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란 Oct 20. 2023

충전이 필요합니다

냉동실 맨 밑 칸 가장 왼쪽, 얼음 틀 아래에 습관처럼 캔맥주 하나를 놔둔다. 냉장고에 있던 캔맥주도 충분히 시원하지만 냉동실에 20분간 넣어두면 더 차갑게 마실 수 있어서다. 일이 힘들 때 찾는 맥주인데 오늘도 망설임 없이 맥주캔을 딴다. 몸에는 해롭다는 걸 알고 있지만 퇴근 후에 이런 낙이 없다면 정신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그 핑계로 한 캔 더 마시고 잠이 든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하루가 되길 바라면서.


다음날,

집을 나와서 붐비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내려 직장으로 걸어가는 길. 담장 너머 초등학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저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와 ‘하…’ 소리와 함께 커피를 내리고 있다. 어제 나의 바람과는 달리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어쩌면 평범한 수요일에,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게 당연하지만 월급날처럼 특별한 일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는 발소리들, 발소리만 들어도 안다. 먼저 막아내야 할 급한 업무다. 역시 다른 일부터 처리하게 되었다. ‘빨리 내 업무 해야 되는데…’


내가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서류들은 선임이 보기엔 항상 마음에 안 든다. 그리고 나에게 한 수 보여주듯, 내가 1시간에 걸쳐서 했던 작업들을 10분 만에 해버린다. 답답하면서 안쓰러운 듯 나를 쳐다보며 ‘나 같은 시절이 있었다고’ 가끔 말해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면서 타 부서 사람들을 마주친다. 왠지 모르게 나 빼고 다 잘 지내는 것 같고 즐거워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할 말은 없지만 일부러 편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시간을 때워 본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시작된 업무. 오후의 시작을 알리듯 책상에는 커피가 하나씩 놓여 있다. 커피 브랜드만 봐도 저 사람이 점심시간에 어디에서 점심을 먹고 왔는지 알 수 있다. 오후 일과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오전에 끝내지 못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못 하면 오늘 일이 내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길어 보이는 오후 시간이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사방에서 사정없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들은 마치 칼퇴를 다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나름 일의 순서도 생각하고 시간에 맞춰서 할 일도 정했다. 출발선에 서 있는 달리기 선수처럼 비장하게 일을 시작한다. 내 계획대로라면 퇴근 10분 전까지 깔끔하게 일을 끝내놓는 것.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주변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얼마나 지났을까, 상대에게 내 패를 읽힌 듯 여기저기서 다시 업무 전화가 걸려온다. 왜 항상 일은 엎친 데 덮치는 것일까. 선임의 말을 빌리자면 원래 일이 그런 것이라 하는데 왜 그런지는 사회초년생인 내겐 조금 더 쉬운 설명이 필요했다. 오후의 사무실은 각자의 업무, 회의, 통화가 오가면서 어수선해지지만 그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 만들어진 백색소음 덕분에 나도 무언가를 집중하게 된다.


어느덧 모니터 하단을 보니 오후 4시가 되어 잠시 밖으로 나왔다. 사람만 만나면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커피는 하루 두 잔으로 제한했다. 대신 자판기에서 왠지 몸에 좋을 것 같은 비타민워터를 뽑아 볼에 한 모금 볼록하게 넣어보았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10월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고 작년 가을엔 뭐 했을까 회상해본다. 어렸을 적 가을이라는 계절은 나에게 1년이 지나간다는 기분이 들게 하여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곡식을 수확하는 농부들처럼 나도 일 년의 성과를 수확하는 계절로 느껴진다. 그만큼 풍요로울 때도 있지만 쓸쓸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들어가서 하루를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내일이 걱정되지만 오늘은 일을 내일로 미뤄놓고 싶은 날이다. 앞자리에 마주하고 있는 선임의 눈치를 보면서 집에 갈 타이밍을 잡아본다. 오늘은 다행히 일찍 집에 가는 선임을 보내고 나도 재빠르게 뒤따라서 집으로 향한다.


직장이 다행히 버스정류장 근처라서 집에 갈 때만큼은 앉아서 갈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옆자리에 사람들이 앉는 걸 싫어해 높은 맨 앞좌석에 올라타 앉았다. 퇴근 후엔 세상과 단절하고 싶은 마음에 에어팟을 꺼내 귀에 밀어 넣었다. 맨 앞자리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시야가 넓어서 차가 밀릴 때를 제외하고는 지루하진 않다. 좋아하는 음악 장르가 없어서 유튜브로 최신음악 TOP100을 틀어놓고 붐비는 퇴근시간을 보내본다.


1시간 만에 하차벨을 누르고 좌석에서 내려와, 양손을 들어 손잡이를 하나하나 건너 잡으면서 출입문으로 향한다. 하차를 위해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찍는 순간 ‘충전이 필요합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괜스레 혼자 주변을 의식한다. 나를 포함한 승객 네다섯 명이 탈출하듯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겉옷으로 나를 동이며, 이런 날씨에는 왠지 술이 한 잔 또 생각이 난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일할 때 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한다. 

‘오늘은 안 먹기로 했는데…’, ‘오늘은 먹고 내일부터 먹지 말까…’

고민하다 발걸음을 멈춰보니 집 앞이다. 마치 나만의 루틴이 된 듯 냉동실 맨 밑 칸 가장 왼쪽, 얼음 틀 아래에 다시 맥주를 넣어두고 씻으러 들어간다.


올해는 남들에 비해 아무것도 수확하지 못했다고 생각이 드는 쓸쓸한 가을밤. 오래전부터 ‘여러 개를 잘하는 것보다 하나를 잘하자’라고 생각은 하면서 그 ‘하나’를 위해 무엇을 노력했을까. 샤워를 하고 나와 냉동실을 열어 차가워진 맥주를 꺼내고선 가만히 냉장고를 바라본다. ‘하나라도 잘하는 냉장고가 부럽다’

이전 13화 꾸준한 오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