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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란 Oct 20. 2023

내 인생에 엑스트라

군대를 갓 전역했을 때 잘하는 것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던 시절, 꿈은 없었지만 무언가를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 가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무작정 짐을 싸서 서울로 향했다.


대전에서 만 원이면 서울까지 갈 수 있었던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뒤 편의점 ATM기 앞에서 나의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나에게 있던 돈은 전역하자마자 학원에서 서무 아르바이트를 하며 급하게 모은 돈 46만 3천 원.


그 돈으로 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PC방에서 인터넷을 통해 보증금이 없는 고시텔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월 35만 원에 밥과 김치가 제공된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보았다. 그렇게 한 고시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난 뭘 해야 할까?


할 게 없어서 우선 지하철로 향했다. 내가 아는 곳이라고는 서울역, 용산역, 영등포역 등 대전에서 올라와 내렸던 곳이 전부였다. 고시텔에서 가까운 4호선 지하철 노선도를 쭉 보면서 어느 역에는 무엇이 있는지 검색해보았다. 그중 눈에 들어온 곳은 혜화역. 대학로라 해서 대학교가 있을 것 같고 왠지 내 또래들이 많을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할 게 없었던 나는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따라가다 보니 말로만 듣던 소극장이 있었다. 낯선 곳이지만 흥미로웠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도, 공연을 홍보하는 또래같이 보이는 사람들도, 벤치에 앉아서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마저 서울이라 그런지 신기하고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특히 밤이 되면 그런 기분을 자주 느꼈는데, 오후 다섯 시면 하루를 정리할 준비를 하는 나와는 달리 여기 있는 청춘들에게는 마감이라는 끝이 없어 보였다.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늦은 밤이 되어도 낮보다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대학로 근처에 큰 공원도 자주 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은 마로니에 공원이었고 걷다가 지치면 그곳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궁금했다. 이 친구들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어떤 꿈을 가지고 사는지. 그렇게 몇 주 정도 대학로를 돌아다녔다.


방값을 다시 내야 할 시기가 와서 잔고를 확인해보니 돈이 없었다. 내가 소비한 것이라고는 편의점에서 몇 끼 때운 것과 교통비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하루 일하면 일당을 주는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고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곳은 이벤트 업체. 타지로 이동 해야 했다.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까지 가서 2박 3일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이 일하는 내 또래의 동료와 함께 일과가 끝나면 동네 PC방으로 가서 스타크래프트를 2:2로 팀플레이 하면서 우정을 쌓았다.


차에 설치된 장비들의 세팅을 도와주고, 짐을 나르고, 심부름을 하다 보니 금세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동료가 스타렉스를 운전하고 내가 조수석에 타 이른 저녁쯤 서울로 향했다. 서로가 조금 편해졌을 때쯤, 그리고 운전을 오래 해 지루해질 때쯤에 동료에게 물어봤다. 왜 아르바이트를 하냐고, 꿈이 뭐냐고.

 

동료는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학비를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꿈은 아직 없다고 대답했다. 뚜렷한 목표와 방향이 있었을 것 같았는데 의외의 답변이었다. 학벌을 떠나 내 나이에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고민이었고 난 그것을 찾으러 서울로 왔다는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철역에 도착해 헤어질 때가 되었다. 다음에 업체에서 불러주면 또 만나자고 하면서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우리는 아쉽지만 각자의 길로 향했다.


다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영화 엑스트라 역할이었다. 영화 촬영의 특성상 여러 지역을 다녔었는데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촬영지가 어딘지 몰랐지만, 세월이 흐르고 여행을 갔을 때 ‘아! 여기 아르바이트 왔던 곳인데?’ 하는 장소가 꽤나 있었다.


여행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승합차를 타면서 처음 보는 풍경들과 생소한 지역들이 신기하고 새로웠다. 엑스트라 역할은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 행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간 장면이었는데, 돗자리 하나당 세 명의 엑스트라들이 앉아 있었고 배우들이 멀리서 연기를 할 때, 우리는

“누구지? TV에서 본 적 없는데”

“신인인가?”

“배고픈데 햄버거 좀 더 주지.”

등의 잡담을 하곤 했다.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는 기다리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서너 시간을 기다린 적이 많았다. 그래서 집에 오는 시간이 늦은 밤일 때가 많았는데 저녁 10시면 잠을 자던 나의 생활 패턴도 어느덧 바뀌어갔다.


늦은 밤 지하철을 타고 미아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시텔로 올라가는 언덕에서 까만 하늘과 밝게 빛나고 있는 가로등을 보며 항상 되뇌었다.

‘내가 보내는 이 시간, 헛되지 않기를…’


엑스트라 아르바이트가 없었을 땐 방송국에서 방청객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청객 아르바이트는 최저시급보다 적게 받았지만 TV프로그램을 실제로 보면서 연예인도 보고 좋았다.


방청객 아르바이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리액션이다. 그걸 못 하면 반장이 주의를 줄 정도였는데, 난 워낙 리액션도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라 남들이 웃을 때 입만 벌렸다.


방송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방청객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특히 말수가 많은 연예인들이 출연한다고 하면 ‘오늘도 늦게 끝나겠구나’ 일단 각오부터 하게 됐다.


방청객 신분으로 방송국 실내와 주변 구경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주중에는 그렇게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주말은 여유롭게 산책을 하거나 대전으로 내려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그 시기에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형들이 있었다. 세 명의 형들은 개그맨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고시텔 생활이 지루할 땐 홍제동에 있는 형들한테 놀러가곤 했다. 옥상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소주도 한잔하면서 형들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는데 ‘내일은 어떤 개그를 짤까?’, ‘아까 그거 웃겼는데 한 번 해볼까?’ 등 끊임없이 개그에 대한 생각과 상황극을 했다.


“내년에 꼭 개그맨 공채 합격할 거야.”

“어떤 선배는 이렇게 연습했다던데 우리도 한 번 해볼까?”

“기다려봐, 작년보다 올해가 좋았으니까 내년엔 꼭 될 거야.”

“내가 진짜 재밌는 코너 짜온다.”


내 기억에 형들도 좋은 형편은 아니었다.

더운 여름날, 인형 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꺼운 옷을 입는 엑스트라를 하면서 월 20만 원인 원룸에서 지냈다. 그런데 술을 한잔하는 날에는 꼭 자고 가라고 하거나 만원 몇 장 쥐여주면서 택시 타고 도착하면 꼭 연락하라고 했었다.


항상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하며 개그맨이라는 꿈을 향해 달리던 사람들이었다. 점점 같이 있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운동도 하며 일 년이란 시간이 흘러 개그맨 공채 날짜가 다가왔다.


세 명 중 두 명은 2차에서 떨어지고 한 명이 KBS 공채 최종까지 가게 되었다. 그래서 떨어진 나머지 동료들과 얼떨결에 나도 최종 오디션을 도와주게 되었다.


같이 개그를 하던 동료들은 각자의 역할을 맡아 오디션을 도와주었고 나는 라디오를 틀어주는 역할을 했다. 내가 라디오를 틀면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개그를 했는데, 라디오 버튼만 누르면 되는 역할인데도 굉장히 떨렸다. 얼마나 간절하게 준비했는지 알기 때문에.


개그콘서트 PD와 몇몇 방송 관계자들 앞에서 개그를 했고 잘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모습의 형을 보면서 물어봤다.


“형, 잘된 것 같아요?”

“심사위원들이 생각보다 안 웃어서 당황스럽네.”

“형은 어떻게 개그맨이라는 꿈을 갖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재밌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개그맨 해보라는 권유를 많이 받아서 해보게 되었지. 이것저것 해보다가 이게 제일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


세 명의 형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꿈이라는 건 갑자기 ‘딱!’ 생기는 게 아니다.

많은 것들을 보고 또 많은 것들을 경험해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는 것이라고.

찾지 못했다면,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해보면서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형은 그해에 최종면접에서 떨어졌지만 자주 가던 횟집에서 소주잔을 들며 나에게 말했다.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아, 왜냐하면 내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왔기 때문에”


우리 둘 사이에 ‘짠’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소주를 들이키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난 내년에 또 도전할 거야.”


어느덧 겨울이 찾아왔고, 시간이 지난 뒤 서울에서 나의 꿈은 찾지 못했지만, 그 시기에 꿈보다 더 값진 경험을 얻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왔다. 수많은 경험과 배움들이 나의 꿈을 찾아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하지만 아직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나는 뒤에 가려진 엑스트라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을 찾는 과정이 나를 점점 주인공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인 것 같다.     

그리고 난 아직도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이 말을 되뇌인다. 

‘내가 보내는 이 시간, 헛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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