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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사랑

by 에밀리


문득문득 그리움이 스친다. 혼자서 길을 가다가 노래를 듣다가 음식을 먹다가 때론 그림을 보다가 시를 읽다가 나는 아이가 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울기도 하고 한참을 서성이거나 때로는 손을 잡아달라고 한다.


교통사고로 잃은 엄마, 사무치게 그리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며칠을 앓았다. 엄마가 떠나셨을 때에 세상이 너무나 허무했고 두려웠고 막막했고 이미 지쳐버렸다. 그때 나는 스물셋이었다.


나의 엄마! 한평생 화장한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평생을 수더분한 아낙으로 멋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집에서는 익숙해서 안 보이던 것들이, 전주 모래내 시장을 가거나 혈압약 타러 예수병원에 동행할 때에 눈에 들어왔다.


화장 안 한 엄마의 맨 얼굴이 추레해 보였고 허름한 옷이 눈에 밟혔다. 그럴수록 안쓰러운 마음으로 엄마와 팔짱을 끼고 공손하게 따라 걸었던 것은 나의 위선이었을까.


엄마처럼 나도 터울 지는 늦둥이 둘을 더 낳았다. 내가 늦둥이로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초등 6학년인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한다. "엄마, 늙고 안 이뻐서 싫어" 아들의 그 말을 듣고서는 처음엔 얼음처럼 굳었지만, 어느새 사오 년을 계속 듣다 보니 이제는 "그래, 나 못생기고 늙었어. 어쩌라고?" 체념하듯 그러면 "배 나오고 살쪄서 안 이뻐! 우리 엄마도 이뻤으면!!!"


남편의 말에는 반감만 가졌는데 아들들 말에 운동과 식이요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벌의 옷과 화장품도 구입하였다. 철마다 외출복은 두세 벌 정도였는데 지금은 옷이 넘친다. 아들들이 얄궂으면서도 때론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는 왜 엄마에게 그러지 못했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동상면 울빼기(울보)였던 나는 엄마에게 한참을 조르고 있다. "엄마 우리 교회 가요, 가" 선뜻 대답을 안 하는 엄마 대신 아버지 반응이 빠르다. "애 울리지 말고 우리 한번 가봅시다" 나는 열 살에 부모님을 전도하게 되었다.


매일 새벽 기도에 가는 길은 그야말로 별 총총, 산마을 하늘은 유난히 깊고 푸르러서 우주를 아우르는 선각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둠이 깔린 고샅길을 엄마와 단둘이 걷는 그 순간은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엄마와 내가 걷는 길에는 생동하는 듯한 '바흐의 첼로 무반주곡 프렐류드' 선율이 흐른다. 손위 언니와 크게 터울 지는 넷째인 내게는 또 바로 두 살 적은 여동생, 그리고 네 살 차이 조카도 같이 살아서, 엄마와 단둘이서만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길은 전주로 유학 가는 6학년 5월까지 이어졌다.


별이 총총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별 헤는 밤'을 엄마에게 읊어드리고 '나의 사랑하는 책' 찬송가를 부르며 걷기도 하였다. 지금도 윤동주의 시와 즐겨 부르던 찬송가를 들으면 왈칵 눈물이 솟구친다.


부지런한 부모님 덕에 시골에서 너른 집에 살았고 독립마당과 헛간이 있는 아랫채에는 일꾼들이 기거하는 방이 있었다. 엄마가 스스로를 위해 돈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 반면, 베푸는 것을 가족에게 하듯 소문난 온정가라, 집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추운 겨울, 농한기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 안방 아랫묵에 모여 앉아 뜨개질을 하며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하하하하”흐드러지는 아낙들의 웃음이 담장 너머까지 들려왔다.


전주집에서도 정성으로 생명을 일구어 화단에는 꽃을, 옥상에는 채소를 심어서 상추류와 푸성귀는 직접 재배하여 신선한 것으로 식탁에 올렸다.


물자가 풍요로운 90년대에도 당신은 양말을 기워 신으면서도, 아버지 옷은 셔츠, 바지까지 다리미로 직접 다렸다. 여름마다 하이얀 모시옷을 입은 아버지가 마루에서 신문을 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지런한 사랑으로, 아버지는 언제나 학처럼 기품 있고 고고(孤高)했다.


정작 당신은 초라한 입성으로 식구들을 빛내기 위해 밤낮으로 헌신하던 엄마를 생각하면 서글프다. 엄마도 사람이고 여자인데 나는 왜 한 번도 옷을 안 사드렸던가. 나중에 밍크 사드리겠다고 하고는 생신날 주방용품을 선물로 드렸다. 엄마의 개성이나 취향은 생각하지 않아서 더 죄송스럽다.


갑자기 떠난 엄마이기에 한스런 미련이 남았다. 나는 부모님 공양하고픈 마음을 어르신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에서 배식봉사 하면서 마음에 큰 위안을 받고 있다.


모습은 소박하였으나 그 사랑의 표현은 섬세하고 최상급으로 아름다웠던 엄마! 창의적인 도시락 구성으로 학창 시절 내것은 흔한 계란말이가 아니고 멸치볶음도 달랐다. 외관뿐만 아니라 맛도 촉감도 인기 최고라 반찬통이 빨리 비워졌다.


손수 옷감을 재단해서 재봉틀로 하나뿐인 옷을 만들고 겨울에는 뜨개질로 조끼 바지 망토와 장갑을 산뜻하게 떠 주던 솜씨 좋은 엄마가 무척이도 자랑스러웠고 우울했다 .


그러면서도 내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재주 있으면 고생하며 살게 된다'고 해서 굳이 배우려 하지 않은 것이 아쉽고 답답할 때도 있다. 느긋하게 격려를 아끼지 않고 인정해주는 영원한 내 편, 엄마가 곁에 있을 줄만 알았다.


평생을 농사일과 집안일로 거친 손이 마를 새 없이 일을 하였고 뭐든 뚝딱 쉽게 해내셨다. 살림꾼인 엄마는 내가 국민학생 때부터 줄곧 말했다. "책상에서 일하는 여자로 편히 살아라"고 하신 걸로 비추어, 엄마의 역할에 대한 고단함과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묻어나 애처롭다.


"너는 비행기를 많이 타고 큰 일을 할 팔자란다"고 종종 얘기했다. "엄마는 무슨 점을 본대요?"라고 응수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기분 좋았다. 지금 엄마가 안 계셔서 여쭤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하나의 암시처럼 무의식 중에 나를 이끌었다.


엄마가 되어서야, 아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한스러움에서 가벼워질 수 있었다. 이미 자식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부모에게 평생의 효를 다 한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엄마의 꿈이고 소망이고 염원이셨을 간절함을 내 안에서 본다.


같은 여자로서 딸들을 보면 애틋하다. 어느덧 날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딸을 보고 있다. 나를 향한 시선이 이토록 간절하며 따듯하였다니 '딸 시절'이 귀하고 새롭게 느껴진다. 콩쿨장으로 평가회로 시험장으로 향하는 딸들을 배웅하며 내게서 나의 엄마를 보고는 '소중하고 귀한 사람'인 [나]를 찾고 싶어졌다.


아이들 인생의 뒷무대에서 막연히 기다리며 가슴 졸이기보다 소모적인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에 도움되는 일을 하고, 자녀들을 이해하며 도울 수 있는 자원활동을 하게 되었다.


중고등학교에 봉사교육 강의를 하며 교실 밖에서는 더불어 같이 성장하고 도울 수 있는 자원활동을 하였다. 다채로운 현장체험으로 성취와 보람을 느끼고 내 삶에도 집중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되어 다양한 영역에 도전하면서 진정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게 되었다. 비로소 엄마에게 떳떳해질 수 있었다.


엄마의 부지런한 사랑은 등불이 되어 밝힌다. 엄마는 오히려 살아 계실 때보다 더 가까이 내 안에 있다. 우리의 대화는 기도가 되고 갈수록 더 선명해져서 59세의 나이에 멈추어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린 시절이 불쑥 튀어 나와 가슴 절절 아프다. 뒤늦게 알아차린 세찬 깨달음에 눈물이 난다. 마흔 지나 늦둥이들을 낳고 내 엄마를 가슴 깊이 품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엄마의 기도가 삶을 이끌었고, 사랑 받았던 기억으로 생기 있게 살아가고 있다. 나도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무지갯빛 미래가 되고 싶다. 엄마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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