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50분, 퇴근 10분 전이다. 오늘은 10분 일찍 나와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운 좋게 3분이 남았고 그 시간 동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변수가 하나 생겼다. 멀리서 걸어오는 다섯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무리. 내 예상대로라면 정류장 의자에 앉아 계시다가, 멀리서 버스가 보이면 일어서서 먼저 온 사람과 늦게 온 사람 순서 없이 탑승할 것이다.
내가 꼭 앉아서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집까지 한 시간 반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나는 버스 타는 노하우가 있다. 바로 위치선점이다. 농구에서는 박스 아웃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바로 골 밑에서 몸싸움을 해서 좋은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이다.
몇 년간 버스를 타면서 터득한 위치선점 조건
첫 번째, 버스기사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멀리서부터 버스를 주시하면서, 나였다면 ‘이때쯤 브레이크를 밟아서 속도를 줄인 다음 여기에 정차하겠지?’라고 예상해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버스가 다가올 때 앞뒤로 다른 버스가 있는지 확인한다. 내가 탈 버스보다 앞에 다른 버스가 있다면 뒤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지키고, 뒤에 버스가 따라오고 있다면 앞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확보한다.
마지막 세 번째, 버스가 다가왔을 때 버스기사님과 눈을 마주친다. 진심으로 좌석에 앉아서 가고 싶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운 좋게 내 앞에 바로 멈추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맥주를 잔에 따랐는데 거품이 넘칠 듯 말 듯 할 때, 잔을 노려보고 있으면 넘치지 않는 것처럼 간절하게 보고 있어야 한다.
내 예상대로 버스가 다가오자 아주머니들이 우르르 앞으로 몰려들었고, 뒤에 버스가 따라오고 있어서 약간 앞에 자리를 선점함으로써 맨 먼저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야가 넓은 맨 앞자리에 올라타 앉았다.
맨 앞자리 좌석에 타면 크게 지루하진 않다. 음악을 들으면서 앞에 보이는 차들을 구경할 수도 있고, 저녁에 뭐 먹을지 고민을 하기도 한다.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들어오는 사람들. 버스카드를 단말기에 찍으면 남은 잔액이 보인다. 내 버스카드 잔고가 없을 땐 ‘저 사람 거랑 바꾸고 싶다’라는 마음이 든다.
막히는 퇴근길에 버스전용차로로 쌩쌩 달리는 버스를 타고 있으면 약간 시원한 기분이 든다. 거기에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같은 노선의 버스기사님들끼리 손 인사를 하면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배가 많이 고파질 때쯤 도착한 우리 동네.
마트에 들러서 저녁메뉴를 고민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밝은 조명과 함께 들리는 음악. 중년의 관장님이 운영하는 헬스장에서나 들을 수 있는 듯한 그런 음악인데 장르 불문, BPM을 높게 하고 묘하게 리믹스해서 내적 댄스를 일으킨다. 특히 절절한 발라드를 리믹스 해도 신나는 댄스곡이 되는 기적을 만들곤 한다.
마트에서는 싱싱한 채소들도 좋지만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재료들을 사는 것도 가성비가 좋다. 찬물에 넣어두어 심폐소생술을 하면 살아나기 때문이다.
물건을 집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결국 선택한 건 맥주 한 묶음과 팩으로 된 작은 소주. 오전에는 계획에 없었지만 오후만 되면 생기는 나와의 술 약속. 병으로 된 소주는 왠지 내가 술꾼 같아 보일까 봐 양이 적고 비싼 팩으로 사곤 한다.
겨울이라 금방 어두워진 언덕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저 멀리 집에 도착했다고 알리듯 노란색 가로등이 나를 반긴다.
예전 같았으면 사람들과 어울려 저녁을 보냈을 텐데, 점점 싫고 피곤한 것들을 억지로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 익숙하지만 사소한 나만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아주머니들을 밀어내며 투쟁심을 보였던 것처럼 오늘도 나는 보이지 않는 적을 등진 채로 내 영역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