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트쿡 트래킹
마운트쿡 트래킹 출발지점에는 대형 카페가 있다. 이 카페의 파이는 꼭 먹어봐야 할 간식이라는 말에 다소 생소한 크리미치킨파이와 샐러드를 먹었다. 바삭한 빵 속에 크림치즈를 버무린 닭고기를 넣었는데 느끼한 편이라 내 식성에는 맞지 않았다.
드디어 트래킹 출발. 길이 단순해서 잃을 염려가 없으니 개별적으로 갔다 오라는 고마운 말에 서둘러 출발했다. 트래킹 코스는 4개인데 우리가 간 코스는 Kea point track으로 왕복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가벼운 코스다. 날씨가 추울 거라 하여 옷을 여러 겹 껴입고 갔으나 날씨가 맑고 햇살이 좋아서 얼마간 걷자 땀이 배어 난다. 눈이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온화하다.
산책로는 1m 정도의 폭으로 혼자 걷기 좋다. 초입에는 나무판을 깔았고 갈수록 점차 흙길이 많아진다. 걸음을 서둘러 일행보다 한참을 앞서서 걸은 데다 다른 관광객도 별로 없어 그들이 지나가고 나면 온 하늘과 들판이 내 차지다. 가늘고 길게 난 오솔길을 따라 호젓이 걷다 보면 관목숲이 나타나는데 길 양쪽에서 무성하게 자라 하늘을 가리니 나무덩굴로 뒤덮인 동굴을 지나가는 기분이다. 햇볕 아래서 땀이 송글송글 나다가도 관목숲에 들어가면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산꼭대기 만년설의 냉기가 숲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있나 보다. 온화한 바람 속에 서늘한 기운이 두어가닥 섞여 있다.
길 왼쪽에는 험준한 산봉우리가 열을 지어 서 있는데 거대한 병풍을 옆에 세운 듯 고개를 꺾고 쳐다보게 된다. 흙과 암석으로만 뒤덮인 황량한 화산지형이며 가파른 경사면으로 흘러내린 화산석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산 아래쪽으로 드문드문 나무가 있고 좀 더 아래 구릉과 산책로 바로 옆은 탱자나무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관목 숲과 양치식물들이 무성한 곳도 있다.
오른쪽으로는 탁 트인 넓은 들판인데 노랗게 물든 식물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마치 키 작은 갈대숲을 보는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스-스-스 소리를 내는 것도 비슷하다. 들판 끝자락 멀리 강줄기가 보이고 강을 따라 내려가는 산줄기가 이어진다. 그 역시 화산지형인 듯 나무 한그루 없이 황량하다. 그 삭막하고 거대한 풍경은 드넓은 푸른 하늘과 이색적인 형태의 구름들과 조화를 이루어 웅장하면서도 생경한 느낌을 준다.
자연이 그려낸 광활한 풍경 속에서 나는 작은 점이 되어 걷고 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의 흐름과 자연이 내는 익숙한 소리와 하늘을 향해 걸림 없이 열려있는 공간. 오로지 자연과 나만 연결된 이 순간에는 이국의 공간이 낯설지 않고 내 머릿속 어딘가에 애초부터 자리 잡고 있던 한순간처럼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어릴 적 우리 집 마루에 쏟아지던 주홍빛 가을 햇빛을 이곳에서 반갑게 만난다.
들판이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고 바위덩이들과 산봉우리들이 더 많이 보이면서 마운트쿡 정상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만년설이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산 아래에는 호수가 있다. 하류의 푸카키 호수처럼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으나 물이 뿌옇고 탁하다. 빙하에 섞인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트래킹 코스 도착지에는 소박한 전망대와 벤치 두어 개가 있다. 전망대에서 좀 떨어진 돌 위에 앉아 마운트쿡 정상의 만년설을 바라다보며 보온병을 꺼내 차를 마신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자니 일행들이 속속 도착한다. 그들의 탄성과 수다, 웃음소리를 듣는다. 자연 속 한 조각이었던 내가 다시 사람들의 세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인간의 두뇌회로는 얼마나 연약하고 섬세한가. 이럴 때면 나는 내가 흔들리는 꽃이 아닌 뿌리 깊은 나무 같았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깊은 그늘을 드리우던 헤글리 공원의 아름드리나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