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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Oct 21. 2023

#9 '우울증 치료 일지' 8회차.

8회차. 완벽하지 못한 완벽주의자

스스로를 완벽주의자라고 부르기는 민망하다.

나는 절대 완벽한 사람은 아니니까.

완벽함을 추구하려 노력하는 사람,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는 사람.

안 될 수도 있는데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항상 예민한 사람.

그래서 슬픈 사람이다.

나는 이상형도 완벽한 사람이다. 어쩌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를 완벽한 사람.

소설 속 주인공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완벽한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현실에 대입해 보면 절대 채워지지 않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모습이나 다를 바 없다.

완벽하지 못한 완벽주의자의 삶은 늘 피곤하고, 힘듦의 연속일 뿐이고,

나의 이 완벽주의자 프로젝트는 결국 완벽하게 실패할 것이다.


완벽주의자에게는 병원에 가는 것도 일이다.

매번 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1차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병원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잘 활용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번졌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들,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감정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 상담을 할 때 사건을 말하는 게 좋은가요? 감정을 말하는 게 좋은가요?

-> 그냥 본인이 얘기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뭘까? 일단 메모해 간 순서대로 진행했다.

그런데 사건과 감정을 따로 놓고 말할 수가 있나?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다.

며칠 전부터 이상한 불안이 감돌기 시작한 사건과 감정을 적당히 섞어 설명했다.

이상한 상상이 계속 됐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누가 나를 미는 게 아닌가? 그렇게 떨어져 죽었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이라 평생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갈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갑자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계속된 거지?

또 산에 올라갔다가 절벽에서 누가 나를 미는 게 아닌가? 그렇게 떨어져 또 죽었다.

평소에 산을 가지도 않는 사람인데 왜 그런 상상을 계속했을까?

의자에 앉아 있으면 바퀴에 발을 찧는 상상을 하고,

내일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릴 것 같아 하루종일 불안에 떨기도 했다.

이러한 상상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수면 패턴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불안함을 떨쳐내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엄마랑 운동을 나간다던지, 바람을 쐬러 나간다던지, 마트를 가는 것이다.

물론 이런 활동이 무척이나 힘들고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요즘에는 폭식까지 늘어 살이 많이 찐 상태라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 어쩌고 저쩌고 주절주절 ~


-> 동글씨는 여전히 생각이 많네요.

-> 그런데 진료받을 때 계속 이렇게 메모를 해서 오네요?

-> 메모를 안 하면 말을 못 하겠어요?

- 내가 이 시간을 잘 활용했다. 상담을 잘 마쳤다. 할 얘기를 다했다. 할 수 있으니까요.

- 평소에도 제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이 없었어요. 평생을 그랬어요.

- 근데 이건 진료니까 선생님께 잘 전달되라고... 놓치고 말 못 하면 반영이 안 될까 봐요.

- 반영이 잘 돼서 빨리 잘 회복했으면 좋겠거든요.

-> 2주 동안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하는 건 불가능해요.

-> 그리고 꼭 뭔가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을 거예요. 본인의 어떤 기준에 따라.

-> 제 기준은 안 중요해요. 보통 어떤 얘기를 먼저 서두에 꺼내는지 그것도 중요한데

-> 본인은 메모를 해서 순서대로 주르륵 읽고 있기 때문에 진료가 안되고

-> 이건 결국은 강박인 거죠...

- 아... 저도 제가 이걸 안 적고 왔을 때면 이제 그만 오라고 하지 않으실까? 생각하긴 했어요.

-> 좋아진다는 사인이겠죠.


상담도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음이 또 드러나버렸다.

애초에 면담에 있어 완벽하게 잘했다, 못했다를 구분 지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저 수치로 완벽을 담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진료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좋은 면담이라 느꼈고,

남들보다 조금 더 긴 시간 진료받기를 원했다.

누가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쓸 때면 이상한 억울함이 생겨났다.

몇 가지의 질문을 했는지,

메모장에 써간 이야기들을 다 했는지가 중요했다.

또 목적을 잃은 것.

시간과 질문수가 진료의 목적에 맞는 거냐고 묻는다면

또 답을 할 수 없어지겠지.

반복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 뭔가 확고하고 기준점이 명확해야 되고 그런 틀이 없으면 굉장히 불안을 많이 느끼고

->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 많이 답답해하고 그런 강박이나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 다 섞여서 폭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요.


폭식이 심해졌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분노를 느끼면서 먹는 걸로 푼다.

그런다고 풀리지도 않지만 그냥 먹는다.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하루에 세끼를 챙겨 먹고 중간에 간식을 먹는 그런 과식 수준이 아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채워 넣으려는 식이장애의 한 부분인 폭식.

이거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폭식이 심해졌다.

불안한 마음이 엉뚱한 곳으로 눈을 돌린 듯하다.

폭식증을 좀 완화할 수 있는 약을 추가하기로 했다.

정말 싫은 약 추가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 약은 생각을 바꾸거나 감정까지 바꿔주진 않아요.

-> 바람을 불어주는 거죠. 가만히 있는 나를 걸어가게 할 수는 없어요.

-> 결국 걸어가려면 내가 걸어야 해요. 그러니까 내 의지가 중요하죠.

-> 내가 걸어야 하는데 뒤에서 바람을 좀 불어주니까 편하게, 힘이 조금 덜 들 수 있잖아요.

-> 그런데 내가 끝까지 안 걸으려고 버티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꿈쩍도 안 해요.

->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도움!


아직 걸어갈 길이 멀다.

차근차근 들여다볼수록 나에게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불안하다.

그로 인한 폭식, 강박, 완벽주의 성향이 나를 더 옭아매고 있다.

하지만 한 걸음씩 걸어 나가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

내가 걸어갈 의지만 다진다면 뒤에서 불어줄 바람이 있다.

바람이 불어준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

나도 한 번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보자. 그렇게 살아보자.

어설픈 완벽주의자가 되면 뭐 어때?


8회차. 완벽하지 못한 완벽주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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