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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Oct 21. 2023

#10 '우울증 치료 일지' 9회차.

9회차. J형 인간의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지난 2주 간 아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전히 낮잠을 자야 했고,

폭식이 계속되었으며,

밤에 잠을 잘 못 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매일을 걱정과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병에 꽂힌 것이다.


갑자기 목에 뭐가 걸리는 느낌이 나자 갑상선암이 의심되었고,

각종 인터넷과 유튜브를 찾아다니며 갑상선암의 증상에 대해 수집했다.

그러나 등을 구부리고 펼 때마다 통증을 느끼게 되는데

언젠가 유튜브에서 봤던 췌장암의 증상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췌장암의 증상에 대해 수집하기를 반복.

시간이 지나 목에서 느껴지던 이물감은 가라앉았고,

등의 통증은 잠을 잘 못 자서 베긴 정도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 

호들갑스럽던 상황은 종료되었다.

바로 병원을 찾아서 검사를 받거나 하는 행동을 하진 않으나

정말 병에 걸린 건 아닐까, 몸이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온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내가 이러는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엄마의 병 때문이다.

3년 차 암환자인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내 인생 최대의 아픔이자 슬픔, 고난과 역경이었던 청천벽력 같은

엄마의 암 소식은 나를 단 번에 무너지게 만들어버렸다.

아픈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던 엄마는 건강검진을 받고 나서 바로 암환자가 되었다. 

평범하던 하루에, 건강하던 엄마가 순식간에 환자가 되다니

너무나 공포스럽고 충격적이었다.

10시간이 넘는 수술과 2주 간의 입원, 항암 치료, 주사, 약, 방사선 치료 등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하는데 2년의 시간이 꼬박 걸린 듯하다.

중간중간 보험 처리가 되지 않는 약물들에 어마어마한 치료비가 청구되었고,

빠듯한 살림에서도 엄마를 살리기 위한 가족들의 노력들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외형 변화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쓰러웠는데

머리가 다 빠지고 살 마저 빠져 버리는 걸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식이라 얼마나 미안하고 슬펐는지 모른다.


몇 해 전 엄마의 20년 지기 친구분은 말기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얼마 전 또 다른 20년 지기 친구분이 암 선고를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 다들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병에 걸리는구나.

또 한 번 나의 불안함이 극도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아침약을 먹으면서 1-2주 만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빠른 회복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이러한 강박 증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는 한 달 동안 '70권'의 책을 읽었다.

제일 처음 읽었던 두 권의 책을 제외하고는 책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정신으로 책을 읽었는지 빵을 와구와구 삼켜버리는

푸드 파이트 같은 독서를 했다. 

하루에 한 권을 넘어 그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이 허탈하다.

고생했다. 정말 고생했다...


오늘 면담에서는 강박을 줄여보고자 메모장을 보면서 줄줄줄 말하는

방식을 접고, 더듬더듬 생각하면서 말하는 방식으로 바꿔보려 노력했다.


-> 일단은 지금 강박 증상이 거의 조절이 안되고 있어서 오늘 약을 좀 늘릴게요.

-> 그래도 오늘은 휴대폰 메모장 안 보면서 얘기하네요.

- 최대한 안 보면서 얘기해 보려고요.

-> 곰곰이 천천히 생각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워요.

-> 또 본인이 그러지 않으려고 되게 애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 다행이네요. 다다다다 말하지 않고도 진료가 잘 된다고 하니까요.


내 인생에 아주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별 일 아닌 일이지만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대학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는다.

그러다 수치가 좋지 않으면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또 경과를 확인한다.

그날은 병원에 경과를 확인하러 갔다 오는 길이었다.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병원을 오가는데 다행히 결과가 괜찮아져서

안도하며 기분 좋게 돌아오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집에 들어가려고 아웃렛에 들어가는데 

갑자기 엄마의 귀걸이가 눈에 띈 것이다.

엄마는 몇 년 전 귀를 처음 뚫으셨고, 

그 이후로는 내가 사드린 기본 귀걸이만 지금껏 끼고 다니신다.

내가 왜 그걸 진작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갑자기 너무 무심한 딸이 된 것 같아 오늘 당장 귀걸이를 사자고 말했다.

금 주얼리를 파는 집으로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엄마 마음에 드는 귀걸이를 골라 꺼내보기도 했다.

너무 예쁘고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단 번에 결제를 하겠다고 했더니

엄마가 극구 말리시며 괜찮단다.

가격이 23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23만 원은 나에게 엄청나게 큰돈이다.

하지만 내가 모아둔 돈도 있고, 엄마 귀걸이 하나 사 줄 만한 정도는 되는데

괜찮다고 하니까 더 사드리고 싶어서 욕심을 부려 덥석 결제를 해버렸다.

J형 인간 중에 J형 인간, 극 J형 인간의 삶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예정에 없던 일에 돈을 쓴 역사가 없었고,

항상 계획해 둔 대로만 소비하며 지출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이번 귀걸이 사건은 큰 의미를 가진다.

충동적이라고 봐야 할까? 긍정적인 변화로 봐야 할까?


-> 그건 긍정적인 거죠.

-> 강박의 틀에서 하나 바뀐 거잖아요.

-> 돈을 괜히 썼다고 후회하거나 걱정하고 불안해하면 좋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 엄마한테 정말 잘 사 드린 것 같다, 기쁘다 이런 건 좋은 감정이죠.

-> 다른 사람들도 다 계획대로는 안 살아져요.

-> 오늘 갑자기 사주고 싶어서 뭔가를 살 수 있는 거 그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거예요.

-> 동글씨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지 않아서 약을 먹고

-> 치료를 하고 있는 거거든요.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이 했다는 건 좋은 거예요.

-> 되게 좋은 경험이었네요.


좋은 경험이었다.

긍정적인 변화였다.

사실 내가 충동적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구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감정과 행동이었구나.

집에 돌아와서도 참 기분 좋은 느낌이 계속 이어져 신기하긴 했다.

계획하지 않으니 또 다른 느낌을, 설렘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니

처음 맞는 느낌이 불안하지 않아서, 나쁘지 않아서 신기했다.

가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깜짝 선물을 하고,

면담에도 메모장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

경로를 이탈한다 해도 또 다른 경로를 찾으면 되는 일.

틀을 벗어 나니 생각보다 큰 행복이 있었음을 알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9회차. J형 인간의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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