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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Sep 28. 2022

어쩌면 귀가

1. 우리 집 연대기


'강원도 강릉시 강변로2XX번길 X-1' 



  여기 집 한 채가 있다. 내 삶의 끝에는 항상 우리 집이 있었으니 우리 집의 연대기는 곧 나의 연대기라고 해도 다름이 없다. 자! 그럼 우리 집의 시작을, 나의 시작을 살펴보자. 슬레이트 지붕에 우리 집과 셋방, 창고, 마당 구석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까지 뭐 하나 신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낡은 집에 두 살짜리 아기였던 내가 이사를 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집은 큰아버지가 동해에서 강릉으로 유학 나오실 때 할머니께서 장만하신 나름 우리 집안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집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낳고 다시 분가하게 되면서 이 집으로 오게 되었을 땐 이미 이 집이 지어진 지 한참이 지난 뒤였다.

  

  우리 집을 가장 먼저 떠올릴 때마다 나는 콘크리트 특유의 차갑고 축축한 벽과 바닥이 선명하다. 조명도 변변치 않아 낮에도 어두컴컴하니 창으로 노오란 햇살만이 비치는 내 방을 나는 너무나도 사랑했는데 햇살에 노르스름하게 익어 꼭 노란 벽지로 도배한 듯한 방은 내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다녀올 때마다 책장이며 장난감 배치가 바뀌어 있어서 하원 길을 늘 설레게 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하나뿐인 딸에게 뭐든 좋은 것을 해주고픈 엄마의 마음이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밤마다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걸  극도로 무서워한 것만 빼고 이 집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질 수 있었던 80%는 엄마 덕이라는 걸 이미 훌쩍 커버린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엄마 사랑해! 


  그렇다면 나머지 20%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내 유년 시절의 가장 든든했던 지원군들을 소개하려 한다. 나는 종종 셋방에 놀러 가곤 했는데 그곳엔 맘씨 좋은 성원이 오빠와 아주머니가 계셨다. 네다섯 살 꼬마인 내가 셋방 문을 열면 앉은뱅이책상에서 아주머니의 감시하에 학습지를 풀던 성원이 오빠가 반색하며 나를 반기고 아주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원이 오빠를 더 공부시키는 걸 포기하고 항상 나와 놀아주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오빠가 학교에 간 사이에도 내가 엄마에게 어렵게 구한 한약을 안 마신다고 혼쭐이 날 때마저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박하사탕으로 나를 달래주던 아줌마, 어린 내게 몰래 자물쇠가 잠긴 창고를 실핀으로 여는 최초의 일탈(?)을 알려준 성원이 오빠까지 두 사람은 우리  집에서 가족처럼 나와 우리 가족을 살뜰히 챙겨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한편 나는 지금과는 정반대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할 정도로 공사다망한(?) 빼빼 마른 꼬마였다. 유치원에 다녀온 뒤 내 방에서 놀다 보면 성원이 오빠를 비롯해 앞집 동생,  동네 친구, 언니들이 대문 밖에서부터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어찌했든 이들과 동네 골목 곳곳을 접수한 뒤에는 아지트였던 뒷산을 넘어 기찻길 건너 놀이터까지 영역을 확장해 놀다가 위험하게 기찻길을 막 건너 다닌다고 엄마에게 빗자루로 혼쭐이 나기 일쑤였다. 그럴 때도 셋방으로 도망가면 성원이 아주머니가 간식으로 달래주곤 하셨던 게 떠오른다. 나는 이 집 구성원들의 비호 아래 밝은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이 집에도 암적인 구석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집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낮에는 그나마 다닐 만했는데 밤이면 엄마가 간혹 혼자 화장실에 가라고 채근할 때마다 눈만 번쩍이는 검은 고양이나 정체 모를 습격(?)에 항상 벌벌 떨어야만 했었다. 오죽하면 잠시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을 때 내가 손님들에게 가장 먼저 소개했던 곳이 집 안에 있는 수세식 화장실이었을까. 그 당시 나는 모든 사람이 집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당당히 그럴 수밖에 없었고 부끄러움은 오로지 부모님의 몫이었다.


   낡은 집에 학을 떼던 엄마의 강력한 주장으로 잠시 옆 동네 새 임대 아파트에서 3년간 살던 중 태풍 루사로 옛집이 천장까지 잠긴 뒤로 그 집 자리에 새집을 지어 돌아왔을 땐 이미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생이었다. 되돌아온 집에서는 더는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집안 여건은 전보다 더 좋아졌지만, 그들이 떠난 뒤로 나는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완벽한 집순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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