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차.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세요
2주 동안 그냥 그냥 하게 지냈다.
계속 무기력해서 힘이 없었고,
밥을 먹으면 바로 잠이 쏟아져서 잠을 자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2주 내내 그랬던 건 아니다.
분명 기분이 괜찮았던 날도 있었는데 나는 왜 무기력을 떨쳐내지 못할까.
- 기분이 괜찮았던 날이 있었어요. 이틀정도. 그래서 약을 안 먹고 잤어요.
- 즐겁게 보낸 날도 약을 먹어야 할까요?
-> 이건 그때그때 기분을 조절해 주는 약이 아니에요.
-> 이게 누적되어서 작용하는 거기 때문에 오늘 괜찮으니까 약을 안 먹고,
오늘 힘드니까 약을 먹어야지. 그러는 게 아니에요.
-> 전체를 봐야 해요. 하루하루 기분을 보는 게 아니라 최근 한 달을.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숲을 봐야 되는 거거든요.
나는 약이 즉각적인 반응을 해주리라 생각했다.
어쩐지 먹고 나면 잠이 잘 오는 기분이었고,
어쩐지 먹고 난 후 더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플라세보 효과를 누리고 있었던 걸까?
- 저는 이게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고 생각했어요.
-> 심리적인 건 있어요. 왜냐하면 약을 먹었기 때문에 내가 마음을 좀 컨트롤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건 있죠.
약도 먹었으니까 힘 좀 내자. 약을 먹었으니까 좀 좋아지겠지.
사람이 기대하는 심리가 작용하는 거죠. 그게 이상한 건 아니에요.
아직까지 약을 먹는 행위 자체는 나에게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일단 내가 알약을 잘 못 먹는데...
그게 굉장히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도 정말 '하기 싫은 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환자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도 싫다.
2주간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독서다.
독서가 무슨 문제가 되나 싶지만 독서도 문제로 만든 그런 나는 참 별나다.
상담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다니는 친구가 있다.
거기서 추천받은 책을 나에게 대신 읽어봐 달라며 소개해 준 일이 발단이 되었다.
본인은 도저히 책을 읽을 집중력이 부족하니 독서를 좋아하는 나보고
대신 읽어봐 달라는 거다. 심심하던 차에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집과 가까운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길래 오랜만에 책을 빌렸다.
그런데 한눈에 보기에도 사람들의 손 때가 가득 담긴 조금 더러운 상태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거다.
책을 읽으려는데 손을 대기가 싫었고,
급기야 책을 읽는 시간보다 손을 씻는 시간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강박적으로 손을 계속 씻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도 손을 자주 씻어서 다른 사람들이 '손을 너무 자주 씻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나는 '손'만 특히 자주 씻는 버릇이 있다.
이렇게는 도저히 책에 집중할 수 없어 '밀리의 서재'를 구독했다.
과연 여기서 나는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여기도 나의 강박을 공격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혹여나 오해 하진 마시길.
밀리의 서재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오로지 나의 강박이 오작동했을 뿐임을 다시 한번 알린다.
그건 그저 재밌는 방식이었다.
다 읽은 책은 그날 날짜에 저장되어 언제 어떤 책을 읽었는지
캘린더 안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이었을 뿐이다.
나는 이 기능을 본 순간 한 달 동안 매일 책을 완독 해서
빈 캘린더를 가득 채우고 싶다는 강박이
머릿속에 가득 차버리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니 나에겐 하루 두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독서에 투자할 시간이 충분했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성공하면 정말 뿌듯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구독을 시작한 지 4일이 지났고, 4일 동안 나는 그것을 기어이 해내고야 만다.
- 한 달 동안 이럴 것 같아요.
- 그나마 쉬운 방법을 찾아낸 게 완독시간이 짧은 순으로 해서 짧은 것부터 볼 생각이에요.
- 그럼 하루에 한 권은 무조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근데 강박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책을 읽는 목적을 생각해 봐요. 책 읽는 목적. 책을 왜 읽죠?
- 재밌기도 하고, 다시 되새겨 볼 만한 문장들을 만나고 싶기도 하고, 배우고 싶기도 해서요.
-> 그러면 하루에 한 권, 한 달에 30권이라는 게 의미가 있나요?
- 그러니까요... 저는 왜 이상한 곳에 집착하는 걸까요.
-> 그 틀을 본인이 바꿔야 해요. 그건 사소한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죠.
-> 의미가 없어요. 아까 얘기했죠.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볼 수 있어야 해요.
-> 멀리 볼 수 있어야 하거든요.
->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내가 모르는 지식을 배우고, 내 마음의 양식을 쌓고,
-> 내가 생각하는 힘을 좀 키우고, 마음의 여유를 좀 가지고,
-> 이 삶을 대할 때 조금 더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서 그러려고 책을 읽고,
-> 아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하는 건데 이건 무슨...
-> 테트리스 게임 하듯이 막 책을 읽는 느낌.
-> 이렇게 읽어서 내 마음에 양식이 돼요?
-> 본래의 목적에 벗어나는 거예요...
-> 내가 밥을 맛있게 먹는 이유는 뭐예요?
-> 맛있게 먹어서 내 몸에 건강한 영양분을 주고 그때그때 쓸 에너지를 쓰려고 하는 건데
-> 막 빵을 입에 우걱우걱 쑤셔 넣는 거 그건 나를 위해서 먹는 게 아니잖아요.
-> 폭식하는 거 그건 다시 생각해봐야 해요.
-> 진짜 이걸 하는 목적. 왜 하는지.
-> 나한테 좋아지기 위해서 하는 건데 좋아지게 하려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 책 읽기는 나한테 큰 선물인데 그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기준을 다시 세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약을 먹으면 강박 증상도 좀 좋아지니까 일단 규칙적으로 약을 잘 챙겨 드세요.
그렇다. 4일 동안 무슨 정신으로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캘린더에 올라간 책 목록을 보는 게 좋았다.
왜? 왜 책을 읽는 거지? 의미? 목적?이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답할 수 없었다.
빵을 우걱우걱 쑤셔 넣는다는 표현이 가슴에 퍽하고 들어왔다.
정말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내 독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우일까.
숲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나무 하나만을 붙잡고 있는 모양이라니.
언제쯤 멀리 보고, 넓게 보고, 크게 볼 수 있을지 막막해진다.
심각한 강박 증세를 보이며 오늘의 진료가 마무리되었다.
7회차.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