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대학교를 다닐 때였다. 각종 국가고시의 외국어 시험이 토익 등의 민간 시험으로 대체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토익 열풍이 한창이었다. 길거리에는 ‘보름 만에 만드는 500점반’, ‘700점을 맞으면 강의료를 환급해주는 산타토익’, ‘강남에서 돌아온 스타강사’ 등의 화려하고도 낯선 광고들이 수없이 보였다. ‘요즘 내 또래 대학생들도 전공 공부 외에 토익을 다 한다던데 졸업하고 필요할지 모르니까 한 번 해볼까?’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남들이 하는 토익을 시작하게 되었다.
‘토익’이라는 파도
수업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학원가가 많은 동네로 이동했다. 학원 근처에 다다르자 정차벨을 누르기도 전에 빨간 불이 켜졌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많은 학생이 출입문에 몰려들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물이 쏟아지듯 버스에서 한꺼번에 내리는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다. 초행이었지만 그들과 내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해진 길을 익숙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니 꼭 등교하는 동창들처럼 느껴졌다. 데스크의 안내를 따라 모의고사를 치른 뒤 반을 배정했다.
‘310’ 나의 첫 토익 점수였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처음 시험을 볼 땐 자신의 신발 사이즈 정도 점수가 나온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310점’이면 해볼 만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에 기초도 없던 나의 ‘310점’이란 점수는 요행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500점 한 달 목표반’을 배정받았고, a,e,i,o,u부터 시작했다. 신나게 입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수업 난이도에 만족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불현듯 ‘분명 한 달이라고 했는데 올해 안에 될까?’ 왠지 나의 토익 인생은 어떠한 타협도 되지 않는, 결승선에 가야만 끝나는 마라톤 같은 장기전이 될 것 같았다.
얼떨결에 학원등록과 함께 첫 번째 시험을 접수했고 하루에 한 시간씩 공부하며 드디어 시험날이 되었다. 시험장에서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 각자의 방법으로 토익을 수련하다가 실력을 평가받으러 온 듯한, 긴장되면서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시험신청마저도 빡빡했던 경쟁률을 보면서 토익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지, 내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에 잘 보면 되지
시험은 듣기테스트부터 시작되었다. 아직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간절함의 정도를 나타내듯 고개는 자연스레 숙여지고 눈은 초점을 잃어 꾸벅꾸벅 잠들어 버렸다. 시험이 끝나기 5분 전, 답안지에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마킹하고 나와 버렸다. 허망하게 집으로 가는 나와는 달리 홀가분한 표정의 다른 학생들을 보니, 바쁜 출근 시간 붐비는 서울 지하철 직장인들 사이에 혼자 시간적 여유가 많은 백수가 된 기분이었다.
다음 시험에 잘 보면 되지 뭐.
두 번째 시험날. 나는 또 잠들었다. 미리 전날 잠도 많이 잤는데 이상했다. 영어가 들리지 않으니까 정말 자장가로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시험이 끝나기 5분 전, 첫 번째 시험과 달라진 게 있다면 5만 원 가까이 되는 시험료가 아까우니 하나라도 더 맞게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찍었다는 것 정도. 창피한 기분이 들 때마다 백팩 끈을 양손으로 꽉 쥐며 시험장 언덕을 내려왔다. 이번엔 시험만 볼 게 아니라 목표를 정하기로 했다.
영어실력은 곧 전투력
그때쯤 1학년이 끝나갔고 2학년을 마치면 다른 학교로 편입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나는 가고 싶었던 학교에 지원하려면 토익점수가 700점 이상 필요하다는 요강을 보게 되었다. 마침 토익도 시작했고 1년이면 점수를 맞추기 충분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입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전적대 점수, 토익 점수 그리고 논술시험이었다. 새로운 목표가 생기니 생활패턴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의 일과는 전공 공부와 토익 그리고 추가된 논술 과외받기. 학교 수업이 끝나면 일주일에 세 번 토익학원으로 갔다. 학원을 마치고는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교 근처의 카페로 가서 복습했다. 그 카페는 새벽 1시까지 영업을 해서 공부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친구는 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기호에 맞춰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주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만 마시면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어 운동장을 돌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에스프레소 4샷에 물을 섞은 거였다. 덕분에 간간이 운동도 했다. 밤 9시부터 카페인의 힘을 받아 ‘영어실력은 곧 전투력’이라는 신념으로 토익이라는 전투에 임했다. 새벽 1시에 같이 마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커다란 시계가 달린 건물이 보였는데 항상 새벽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새벽이지만 친구와 가끔 술을 마시고 싶을 땐 술집에 들어가자마자 오뎅탕 하나 시켜놓고 10분 만에 한 병씩 들이부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매달 시험을 치렀다. 아무리 토익이 문제를 바로바로 찍어내는 기술이 중요하다지만 생각보다 내 점수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내 점수만 오르지 않는 느낌. 영어에 기초가 너무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노력이 부족한 탓일까. 편입 시기는 다가오고 있었고 아직 점수를 취득하지 못해 초조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계획엔 벌써 700점이 되었어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할 때 ‘당연히 서울에 있는 대학교 가겠지’라고 생각하다가 3학년이 되면 ‘제발 지방에 있는 국립대라도 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태세가 전환 되는 것처럼, 토익을 시작할 때 700점이라는 점수는 나에게 그런 의미, 딱 그 정도였다. 700점 이상을 획득한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고 많이 노력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685점이라는 숫자
열 번 이상의 시험을 통해 토익 반을 졸업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받은 점수는 ‘685점’. 결국 700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편입을 지원했고 그것보다 더 어설펐던 논술 시험도 치르게 되었다. 편입을 위해 해당 학교로 갔다. 시험장에는 아주 많은 지원자가 있었고 그중에 두 명만 통과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직감적으로 ‘내가 700점이 되었어도, 여기엔 800점인 사람들도 있을 테고, 900점인 사람들도 있겠구나.’ 느낄 수 있었다. 토익을 처음 시작할 때 학원으로 가는 낯선 버스 안에서 나보다 벨을 먼저 누른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여기도 나보다 다들 앞서 있는 기분.
1년의 준비 기간에 비해 초라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시험장을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학교 로고가 새겨진 컴퓨터용 싸인펜을 왠지 버릴 수 없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는 말을 인정하기 싫었나 보다. 멀리서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땐 버스마저 꼭 내 등을 떠밀어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무심코 덤볐던 일 년의 노력 했던 시간이 오히려 상처로 돌아와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쯤, 결과 발표가 나왔다. 결과는 ‘불합격’, 그런데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를 했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의 일상에서 토익이라는 단어는 서서히 지워졌다.
대신 685점이란 숫자는 남았다. 사회의 기준에 조금 부족하면 어떤가. 내 발 사이즈를 최대로 키웠던 노력의 숫자인데. 발 사이즈가 685mm라는 상상을 하면 재미있다.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시도할 때 685라는 숫자를 노력의 기준으로 삼는다. 노력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잠을 줄여도 힘들지 않고, 생활습관을 완전히 바꿔버릴 정도로 치열했던 시간, ‘목표’라는 단어 하나에 가슴이 뛰었던 그때의 열정이 고스란히 몸속에 남아 있다. 내 인생의 최대치였던 685점은 그래서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나의 성장판은 닫히지 않았으니까. 성장에 ‘완벽’이라는 단어는 없다. 오직 ‘시작’과 ‘반복’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