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남들과 똑같이 진로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을지 고민을 하며 용돈벌이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잘하진 못하지만 그나마 좋아하는 게 운동이라서 헬스장 아르바이트를 선택했고 거기서 내가 한 일은 회원복 세탁, 청소, 전단지 돌리기 등 단순하고 기계적인 일이었다. 내 유일한 취미는 걷기였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귀찮기도 한 전단지 돌리는 일이 내겐 재밌는 일 중 하나였다. 단점이 있다면 해가 질 무렵 전단지를 다 돌리고, 헬스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보고 있을 때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는 것.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오래 걷거나 아버지가 사주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나를 위로했다.
똑같은 반복적인 삶이 몇 개월쯤 반복되었고, 평소와 다름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눈에 들어온 탁자 위에 있던 헬스매거진. 표지에는 헐크 같은 근육으로 한 페이지를 꽉 채우고 있는 외국 보디빌더들이 나와 있었다. ‘머슬맥’ 이라는 월간지였다. 자극적인 표지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서 한 페이지 넘겨보았다. 그 책에는 운동방법과 세트 수, 영양 정보 그리고 무엇을 언제 먹어야 하는지 나와 있었는데 아무런 정보 없이 운동하던 나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 일 하는 도중에 한두 권 신기하게 보다가 관장님에게 주의를 받아서 나중엔 숨어서 읽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는 몇 권씩 빌려서 집으로 갔다.
운동에 관심은 있었지만 영양에 대해선 전혀 몰랐기 때문에 신기하고 재밌는 내용들이 많았다. 운동과 영양은 뗄레야 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럼 ‘운동과 영양을 접목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과 함께 진로를 영양사로 정했다. 하지만 막상 두 가지를 어떻게 접목 시켜야할지도,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우리나라에서 운동선수들이 있는 곳이라면 태릉선수촌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곳에도 영양사님이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다음 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고 방향을 정할지 자문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기차에 올라타 태릉선수촌으로 향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태릉선수촌 입구에 도착했을 때, 선수들이 하나둘씩 선수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멀리 보이는 웅장한 오륜기와 높은 하늘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걸어가고 있는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경비실에서 나를 막아섰다. 어떤 용무로 왔냐는 말에 나의 상황을 설명 드리고 영양사님을 뵐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외부인은 출입금지라는 말에 결국 뵙지 못한 채 집으로 가게 되었다. 기차에 올라타 창틀에 팔을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까만 어둠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니, 왜일까. 가족들이 있는 따뜻한 집이 생각이 났다.
밤이 되어 대전역으로 도착한 뒤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3분 뒤면 도착한다는 버스 정류장 안내판을 실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오른쪽 발을 길게 뻗어 집을 향해 걸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걷고 싶었던 것일까. 집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는데 평소보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속도를 낮춰서 걸었다.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는 게 속상했지만, 지금 걷는 것처럼 내 발자국이 목표를 향해 한 걸음 걸어 나간 것이라고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쯤, 새벽 2시에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난 다시 서울로 향했다.
한번 봤다고 길이 조금 익숙해졌다. 첫 번째 관문, 경비실. 신호등 반대편에서 ‘어떻게 하면 저곳을 지나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며, 열 손가락을 엇갈리게 바짝 맞춰 깍지 끼고 비장하게 노려봤다. 신호가 바뀌고 경비실로 향했다. 다시 나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간절함이 조금 통한 것 같다. 인터폰으로 영양실에 연락을 해주셨다.
드디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인터폰을 들어서 말을 하려는 순간. 영양실에서 조금 짜증이 섞인 말투로 먼저 말씀하셨다. ‘아무런 연락 없이 찾아와서 이렇게 부탁하는 건 무례하다’.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괜히 경비아저씨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집으로 갔다. 차마 등을 돌려 걸어가지 못하고 태릉선수촌을 바라본 채 뒤로 걸어갔다. ‘그만 와야 할까’라는 감정보다는 ‘다시 올 거야’라는 다짐으로.
집으로 가는 동안 3일 뒤 기차를 미리 예매하면서 대전으로 향했다. 어떻게 하면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며 3일을 보내고, 이번엔 대전역을 가면서 성심당에 들려 튀김소보루를 두 상자 샀다. 그리고 다시 화랑대를 지나 태릉선수촌 입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망설임 없이 경비실로 향했다. 경비아저씨는 이제 나를 알아보시는지 한 번 더 영양실에 연락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감사의 의미로 튀김소보루를 한 상자 드리고, 인터폰을 건네받아 진로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영양사님은 결국 ‘자기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내려보낼 테니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 학생을 만나서 궁금했던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때 운동과 영양을 함께 다룰 수 있는 스포츠영양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양사 면허증을 취득하고 실무경력이 1년 이상 되면 스포츠영양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정보도 얻게 되었다. 추가적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메일을 보내라고 주소를 주었다. 감사의 의미로 나머지 한 상자를 드리면서 그 학생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결론은 영양사 면허증을 취득하기 위해 식품영양학과로 대학진학을 하는 게 우선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또래보다 늦게 식품영양학과라는 전공을 가지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운동과 공부를 병행했고,
똑같은 생활 속에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던 어느 겨울방학에, 학교 도서관에서 전공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있었다. 여러 권 보던 중에 저자가 계속 겹치는 분이 있었다. ‘현장에 계신 유명한 분일까?‘
전공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여쭤보고 싶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정보를 찾아보니 서울에 위치한 한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겸임하고 계셨다. 그 대학에 있는 같은 과 교수님께, 학교 사이트에 적혀 있는 주소로 메일을 보내 ‘저자’ 분의 메일주소를 알려주실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서로 가까운 사이라며 공부 열심히 해보라는 말씀과 함께 메일주소를 알려주셨다. ‘저자’ 분께 당장 메일을 보내 스포츠영양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고, 실례가 안 된다면 뵙고 싶다고 전했다. 그러자 날짜를 정해주시면서, 오후 8시에 이대목동병원으로 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2월 10일. 이대목동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대한영양사협회에서 스포츠영양사 교육을 받은 분들이 이곳에서 스터디모임을 하고 있으니, 오늘 한번 같이 공부해보라고 하셨다. 자기소개와 간단한 인사를 한 뒤 공부를 하는데,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현장에서 필요한 실무적인 것들이었고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날, 감사하게도 나를 예쁘게 봐주셨는지 여기서 매주 스터디모임이 있으니까 와서 공부해보라고 하셨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1년 동안 학교가 끝나면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스터디를 하고 대전으로 다시 내려왔다. 대전에 도착하면 자정이 되었는데, 막차도 끊기고 벌이가 없었던 시기라 택시를 타기엔 부담스러웠다. 난 항상 2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걸어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졸업할 시기가 다가왔고, 몇 년 동안 했던 공부들을 바탕으로 국제대회의 영양 담당 업무를 맡게 되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벚꽃이 떨어지는 어느 날, 이대목동병원으로 나를 초대한 박사님께서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어디로 가면 되는지 여쭤보았는데 그분께서는 ‘태릉선수촌’으로 오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내가 예전에 세 번을 찾아가도 못 뵈었던 ‘영양사’ 분이었다.
태릉선수촌 입구에 도착하고 나서 오래전 들어가지 못했던 기억 때문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경비아저씨가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하고 계셨다.
기분이 참 묘했다.
그때는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일하러 갈 수 있고 놀러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정년을 앞두신 태릉선수촌 영양사님과 지금도 안부를 주고 받으며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 것 같다.
할까 말까 생각했을 때, 그것을 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차이는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귀찮아서 메일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태릉선수촌을 향해서 한 발 더 내딛지 않았더라면, 난 이런 기회들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