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먹
공부는 중학교 때부터 하면 되지 뭐, 라고 생각했던 통통하고 뽀얀 초등학생이 Tooniverse를 틀어 ‘톰과 제리’를 보고 있다. 다른 친구들은 컴퓨터 자격증 따러 다닐 때 ‘바람의 나라’라는 게임에 빠져있었다. 고집은 어찌나 센지 부모님의 잔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온갖 핑계를 만들어 게임을 했다. ‘한 시간만 할게’는 두세 시간을 의미했고, 밤에 몰래 컴퓨터를 켠다거나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실 때면 밤새 게임을 했다. 만화가 끝나고 컴퓨터 방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나는 게임에 빠져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성적관리를 하겠다고 말만 했던 나는 방법을 몰랐다. 해보지도 않았던 걸 어떻게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차근차근 해봐야지. 반 배정을 받고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35번의 번호 중 중간 정도인 16번의 번호를 받고 맨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게 되었다.
― 안녕?
누군가 뒤에서 손을 내밀며 나를 불렀다.
커다란 손, 같은 중학교 1학년이라기엔 너무나 복학생 같은 골격, 180cm의 키. 35번이었다.
― 어… 안녕.
압도당했다. 뽀얀 피부와 순살의 몸집으로는 분명 나를 소극적이고 약한 초식동물로 볼 것이 분명했다. 35번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주먹’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돌아서 칠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모든 신경은 등 뒤에 있었다. 몰래 과자를 먹는 소리, 그 당시에는 또래 중 한두 명이나 있을 법한, 부의 상징인 핸드폰 자판을 누르는 소리, 의자를 뒤로 빼는 소리 등 시끄럽진 않지만 행동 하나하나를 체크 하며 ‘주먹’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게 본능적으로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꽤나 조용했으며 수업시간에는 주로 책을 편 채 세워놓고 엎드려 잠에 들었다. ‘잠을 많이 자서 키가 컸나?’
어느 날, 용돈을 받아 ‘바람의 나라’ 가이드북을 구매해 쉬는 시간에 읽고 있었다. ‘캐릭터의 성장은 곧 나의 성장’이라는 마음으로 교과서를 옆으로 치운 채 온라인 성장을 갈구하고 있었던 그때, 내 옆으로 큰 실루엣이 다가왔다. ‘주먹’이었다! ‘이게 그 유명한 갈취라는 걸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가?’ 얼굴은 책을 향하고 있었지만 곁눈으로 그를 봤다.
― 너도 ‘바람의 나라’ 하는구나! 어디 서버야?
― 어, 나… 호동서버인데.
이제야 그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도토리 같은 머리, 나보다 몇 치수는 큰 것 같은 교복, 넓적한 돌덩이 같은 하관. ‘맨 끝 번호’라는 숫자가 너무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 난 다른 서버이긴 한데, 같이 할래?
― 그래.
― 학교 끝나고 3시 30분에 들어와.
나에겐 그 명령이 ‘옥상으로 따라와’ 정도의 심장을 때리는 강한 압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법 귀여운 아이디로 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털보땡추’ 그의 아이디였다. 나의 아이디는 ‘장태산도사’. 그렇게 나는 주먹과 그룹사냥을 시작했다. 목검으로 다람쥐를 잡고, 토끼를 잡고, 사슴을 잡고, 쥐를 잡으면서 온라인 성장을 함께 했다. 물론 나오는 아이템은 눈치껏 주먹에게 3:1 비율로 주었다.
2. 농구장의 하이에나
주먹은 농구부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배구를 했던 그는 운동신경도 좋고 점프력도 대단했다. 그래서 1학년이지만 2, 3학년 선배들의 자리를 꿰차고 주전 멤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먹이 3학년이 될 때쯤에 지역에서 순위권에 드는 것이 코치의 목표였다.
또래에 키 큰 아이들이 세 명 있었다. 주먹, Y, 고릴라(본인이 슬램덩크의 채치수를 좋아해 고릴라라고 불리는 걸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1학년 중 싹이 보이는 아이들을 농구부로 가입시켜 성장시키고 있었다.
나는 키가 평균이었다. 그리고 어중간한 체격과 부족한 운동신경으로 농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무뚝뚝하지만 축구도 잘하고 농구도 잘하는 Y, 항상 팔짱 끼고 인상을 쓰고 다니며 무게를 잡지만 어딘가 엉성한 고릴라, 그들도 주먹의 꼬드김에 다들 ‘바람의 나라’를 하게 되었다. 항상 3시 30분에 게임을 시작했었는데, 농구부가 대회를 앞두자 다들 방과 후엔 농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도 같이 농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손에 농구공을 꼭 쥐고 방과 후에 학교가 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친구들과 농구부 선배들이 운동하는 것을 매일 바라봤다. 그들의 훈련이 끝나고 돌아가면 난 혼자 코트에 가서 어줍잖게 공을 던졌다.
3. 뉴비
2학년이 되고 나서 3학년 선배들이 졸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농구부원을 뽑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레이업슛, 패스, 드리블 등 테스트를 받고 농구부에 가입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2학년 3명, 1학년 1명이 그 대상이었다. 친구들은 벌써 1년 동안 농구부에서 활동해서 그런지 연습 하나하나가 익숙해 보였다. 단체경기, 단체연습이 끝나면 개인연습을 했다. 주먹과 고릴라, Y는 골밑슛을 500개씩 하고 집에 간다고 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따라 했다. 저녁을 먹을 때가 돼서야 정리를 하고 다 같이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주먹이 말했다.
― 우리 팀은 가드가 없어서 리드해 줄 사람이 없어.
고릴라가 거들었다.
― 그러니까. 다른 팀들은 키 큰 센터가 부족한데 우리는 가드가 없단 말이지. 지금 있는 애들이 잘 해줬음 좋겠다.
보통 가드들은 키가 작다. 발도 빨라야 하고 자세를 낮춰야 공의 위치가 낮기 때문이다. 키가 크면 드리블이 높아 공을 뺏길 위험이 크다. 가드는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로 나눠진다. 포인트가드는 ‘코트 위에 감독’이라고 불릴 만큼 경기의 흐름을 파악해 조율하고 넓은 시야를 갖춰 볼 배급과 좋은 패스 능력을 갖춰야 한다. 슈팅가드는 슈팅능력이 좋은 가드를 말한다. 3점 슛 등으로 중장거리에서 슛이 좋으면 슈팅가드를 막기 위해 수비가 붙는다. 그때 골 밑 수비에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골 밑 싸움과 리바운드에 강한 우리 팀에선 꼭 필요한 포지션이었다. 보통 키가 애매한 또래들은 모두 가드로 시작한다. 입문이 쉽지만 그만큼 잘하는 사람도 찾기 쉽지 않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뭐든 좋으니 팀에 필요한 가드가 되어서 친구들과 함께 뛰고 싶었다.
4. 기회
토요일 오전 7시. 우리 팀은 주말에 운동을 하지 않았다. 코트에서 농구공을 ‘탕탕’ 튀기는 소리가 고요한 오전의 적막을 깼다. 코트 끝에서 끝까지 드리블을 연습하고 친구들이 하는 골밑 슛 연습과는 달리 3점 슛을 연습하고 있었다. 난 키가 작기 때문에 골 밑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서였다. 100개쯤 했을까. 체육실에서 코치가 나왔다. ‘주말에는 쉬는데…?'
나는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고 코치는 십 분쯤 나를 지켜보다가 다시 체육실로 들어갔다. 농구부 내에서 2군이었던 나는 1군이었던 주전 친구들과 함께 뛸 수 없었다. 기껏해야 1군에서 누군가 빠졌을 때 교체되는 정도. 그것도 운이 좋으면. 나는 3학년이 되었을 때 친구들과 함께 뛰기 위해서 1년을 매진하기로 했다. 나의 목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학교와의 연습경기 도중에 3학년 선배 한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코치가 나를 보며 말했다.
― 야, 너 들어가.
― 네? 저요?
― 그래, 너.
벤치에서 경기를 뛸 생각조차 못 했던 나는 몸도 풀지 않고 있었다. 급하게 유니폼 상의를 바지에 넣고 헐레벌떡 나갔다.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가드인 나에게 공이 주어졌다. 그때였다. 눈앞이 까맣게 변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먹은 어디 있지? 고릴라는? 도와줘 Y. 공을 튀기는 순간, 상대방 가드에게 공을 뺐겼다.
― 야! 너 나와.
다시 교체를 당했다.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벤치에 다시 앉은 후에야 친구들이 보였다. 경기가 끝나고 모두 모여 봉고차에 올라탔다. 뒷자리 구석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이전 경기를 떠올렸다. ‘아무 기억이 나질 않았다’
5. 중고신인
또 한 명의 또래 아이가 농구부에 가입했다. B군.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급식실을 가다가 몇 번 마주쳤다. 나보다 작은 키. 170cm가 안 되어 보였다. 특별해 보이진 않았지만 특이한 점이 있었다. 농구화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처음 시작할 때 농구화를 가지고 시작하진 않는데…?’
초보일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은 뒤엎어졌다. B군은 한두 번 뛰어본 솜씨가 아니었다. 빠른 발과 속공능력, 돌파에 이은 볼 전달, 슈팅 능력 좋지 않았지만 같은 편조차 속아 버리는 패스능력. 우리 팀이 필요로 하는 가드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포인트가드. 코트 위에서 팀을 이끌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B군과 나는 연습을 같이 했다. 패스, 드리블, 레이업 등. 함께 하면 할수록 이 친구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같이 연습을 해도 응용이라는 것을 할 줄 알았고, 좁은 시야를 가진 나와는 달리 뒤에도 눈이 있는 것처럼 넓은 패스 범위를 갖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밀려나게 되었다.
6. 군웅할거(群雄割據)
내가 목표로 하던 3학년이 되면 주전 멤버가 될 것이라는 목표는 사라져갔다. 왜냐하면 5대5 경기는 교체멤버로 나갈 수 있다 해도 친구들은 3대3 경기의 호흡이 너무 잘 맞았다. 나도 함께 3대3 경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3명의 주전과 교체멤버 1명. 그러니까 주먹, 고릴라, Y, B군. 딱 4명이 적합했다. 코치도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연습하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 팀은 지역에서 가장 큰 5대5 대회에서 3등을 했다. 이후 농구부 진학을 준비하면서 주먹과 B군만 진지하게 농구선수로 진로를 정했다. 우리 지역에는 전국에서 2등을 하던 농구 명문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곳은 D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붙어 있어, 대부분 D중학교 농구부에서 그 고등학교로 넘어왔다. 주먹과 B군은 D중학교 농구부 사이에서 고등학교 입단 테스트를 보았다.
D중학교 코치가 우리 농구부 코치한테 그랬다고 한다.
― 선생님네 학생들은 동네농구 수준밖에 안 돼요.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7. 전국대회
2005년 가을, 전국에서 가장 큰 3대3 농구대회가 열렸다. 나이키에서 주최하는 대회였고 서울에서 열렸다. 많은 이벤트와 더불어 NBA선수들까지 초청해서 콘테스트를 하는 등 큰 행사인 만큼 전국 각지에 고수들이 모인다고 했다. 중학교 마지막 대회를 뛰자는 코치의 권유에 주먹과 고릴라, Y와 B군, 4명은 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중학생들만 100개가 넘는 팀이 접수하였다.
고릴라는 상대팀 선수를 블로킹하면 항상 ‘우호!!’라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듣기로는 경기마다 수차례 질렀다고 한다. 한 팀, 한 팀, 이기다 보니 친구들은 4강에 이르렀고 D중학교 농구부와 만나게 되었다. 그 시합도 마찬가지로 고릴라의 ‘우호!!’라는 기합으로 상대방의 기를 죽였다. 큰 점수 차로 D중학교를 이기고 친구들은 결승으로 갔다. D중학교 코치는 아무 말 없이 짐을 쌌다.
다음 날, 각 방송사와 기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친구들이 결승 무대로 올라갔다. 많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감독들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고릴라라 한들 소리를 지를 만한 기세는 없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사투리를 쓰는 팀에게 1점 차로 졌다고 한다. 그날 이후, 친구들은 교문 앞 플랜카드의 자랑이 되었고 방송반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 그들의 노력을 축하해주었다.
8. 각자의 길
고릴라는 미국으로 떠났다. 부모님이 미국에 계신 바람에 이민을 간다고 말했다. 아쉽지만, 농구시즌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함께 농구를 할 수 없었다. ‘바람의 나라에서 만나자.’
Y군은 취미로 매일 형들과 농구를 했고, 주먹은 계속해서 고등학교 농구부 입단 테스트를 알아보았다. 타 지역이지만 가까운 곳에 작년 전국 3등을 기록한 고등학교가 있었고, 그곳으로 테스트를 보러 간다고 했다.
― 나도 가면 안 될까?
무슨 배짱이었을까? 그 말이 나왔다. 이른 새벽이었다. 주먹과 함께 수업 전에 연습을 하다 라면을 먹으면서 속에 있는 말이 나와 버렸다. 주먹의 반응이 두려웠다. ‘그 실력으로는 안 될걸?’ 이라던지 ‘그 정도로는 힘들 텐데’의 반응이 나올까 봐. 주먹이 말했다.
― 같이 가면 좋지. 엄마한테 말해볼게.
입단 테스트 날, 고등학교 농구부원들은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와 주먹은 빈 코트에서 슈팅연습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3점 슛이 3개 연속으로 들어갔다. 운이 좋았다. 그 모습을 본 감독이 우리에게 슛감이 좋다고 평가했다. 바로 그날 연습에 함께 들어갔다. 직선으로 드리블을 하다가 다리 사이로 공을 넣는다든지, 점프해서 패스한다든지, 이런 단순한 드리블과 패스만 했었는데 고등학교는 수준이 달랐다. 몇 명이서 순서에 맞게 다양한 패스를 하고 속도를 조절하며 방향전환을 했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 나와봐. 저기서 구경해.
어떤 고등학생이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실력을 봤는지 1시간 만에 입단 테스트는 끝났다. 주먹과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주먹은 확실히 잘했다. 문제는 나였다. 어설픈 실력으로 합격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운 좋게 들어간 3점 슛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을까? 요행을 바랐다.
학교로 돌아온 날, B군은 주먹에게 다가왔다.
― 왜 나 빼놓고 테스트 보러 갔어?
주먹은 B군에게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 문제로 B군은 농구를 하지 않겠다고 떠났고 더 이상 함께 운동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합격했다. 하지만 주먹은 B군에게 미안했는지 본인도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에 나 또한 연습을 하다 발목에 큰 부상을 당해 당분간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던 우리는 각자 성적에 맞게 고등학교에 갔다.
9. 루키
발목에 깁스를 한 상태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원하지 않던 고등학교에 가서 그런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구들은 잘 적응하고 있으려나…’ 방과 후에 항상 농구를 하던 재미도 이젠 끝난 것 같았다. 그 시기에 우리 반엔 시선을 끄는 애가 한 명 있었다. 몸무게는 꽤나 나가 보이지만 190cm의 키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는 아기처럼 탄력 있었고, 머리스타일은 브로콜리를 심어 놓은 것 같았다. 탐나는 인재였다. 하지만 덩치가 너무 커서 말 걸기가 망설여졌다. 주먹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기 190cm 있어.’ 주먹은 데려와서 ‘제2의 고릴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나는 용기를 내 말을 걸어 보았다.
― 저기…
― 왱?
매우 가는 목소리, 아기 피부와 걸맞는 아기 같은 목소리 톤, 특이했다. 나는 그를 ‘강씨’라고 불렀다. 나는 학교에 오면 강씨를 종일 쫓아다니며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쉬는 시간마다 편의점에 가서 라면을 먹고 오는 것이었다. 점점 더 살이 차오르는 강씨를 보면서 나는 제안했다.
― 다이어트에 좋은 운동이 있는데 가볼래?, 마침 옆 동네에 살기도 하니까 가깝잖아.
― 뭔데? 나 게임해야 되는데….
― 농구라고 있는데 그냥 재미로 한번 가보자.
예상대로 강씨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농구코트를 밟았다.
10. 초심
주먹과 Y는 강씨의 성격을 파악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주먹은 강씨를 제압했다. 강씨는 어느 순간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 강씨, 그렇게 느리게 뛰면 안 되지!
― 미, 미안.
주먹은 강씨를 골밑슛부터 가르쳤다. 그리고 Y에게 말했다. 3대3 길거리농구 대회나 나가보자고. 주먹, Y, 나, 강씨가 멤버였다. 주장은 주먹이었고 우리는 대회를 위해 방과 후에 항상 농구코트로 다시 모였다. 강씨도 함께.
첫 대회 날, 예선전부터 우리는 고3을 상대해야 했다. 고등부의 특성상 학년은 상관없었다. 당연히 우리는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첫 게임부터 패배하고 집에 오는 길에 강씨가 말했다.
― 나 정말 열심히 할 거야.
강씨는 그 날의 자극이 사라졌는지 3일 뒤부터 잘 나오지 않았다. 번갈아가면서 코트로 출발하기 전에 강씨에게 전화를 하거나, 내가 학교에서부터 강씨를 데리고 나왔다. 우리는 전국적으로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가보자고 했다. 중학교 때와 수준도 다르고 오랜만에 시합을 하니까 너무 긴장해 몸이 굳는다는 게 이유였다. 우리는 매번 첫 게임에서 떨어졌지만 끊임없이 대회를 나갔다.
11. 군손님
2학년이 되자 우리는 조금씩 시합에서 이기기 시작했다. 8강까지는 무난하게 통과했고, 잘 풀리는 날에는 4강까지도 올라가곤 했다. 그 날도 연습이 한창일 때, 멀리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B군이었다. 농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갔던 B군이 돌아왔다. 주먹과 B군은 오랫동안 대화를 했다. 결론은 다시 같이 농구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강씨는 불안한 듯 다행인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 그럼 나 빠져야 되는 거지?
4명이 정원이니까, 사실상 그랬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B군이 들어오는 게 우승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이었다. B군도 왔으니까 우리는 연습게임을 했다. 나와 B군이 매치업되었다. 포지션이 겹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실력을 알기 때문에, 중학교 때 나는 상대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긴장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었고, 농구를 계속했는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잘했다. 중학교 때 주먹과 Y와 호흡을 맞춘 적도 있어서 그런지 착착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의 움직임이 다 보였다. 이쪽으로 페이크를 주며 반대쪽으로 가는지, 슛 모션을 취하고 돌파를 하는지. 난 그의 슛을 블로킹했다. 그다음은 그의 드리블 과정에서 공을 스틸했다. 이후 나는 그를 상대로 계속 득점을 쌓아갔고 이상하게도 나를 막기 어려워 했다. B군도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는지 당황한 모습으로 경기를 끝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약속이 있다며 떠난 B군. ‘다음에 또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강씨는 내게 말했다.
― 나 정말 열심히 할게.
그리고 강씨는 또 다시 3일 뒤 열정이 사라졌다.
12, 영원히 숨겨진 히든카드
3학년. 이제 우리가 고등부에서 뛸 수 있는 마지막 해였다. 더 이상 우리보다 선배들은 없었기 때문에 우승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 예전처럼 모든 대회를 나가진 않았고 집중할 수 있는 대회만 나가기로 했다. 매년 광복절 즈음 열리는 대회, 그 대회를 가장 인정해줬으며, 잘하는 팀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등장했다. 강씨를 앞세워서 압도적인 키 차이를 보여주자 모두들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상대팀과 악수를 하고 예선 경기가 시작되었다. 강씨는 포스와는 다르게 후보멤버라 벤치로 물러났다. 모두들 히든카드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승 후보팀을 만난 건 4강에서였다. 우승 후보팀은 멤버가 많아서 1팀과 2팀으로 나누어 출전했다. 그중 1팀이 우승이 유력했다. 우리는 1학년 때부터 수도 없이 1팀과 마주쳤다. 서로 견제했고 누가 잘하는지도 알고 있었으며, 결승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준결승에서 만나고 말았다. 실력이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전적이 비슷했다. 사실상 결승전이기 때문에 모든 팀들이 와서 관전했다. 경기는 시작되었고 주먹과 Y, 나는 몇 년 동안 맞춘 패턴 플레이와 개인기량에 집중했다. 6대5, 7대6, 7대7 아주 똑같이 점수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골 밑 싸움에서 주먹의 발목이 돌아가고 말았다. Y는 말했다.
― 강씨랑 교체하고 좀 쉬어.
― 아니야, 계속할게.
주먹은 발목 부상을 입은 상태로 계속 시합에 임했다. 골 밑 싸움에서 밀려버리니 점수 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게임은 끝나갔고 점수는 1점 차로 지고 있었다. 시간은 5초가 남아 있었다. 주먹이 공을 잡자마자 3점 슛을 던졌다. 나는 온전하지 못한 몸 상태로 경기에 임한 주먹을 걱정하면서도 이 경기는 어쩌면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슛 폼도 좋지 않았고 수비가 있는 상태에서 너무 급하게 던진 슛이라 들어갈 확률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Y는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골 밑에서 버텼다. ‘철렁’ 내가 농구를 하면서 림을 가르는 소리 중에 가장 크게 들렸다. 다시 역전했다. 5초, 4초, 3초, 2초, 1초. 마지막 공격을 막아내고 우리는 1점 차(당시 길거리농구에서 3점 슛은 2점으로 계산했다)로 이겼다. 주먹은 주저앉았고 더 이상 뛸 수 없었다. 이후 결승에서 나와 Y, 강씨는 2팀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13. 마지막 대회
우리 팀은 순식간에 유명해졌고 다음 대회에서도 주목받았다. 하지만 너무 자만했던 탓일까. 이름도 모르는 팀에게 8강에서 패배하고 농구를 그만하게 되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Y는 말한다.
― 야, 그때 나 때문에 우승한 거야. 나한테 고마워해.
― 아니지, 주먹이 3점 넣어서 이긴 거지.
그러자 강씨는 말했다.
― 아, 그때 조금만 더 열심히 할걸.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뒤돌아보면 우승을 하기 위해 몰입했던 과정에서 배운 게 있다. 바로 ‘노력의 기준’이 생긴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두세 시간씩이 아닌 시간은 많을수록 좋다며 매일매일 운동하던 습관들이 남아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나만의 중요한 원칙이 만들어진 것이다. 농구를 뛰어나게 잘하진 못했지만, 그러면 어떤가.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면 적어도 준우승은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