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외국어 하나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백화점 지하에서 함께 오렌지 주스를 팔던 같은 아르바이트생 신분의 두 살 많은 형이 나에게 말했다. 스물 중반의 나이. 그는 취직 전까지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거라는 포부를 밝혔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오렌지를 기계로 착즙해 팔았다. 물 한 방울 들어가지 않은 오렌지 주스였고 대략 3개에서 5개의 오렌지로 만들어졌다. 200ml 정도 되는 사이즈의 플라스틱 병에 담아 팔았고 가격은 3500원이었다. “한 병에 3500원, 세 병에 1만 원입니다!”,“ 100% 오렌지 주스입니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백화점 지하 속의 에스컬레이터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왠지 나도 영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등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며칠 뒤, 아르바이트를 하는 백화점에서 가까운 영어학원을 찾아갔다. 건물을 올려다보니 영어학원뿐만 아니라 많은 학원들이 있었는데, 난 왜 학창시절에 이런 학원을 다녀보지 않았을까. ‘어릴 때 영어 좀 할걸’ 후회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상담을 받아보니 수준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여러 가지 반이 있었고 레벨 테스트를 한 뒤 성적에 맞춰 추천을 받았다. 역시 Beginner 반에 입문하게 되었고, 내 나름대로 나를 Super beginner라 칭했다. 언젠가는 최고레벨에 오르겠다는 다짐과 함께 등록을 요청했다.
“몇 시 수업 들으시겠어요?”
“아, 시간을 생각 안 해봤는데….”
마감을 하고 나오면 밤 9시라서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 6시 수업을 등록하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30분은 이동해야 해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 준비했다. 어제의 다짐과는 달리 추운 겨울이라 이불 속에서 나오는 것부터 위기였다. 무거운 짐을 품에 안고 있는 것처럼 기어이 일어나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와 영어학원으로 향했다.
한국인 선생님, 나와 수강생 2명. 총 4명이 새벽잠을 설치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어… H, Hi.”
내 자기소개는 그것으로 끝났고 속이 울렁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유창한 발음은 아니지만 무언가 들릴 듯 말 듯한 말을 이어 나갔다. ‘저 사람들은 한 단계 위에 반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선생님은 아는 영어 단어가 없는 만큼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버린 나를 발견했다. 감사하게도(?) 갑자기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해주었다. 나에겐 그 질문들이 공격을 퍼붓는 것처럼 느껴졌고 단답으로 끝나는 나의 답변들에 선생님도 당황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허리 한 번 굽히지 못하고 꼿꼿하게 세운 채 긴장 속에서 50분이 지나갔다.
오전 7시 20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학원을 나오는 나의 모습이 왠지 뿌듯했다. 깨어 있는 정신상태로 헬스까지 하고 아르바이트를 가니 더욱 뿌듯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형에게 말했고 오늘의 뿌듯한 기분을 전달하고 싶었다. 첫날이지만, 어쩌면 첫날이기에 가능했던 질문을 했다.
“나중에 외국인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할 수 있겠죠?”
“백 프로 안 돼! 그건 다시 태어나야 해.”
사실 형의 영어 실력은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 말이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백…, 백 프로요?”
오렌지 주스를 팔면서 하루에 수백 번 백퍼센트를 외치지만 그 단어가 한 순간에 낯설어졌다.
내가 말한 ‘외국인처럼 유창하게’ 란 틀리지 않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말한건데, 그게 ‘백퍼센트’와 같은 의미였다. 내가 팔고 있는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렌지 주스가 새삼 완벽하게 느껴졌다. 한국어가 물이고 영어가 외국어라면 현재의 내 상태는 오렌지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불량식품 정도의 주스 정도 일 것이다.
출근을 하던 어느 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데 멀리서 노란 머리의 외국인 여성이 보였다. 외국인이 한국에 지금보다 많지 않던 시절이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 순간, 혹시라도 말을 걸까봐 피해버렸다.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나에게 말을 걸었다. 길을 묻는 것 같았는데, 맥도날드만 들렸다. ‘백화점 뒤에 있는데 뭐라 해야 하지….’ “umm…, umm…, follow me!” 결국 내가 앞장서서 맥도날드로 향했지만 왠지 끌려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외국인이 맥도날드로 들어간 뒤에 이마를 ‘탁’ 치면서 “아씨, 어려워”를 계속 반복하며 출근길로 돌아갔다.
이 주 뒤 월요일 새벽, 역시나 같은 자리에 모인 사람들. 그런데 한 명이 사라졌다. ‘일어나지 못한 건가?’ 수업이 끝나고 형에게 말하니 “원래 영어학원이 그래, 사람들이 자꾸 사라져,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해.” 라고 말했다. 삼 주가 지난 뒤에는 선생님과 나, 단둘이서 수업을 할 때도 있었다. 나는 할 말도 없고 할 수 있는 말도 없어서 불편했는데 선생님은 이러한 상황이 익숙한 듯 핸드폰도 봤다가, 말도 걸었다가, 책도 봤다가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주가 다가오니 결국 나 혼자 남았다.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처음 한국말로 입을 열었다. 다음 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초반에는 출석을 잘하다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한 명도 오지 않는 날에는 본인도 집에 가서 쉰다고 했다. 나 역시도 다음 달은 등록하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을 듣고 학원에서 나오는 길. 생각보다 ‘100퍼센트’를 위해 꾸준히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지루한 일이고 어려운 일이기에 꾸준히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다. 꾸준함이란 나에게 오렌지 같은 단어다. 오렌지 하나하나가 모여 한 통의 오렌지 주스가 되는 것처럼 내 인생의 ‘백퍼센트 오렌지 주스’를 만들기 위해 또 다시 무언가를 도전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