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언제나 멀리 있다
6학년 때 꼴깍꼴깍 침 삼켜가며 읽었던 책이 김병총 장편소설이다. 소설이어서 읽은 게 아니라 책이어서 읽었다. 스물, 열일곱, 열넷 그리고 열 살 많은 K 오빠 언니가 가져다 둔 책이었지 싶다.
아랫채는 오래도록 잠실로 사용했다. 10년간 해오던 봄가을 누에치기를 그만두면서 k장남은 아랫채에 서가를 넣었다. 긴 벽에 기대 책꽂이를 짜 넣자 족보를 제외한 온갖 책들이 한 곳에 모였다. 등목을 해도 바닥에 맨살이 쩍쩍 들어붙는 여름날... 그래도 배 깔고 책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동화책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 봤다. 일곱 살 많은 둘째 언니가 어린이날 준 안데르센 동화집... 그러나 흥미롭지 않았다. 이미 <선데이서울>에 익숙해진 감각이니 동화가 눈에 들어오겠나.
통시에 쪼그려 앉아 보던 <선데이 서울>은 시시했고, 책방에 있는 <샘터>는 재미없었다. 그때... 책꽂이 사이 한수산 <바다로 간 목마>. 김병총 <내일은 비> 두 권이 표시 나지 않게 누워있었다. 어라 뭐람... 세우지 않고 눕혀 두었네... 재밌어서 숨겨 두었나... 한수산은 얇았고 김병총은 두꺼웠다.
호기심이란 원초적 감각... <내일은 비>를 몰래 빼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제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펜싱을 할 줄 아는 부잣집 딸과 한 남자의 쫄깃 솔깃 아찔한 키스 장면이... 뜨거운 숨소리가 들리듯 적혀있었다. 이른바 디테일의 끝판으로... 아무것도 몰라도 상상력만큼은 할아버지와 그의 동생들 윤독을 들으며 키웠왔겠다... 눈앞의 일인 듯 펼쳐진 문장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혹시라도 내가 열어 본 것을 들킬까 해서 날마다 그 자리에 그 형태로 두면서 몇 번이고 빼봤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면서 눈은 책 속에... 귀는 마당으로... 긴장의 극치 속에 <바다로 간 목마>를 또 봤다... 전나무 숲... 성지곡 공원... 민우... 주희... 이름도 예쁜 두 사람의 순정... 낯선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나도 그때 가졌다. 두 번은 그냥 읽고 그다음부터는 주인공의 아찔한 씬만 골라서 읽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중학교 1학년 정다운 스님의 신앙에세이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지 않았다면 ᆢ내 호기심은 상상과 결합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은 짐작건대 K장남이 가져왔을 것이었다. 그가 처했던 현실이... 그가 지고 있었던 무게를... 벗어내고 싶은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용케 옷을 벗지 못한 것은 k의 숙명이었을지도...
이제 나도 곧 예순... 감각에 눈을 틔워준 소설 속 문장들 위에 세 초 하듯 새 문장들이 들어왔지만... 내일은 비가 왔으면 좋겠다. 붉은 노을 같은 비가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