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란 Oct 20. 2023

카스테라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산 방울토마토를 깨끗이 씻고 있다. 플라스틱 사각 통에 담긴 500g의 대추 방울토마토를 한 번에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맨들맨들한 껍질이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정성스럽게 씻은 뒤에 락앤락 도시락통에 넣었다. 토마토는 열량이 낮고 식이섬유가 풍부해 포만감을 줄 수 있다. 올리브유와 잘 어울려 한 바퀴 두르고 뚜껑을 닫았다. 오늘의 안주다.


한 달째 다이어트를 하고 있던 나는 거절할 수 없는 술자리에 가기 위해 안주를 챙겼다. 친구들의 부름에 세 번은 거절했지만 한 번은 가야 할 것 같아서 다이어트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방울토마토를 챙긴 것이다. 도시락통 둥근 모서리의 빈 공간은 오이를 스틱으로 만들어 쑤셔 넣었다. ‘딱 소주 세 잔만 먹고 나와야지.’   

친구들이 모여 있는 치킨집으로 종이가방을 들고 입장했다. 양념이 발리고 시즈닝 가루가 뿌려진 치킨들 사이로 한 도시락통이 비집고 들어왔다. ‘누구의 선물일까?’ 내심 기대하는 친구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드디어 뚜껑을 개봉했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빨간색 귀여운 방울토마토 등장. 

― 뭐지?


거구의 친구 A, B, C는 전혀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설마 안주를 하려고 가져온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A는 193cm의 키에 몸무게 150kg. B는 183cm, 120kg. C는 181cm, 110kg의 피지컬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때 함께 농구를 하던 친구들이라 종목 특성상 제법 키가 큰 편이다. A는 가장 큰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지만 제일 착하다. 예를 들어 농구시합 때 심판이 파울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A가 먼저 심판한테 가서 ‘저 파울했어요. 죄송해요.’라고 말할 정도다. 목소리가 굉장히 가늘어서 시합 전에 상대방의 기를 죽이기 위해 A에게 ‘너는 말하지 말고 인상만 쓰고 있어.’라고 항상 말했다. B는 몸무게에 비해 빠른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랐던 경험이 없었던 A에 비해 B는 말랐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본인은 아직도 꽤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추월을 당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C는 배우 마동석을 동경해서 덩치가 커졌다. 한참 운동을 할 때는 훤칠한 키에 적당한 몸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봤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느 날부터 프로필 사진이 마동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뒷장으로 넘기면 링거를 맞고 있는 사진, 그 뒷장에는 마동석의 팔뚝 사진, 마지막 장에는 귀여운 에비츄 사진이 있다.


― 난 다이어트 중이니까 이거 먹을게.

― 왜?

100kg 이상의 친구들은 80kg인 내가 왜 다이어트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일단 기름진 음식들 사이에서 혼자 저칼로리의 과일채소를 먹는다는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친구들의 기준에서 난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거나 마른 편에 속한다. 살이 쪄서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는 건 방울토마토에 이어서 그들을 더욱 자극하는 행위였다. 갑자기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 아… 치킨 먹고 후식으로 먹으려고.


상황이 진정되었다. A는 내 옆에 앉더니 포장마차처럼 오이도 같이 먹는 게 좋다며 나의 도시락통으로 손을 뻗었다. 두툼하고 통통한 그의 도라에몽 같은 손이 오이를 집었다. 전쟁물자를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계획이 어긋나자 그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오이가 장아찌였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모두의 앞 접시에 방울토마토가 놓여 있었다. 도시락통이 비워지는 것과 비례해 다이어트 의지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 너 카스여? 테라여?

― 난 테라.


내 앞 접시에는 닭다리 하나가 체형관리를 받은 것처럼 우아하게 놓여 있었다. 내가 먹을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니 어디선가 정적을 깨고 사자후가 들려왔다. 

― 위하여!

생각할 시간 따위 없었다.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위하여!’를 복창하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닭다리를 집어 입으로 넣었다. ‘오오…, 이 맛이야’


냉장고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던 신선한 냉장 닭, 꼼꼼하고 섬세한 밑간, 감시하지 않아도 매일 튀김기름을 교체해 식약처 안심가게 인증을 받은 것만 같은 정직한 사장님. 모든 게 고루 갖춰져 ‘치느님’이라 칭송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심 나의 도시락을 다 먹어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감자튀김, 치즈볼까지 먹고 나서야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계모임 비용으로 계산을 하고 하나둘 치킨집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만약 나에게 치킨값을 쏘라고 말했다면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누군가 말했다.

― 저쪽에 카스 생맥주 파는데 거기나 가보자.

A였다. 테라가 출시되기 전까진 난 카스를 좋아했다. 하지만 테라가 출시되고 난 후 테라의 구수한 맛과 향에 취향을 저격당했다. 그렇다고 카스의 청량감과 쏘맥으로 만들었을 때의 깔끔한 맛을 무시하진 않는다. 그래서 맥주를 단독으로 먹을 땐 테라, 쏘맥으로 먹을 땐 가끔 카스를 먹곤 한다.


― 여기 테라 생맥주로 파는데 이 옆으로 가자!

소신 발언을 했다.

― 그래!

누군가 대답했다. C였다. 그는 나와 맥주를 자주 먹었던 이력이 있는 친구로 내가 먹는 주종에 따라 맞춰주곤 했다.


카스를 원하는 A, 테라를 원하는 나와 C, 아무거나 술이면 좋다는 B. 결국 2:2로 볼링을 쳐서 내기를 한 뒤 이긴 팀에게 술값과 볼링비를 계산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A는 본인의 볼링공과 가방, 신발까지 갖춘 볼러다. 매우 큰 키를 이용해 엄청난 파워로 공을 밀어버린다. 하지만 조준을 잘 못해 가쪽 레일로 빠지는 확률이 50%인 파이어볼러다. B는 스핀을 좋아한다. 공을 신줏단지 모시듯 레일 앞으로 가져가 힘껏 손목이 뒤틀리도록 스핀을 넣는다. 느리지만 꽤 정확히 핀을 맞춘다. C는 아름다운 폼을 가지고 있다. 볼을 하늘 높이 올려 굴리는 게 프로와 유사할 정도로 굉장히 폼이 좋다. 하지만 점수는 제일 낮다. 마지막으로 나는 일직선 타법을 구사한다. 핀이 맨 우측에 있건 중앙에 있건 무조건 일직선으로 볼을 굴린다. 스핀이란 없다. 그렇게 우리는 볼링장으로 향했다.


A와 B, 나와 C는 마주 보고 앉았다. 신발을 대여하고 15파운드, 11파운드 등 각자의 무게에 맞게 하우스볼을 집었다. 팀 이름에 맞게 카스와 테라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놓았다.


첫판은 몸 풀기. 연습게임이지만 서로 탐색전이 시작되었다. A는 치킨집에서 술을 꽤나 마신 것 같다. 볼을 굴릴 때마다 ‘아씨’를 반복하는 걸 보니. 나 또한 일직선 타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손의 감각이나 스텝이 조금만 바뀌어도 볼이 대각선으로 흘러서 조준이 쉽지 않았다. 연습게임으로 대결 구도가 결정되었다. 나는 A를, C는 B를 마크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3판 2선승제 경기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A는 비장하게 분홍색 고글을 썼다. 300mm의 거대한 발로 한 스텝 한 스텝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팔에 힘을 줘서 앞으로 힘껏 볼을 굴리더니 첫판부터 스트라이크를 쳤다. A의 기선제압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기회를 잡아 득점으로 연결시키는 클러치 능력이 부족했다. 8개의 핀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B와 C는 비등비등하게 게임을 이어갔으며 결국은 나와 A가 어떻게 하느냐에 게임의 승패가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A는 기분이 좋았는지 게임을 하면서 꽤나 빠르게 카스를 마셨다. 한 번 공을 굴릴 때마다 야금야금 먹은 셈이다.


첫 번째 게임은 우리 팀이 패배했다. A의 점수가 유난히 높았다.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각자의 병을 집어서 건배를 했다. 그때 A의 병이 비어 있었다.

― 벌써 3병 마신 겨?

― 입이 심심해서. 그리고 어차피 우리팀이 이기면 너희가 살테니까.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A는 카스를 한 병 더 가져왔다. 선공은 C, 아름다운 폼을 보며 모두들 ‘와, 자세는 진짜 좋다.’라고 감탄을 했다. 하지만 자리로 올 땐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오늘따라 잘 안 된다’는 것을 몸짓으로 말했다. ‘평소보다 잘 되는 것 같은데….’


― 다음 턴 누구야?

― A 차례여.


A는 본인 차례를 잊어버렸다. 민망한 듯 빠르게 공을 집어 레일로 올라갔다. 7개를 치고 나서 1개를 마저 마무리한 A가 이상했다. 스텝을 지그재그로 밟더니 볼에도 힘이 없어졌다. 자리에 앉은 A는 고글을 벗고 눈을 비비며 맥주를 집어 한 모금 마셨다. ‘어? 좀 취한 것 같은데?’


C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 A가 취한 것 같은데, 이때 빨리 끝내자.

― 그래, 속도전으로 승부하자.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공을 굴렸다. 그러니까 공을 잡은 순간부터 볼을 굴리러 들어가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 스텝을 밟았다. 엄청난 속도에 A는 틀린 감을 바로 잡지 못한 채 두 번째 게임을 내주게 되었다.


마지막 게임이 시작되기 전. 5분간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한 번 쏘면 되지, 뭐 그렇게 비장하게 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친구들의 덩치를 생각한다면 1인당 2인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7명의 입이 있는 셈이다. 그때 C가 나에게 제안했다.

― 볼을 굴리고 내려올 때마다 ‘짠’을 하자. A를 더 취하게 만드는 거지.

지난 일들이 스쳐가듯 생각났다. 내 오이를 빼앗던 그 얄미운 손, 방울토마토를 두세 개씩 집어먹던 A. 미안하지만 굉장한 제안이었다. 

― 콜!


마지막 게임이 시작되었다. 

― 건배 한 번 하자!

― 위하여!


나는 스페어로 기분 좋게 선공을 했다. 하지만 B 또한 술값 내기 싫은 건 마찬가지일 터, 갑자기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변수가 생긴 것이다. 다행히 같은 편인 C는 자세가 좋아서 그런지 기복 없는 점수를 보여주었다. A의 차례, 비틀거리던 스텝을 바로잡고 편안하게 볼을 굴렸다. C와 나는 다시 눈이 마주쳤다. ‘뭐지? 안 취했나?’ 그러자 A가 말했다.

― 얌마, 나한테 맥주는 음료수여.


다시 차례가 돌아온 B를 보면서 깨달았다. ‘아, 이제까지 봐 준 거구나.’, ‘우리만 취한 거구나’

우리 팀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볼링장 비용을 계산하고 결국 카스 생맥주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다들 생맥주를 먹는 가운데 나는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나머지 테라 병맥주를 시켰다. 친구들의 볼링 후기가 오갔다.

― 와, 너 진짜 못 치더라.

― 자세만 좋으면 뭐하냐?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 이참에 장비 사서 볼링 동아리나 하나 만드는 게 어때? 볼링도 꽤 자주 치는데.

장비가 비싸긴 하지만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심심할 때마다 볼링장을 가곤 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승낙했다.


― 동아리 이름은 뭘로 하지?

― 음….

그때 보이는 생맥주 잔의 Cass와 병맥주에 써 있는 Terra가 나란히 있었다.

― Cassterra 어때? 어차피 너네 볼링치고 술 먹을 거잖아? 

― 오 좋다.


그렇게 야심차게 탄생한 카스테라. 그 이후 모두 볼을 제작하고 신발과 아대를 샀다. 매주 모여 볼링을 치자고 약속했다. 장비가 꽤 비싸긴 했지만, 거기에 드는 비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난제는 볼링을 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점. 매번 게임을 하면 게임비 내기를 하곤 했는데(내기를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서), 지는 사람만 지다 보니 결국 모임에 참가하는 횟수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명씩 ‘카스테라’를 탈퇴하고 이후 서로의 맥주 취향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이전 07화 패배의 또 다른 이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