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해 마른침만 삼키고 왔어요. 사람의 마음이 참 희한하대요. 아니라 해도 모든 안테나가 그 사람에게 촉수를 세워요. 주책없이 웃음이 나오고요. 그러다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지... 대중가요 가사가 어쩜 그렇게 내 맘 하고 딱 들어맞는지... 이렇게 좋은데 한편 외로워요..."
그리움이란 하루 종일 어떤 틈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일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틈의 세계, 그러니 그리움은 외로움이 동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그리움으로 물드는 빛깔은 곧 외로움의 빛깔입니다. 하여 지독한 외로움은 지독한 그리움입니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는 길 위에서 마주하는 첫 감정도 외로움입니다. 일상을 벗어나 만났던 아찔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들기 때문이지요. 한시도 웃음을 떠나지 않았던 시간들로부터 비껴서 마치 다른 세계로 뿌리 채 뽑혀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마치 찐 가오리 결 갈라지듯 다양한 층위로 나눠지는 감정선으로 인해 징검다리 건너듯 걷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일상의 바다에서 한동안은 섬이 되어 이리저리 부유하게 됩니다. 중첩되는 감정선이 분리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여행이라는 낯선 일상은, 익숙한 일상과 평행하여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갑니다. 어쩌면 여행이란 단조로운 일상에서 만나는 간이역 같은 반가움 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람이 모래언덕에 그려내는 주름 같은 것, 모래 언덕 너머에 있을 낮은 나무 그늘 같은 것, 그래서 여행은 별빛을 바라보는 것처럼 꿈을 꾸게 합니다. 게다가 노년에 다시 만난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몽돌을 훑어내리는 바닷물처럼 차르르 순간순간을 훑어내립니다.
느닷없이 떠나는 여행의 짜릿함처럼 설렘도 느닷없이 다가옵니다. 삶이 어디 계획대로 되던가요. 때로는 뒤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간이역에 선 앞차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역방향의 기차에 앉아 아득히 멀어져 가는 풍경의 뒷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즉흥이 주는 자유는 영하 5도 얼음 같은 잔에 시퍼렇게 날 선 바람을 안주로 마시는 딱 한 잔의 맥주, 첫맛처럼 아찔합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식지 않는 가슴속 온기가 됩니다. 생각할수록 뜨거움이 차올라 어디에서든 나를 지켜주는 기억 말입니다.
그날 항구의 저녁노을이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선 여인 B를 닮았습니다. 노을은 여러 색의 교배 끝에 나온 장미처럼 고혹적이었습니다. 빛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색이 더욱 선명함으로 다가왔습니다. 노을의 경계가 밀어내는 선명함 앞에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감탄사밖에... 그 순간 감탄사는 어쩌면 가장 완벽한 언어인지도 모릅니다.
"맛난 음식 앞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름다운 풍경을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좋아요. 살아내느라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이토록 사람을 들뜨게 하는 줄 예전에 몰랐어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생겼어요. 갑자를 넘어선 나이라 갑자기 아프거나 하게 되면..."
여인 B의 말이 산란하는 자녁빛으로 흔들렸습니다. 노을이 이행되는 바다를 보는 얼굴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마치 아카시아 껌 광고에 나오는 긴 머리소녀 같았습니다. 그녀의 이십 대를 상상하며 나는 말했습니다.
" 오지 않는 시간을 미리 걱정하기엔 순간순간이 아깝잖아요. 눈앞에 보이는 모든 날 모든 순간을 사랑하면 좋겠어요. 나이 듦이란 프레임이 억압은 아니잖아요. 생각만으로 웃음을 주는 시간...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도 아끼지 말고요. 사랑하는 마음도 아끼지 말고요. 사랑할 시간도 아끼지 마셔요. 사랑은 저축하는 게 아니고 마구마구 퍼내어야 고이는 샘물과 같대요. 그러니 많이 걷고, 자주 손잡고 사랑한다고 말하셔요. 사랑은 유치하게 표현할 때 깊어진다고 하던걸요"
바다 위를 천천히 부유하는 요트, 촘촘하게 기대앉아 술에 익어가는 사람들, 찰방 이는 물이랑처럼 여행자들의 언어로 밤바다는 출렁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 순간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습니다. 육체가 늙지 어디 사랑이 늙는가요. 끊임없이 찰방거리는 두레박처럼.. 퍼낼수록 고이는 샘물처럼... 사랑은 아끼지 말아요... 사랑한다는 말, 절대로 절대로 저축하지 말아요.. 내일은 영원히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