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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Sep 28. 2022

어쩌면 귀가

2. 강릉에서 살아야겠어.

  어릴 적 그들은 이제 가문 가문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을 뿐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대신 그곳엔 한 채의 단독주택과 집순이인 내가 남았다.  분명 학교에서 친해진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집으로 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학생일 때는 어쩌다 한 번씩 강릉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나 예쁜 문구를 고르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수다를 떠는 것 외에는 집에서 조용히 할 일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쉬는 일상이 더 좋았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런 데에는 이전과 다른 학생이라는 신분도 톡톡한 역할을 했던 걸로 보인다. 특히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친해진 친구들은(이후 그들은 텅장팸이라는 모임의 멤버가 되었다. 항상 통장이 비어있던 학생 시절을 대부분 함께한 친구들이 자조적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굳이 서로의 집에 가지 않더라도 대부분 시간을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인정할 정도로 징그럽게 붙어 보냈기에 굳이 서로의 집에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야간 자율학습이 강제되던 시기에 평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함께하다 하교 뒤에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씻고 잠자는 게 전부인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퍽 설레었고 모처럼 쉬는 날에는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게다가 강릉은 신영극장을 기준으로 한 시간이면 시내를 충분히 다 둘러볼 수 있는 조그마한 도시라 이미 그곳들은 내게 익숙하다 못해 살짝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마음 한구석으로 막연히 성인이 되면 '이곳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살 테다.'라는 달콤한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진로에 대한 명확한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집 형편이 딱히 좋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집 밖을 혼자 떠나본 경험이 없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은 이내 곧 두려움이 되었다. 우리 집이, 강릉이 아닌 어딘가에 나  혼자 버티고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좋아하는 소설책이나 맘껏 볼 수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지원한 집 근처 국립대 국문학과에 합격했고 성인이 되었음에도 나는 끝내 대관령을 넘지 못하고 강릉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히려 다양한 국적과 타지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현지인인 나는 오히려 그들과 함께 그동안 미처 좋다고 느끼지 못한 강릉의 곳곳을 맘껏 누렸다.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지역의 이야기를 아직 잘 모르는 누군가와 나누면 그만큼 내 세계를 안정감 있게 넓힐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강릉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졸업 후에도 이곳에 남게 되면서 내 삶의 첫 시련기가 찾아왔다. 


  조사에 따르면 소비 관광 도시인 강릉에 남은 청년들의 직업은 자영업이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는 내가 다닐 직장은 사실상 없다는 뜻으로 이 조그마한 곳에서 이 년간 수많은 이력서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땅한 직장을 찾을 수 없었다. 다들 내 나이 또래 애들은 당연히 얼마 못 가 서울로 올라가리라 생각했고 이곳에 발붙인 가정을 꾸린 30~40대 여성을 우대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창업을 할 자신도 돈도 없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내가 똥오줌만 만드는 기계가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마지막엔 돈은 없지만 일단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 일을 구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동계올림픽으로 새로 지은 아트센터에 우연히 알바로 발을 들인 것을 계기로 지역 문화기관의 인턴이 되었다. 지역축제 기획에 참여해서 내가 만든 축제 슬로건이 곳곳에 걸리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도 해보고 환상의 조합인 동료들과 외교부 공모전에서 상도 받는 기쁨도 누리면서 이대로라면 강릉에서 살아야겠다는 나의 꿈도 어느 정도 현실화했다고 여겨질 쯤이었다. 잠을 설치는 날이 하루 이틀 점점 늘어나더니 불면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강릉에 안착할 수 있는 기대는 오히려 나를 옥죄는 덫이 되어버렸다. 알게 모르게 인턴이라는 직위는 정규직 직원들의 말 한마디에도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하곤 했고 피로와 스트레스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버거워 남몰래 침대에서 우는 날도 있었다. 이를 풀기 위해 보상심리로 주말마다 강릉의 새로운 장소들을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머리는 즐거워도 이내 몸에 피로가 겹쳤다.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회사에서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짐을 옮기다 예전부터 갖고 있던 디스크 통증이 손쓸 수 없이 커져 버렸는데 그 와중에도 끝끝내 버티다 프로그램을 마친 주말,  집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쓰러져 그대로 구급차로 실려 갔다. 주말 지방 A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제대로 캐치하지 못한 내 상태 때문에 골든아워를 놓치고 주말이 지나고서야 뒤늦게 수술을 했지만, 이미 대소변을 담당하는 말초신경이 손상을 입어 똥오줌을 전혀 스스로 누지 못하고 그 일대 감각을 소실하는 후유증이  남았다. 이에 대한 책임을 내게 전가하는 병원의 모습에 다시 한번 상처를 입고 별다른 선택지 없이 서울로 가게 되었다.  


  허무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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