짜 술에 합의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모두들 유쾌하게 한바탕 웃어젖히고 비행기는 매끄럽게 이륙했다.
안전고도에 들어서자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졌고 오늘 하루만 열리는 기내 무료 펍이 개장되었다. 앞쪽 갤리와 뒤쪽 갤리에서 음료와 주류를 가득 실은 기내 카트를 밀고 나와 승무원들은 승객들이 마시고 싶은 음료를 무료로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