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4도. 오후 2시 온도. 내 몸은 36.5도인데 왜 더 낮은 온도에서 더위를 느끼는 건지? 건널목에 설치된 거대한 파라솔 밑에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하는 순간, 반대쪽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는 빠른 속도로 걸어간다.
여름엔 하루에 적게는 한 번, 많으면 두 번 가는 단골 카페. 스타벅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가성비가 좋다. 커피 맛은 모르지만 적어도 산미가 있는 커피를 싫어하는 나에게는 꽤 적당한 맛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여름인지 겨울인지 헷갈릴 정도로 에어컨을 세게 틀어 준다는 점. 집에도 에어컨이 있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전기세가 비싸다는 인식이 있어서 아무리 요즘 에어컨이 예전에 비해 전기세가 적게 나온다고 하지만 글쎄, 에어컨을 켜지 않던 버릇 때문에 난 여전히 ‘on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노트북이나 책 등 만지작거릴 만한 무언가를 들고 시원한 카페에 가는 것을 좋아해서 오늘도 더운 날씨를 이겨내려 카페로 향한 것이다.
“아이스 아메 한 잔 주세요.”
2
자판기 커피에 익숙하던 나에게 아메리카노는 낯선 문화였다. 내 기준에 ‘사치’였던 스타벅스 커피를 점점 테이크아웃으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셔보았다. 갓 성인이 된 나에게 ‘사회는 이런 곳이다.’라고 말해주듯 사약 같은 쓴맛이 입에 채 퍼지기도 전에 그대로 나무 밑에 커피를 뱉었다. 그랬던 커피가 현재는 모든 활동의 능률을 올릴 수 있는 ‘능률의 맛’ 커피의 용량은 ‘능률의 속도’가 되어버렸다.
앉아서 한 시간 정도 있었나. 갑작스레 어머니로부터 친척의 청첩장을 전달받았다. 결혼식으로부터 2주 전이었다. 내가 커갈수록 친척들과 왕래가 줄어든지라 외사촌을 어린아이였을 때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벌써 결혼을 한단다. 왠지 나이순으로 보나 시간적 여유로 보나 축의금 받는 역할은 내가 적임자 같았다. 역시나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막내 삼촌이랑 같이 하면 돼.”
”막내 삼촌?“
내가 어렸을 때 성인이었던 막내 삼촌은 나와 굉장히 잘 놀아줬다. 생선가게에서 생선을 손질하던 삼촌은 왼쪽 앞머리 한쪽에는 노란 브릿지를 하고 있었다. HOT, 핑클, 젝스키스 등의 스티커와 브로마이드를 모았으며, 밤늦게까지 놀다가 함께 전설의 고향을 볼 때면 항상 삼촌 뒤에 숨어서 한쪽 눈으로만 본 기억이 있다. 부모님과 함께 대전으로 이사 온 후에도 사는 곳이 멀었던 삼촌이 가끔 와서 엑스포 놀이동산에 데려갔던 것 같다. 기억엔 없지만 한 여름에 티라노사우르스 모형 앞에서 같이 찍은 어렸을 적 사진에 의하면. 그랬던 삼촌에게 커가면서 연락을 하지 않았던 미안함과 설렘을 가지고 결혼식 날짜가 오기를 기다렸다.
3
결혼식 날, 시간 계산을 잘못한 탓에 예식 시간보다 두 시간은 일찍 도착했다. 내가 제일 일찍 도착한 줄 알았는데 결혼식장 안에서 막내삼촌이 나오는 게 아닌가. 두 팔 벌려 반겨주는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조카를 반기던 모습과 똑같았다.
“삼촌,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어?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이상하게도 나는 예전처럼 삼촌을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다. 어렸을 적 기억은 거의 까먹었는데 그때의 감정대로 행동했다. 삼촌은 지금의 나보다 어렸었을 텐데, 꼬맹이가 귀찮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삼촌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내게 삼촌은 둘리처럼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공룡이었다.
4
친누나는 가끔씩 아무런 내용 없이 조카 사진을 보내준다. 사진을 묶음으로 저장하며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세 살짜리 아이를 보며 속으로는 흐뭇해하지만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탓에 ‘귀엽네 ㅎㅎ’, ‘많이 컸네 ㅎㅎ’ 등의 건조한 답장만 보내곤 한다.
토요일 오전, 어쩐 일인지 누나가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하나 보내왔다.
“이따가 조카 데리고 집에 놀러 갈게.”
난 에어컨 앞에 서서 on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