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gnes Mar 22. 2024

유니버스, 등장인물, 우리의 서사

나의 유니버스의 중심

당연한 말이지만 유니버스에는 등장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의 유니버스에는 등장인물이 좀 많다. 3개월 단위로 바뀌기 때문이다. 3개월마다 적게는 30명 많게는 50명의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나의 세계에 들어온다. 1년이면 120명이다.


3개월마다 한 급이 마무리되는데 그럼 우린 작별한다. 매우 슬퍼하며 눈물 지을 때도 있고 매우 안도하며 홀가분해서 미소 지을 때도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는 건 매우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지만, 딱 3개월만 계약한 인연이라는 건 때로 많이 섭섭하다. 그리고 무기력해진다.


학생들과 길게 연락이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한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끼리도 연락을 주고받고 사는 건 힘든 일인데 하물며 말도 다르고 훨훨 나비처럼 살아가는 학생들의 경우라면 말해 뭐 할까. 유학을 선택한 사람들은 (평균 이상으로) 진취적이고 개척적인 성향인 경우가 많다. 학생들은 이 나라 저 나라 잘도 다니고 이 계획 저 구상 매우 유연하게 산다. 나중에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그저 놀고먹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은 매우 주체적인 그들이다.


여러 개인 생활 침해 문제, 개인 정보 문제 등으로 학생들과의 연락에 오픈 프로필을 쓰게 된 지 벌써 몇 년이다. 자연스레 학기가 끝나면 나와 그들의 연결 고리가 끊긴다. 이게 매우 깔끔하다 싶으면서도 섭섭하기도 했었기에 나는 작년에 인스타를 만들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더 있었는데 어쨌든 그랬더니 꼭 연결될 학생들은 인스타를 통해 연결이 된다. 얼마 전 동료 선생님께서, 예전에 현지 파견돼 가르쳤던 대학생들과 다시 만났는데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고 하셨다. 그사이 20대 청춘들이 중년에 접어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인연이 이어졌냐 물으니, 페이스북 덕분이라고 한다. SNS는 순기능도 있었다.


SNS 덕분에 고향에 다녀와 다시 공부를 재개한 학생도, 내가 한글을 가르쳤는데 이제 한국어 고급 학습자가 된 학생도, 고향에 돌아가 열심히 살면서 한국어를 잊지 않고 있는 친구도, 종종 다시 연락이 된다. 그럴 때 나는 마치 동창을 만난 것처럼 기쁘고 반갑다. 잊고 있었고 가끔 생각이 났지만 다시 만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서로 아는 존재. 비록 직접 얼굴을 볼 수는 없겠지만(아니 아주 가끔은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하겠지) 다시 만나면 반가운 사람. 세상 어딘가에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 존재들이 있다니, 내가 그런 존재가 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얼마 작년 여름에 가르쳤던 학생들이 우르르 찾아왔다. 학생들은 깜짝 이벤트라며 내 책을 내밀면서, 사인을 해 달라고 삐약삐약 아우성 대며, 웃고 또 웃었다. 내가 가르칠 때 학생들은 한국어 초급이었는데, 어느새 고급 학습자들이 됐다. 뭘 물어도 한 문장으로 답했던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몇 초 후 대답했던 학생들이, 이제 핑퐁 핑퐁 수다를 떤다. 와, 세상 신기했다.


책에 사인을 하는 동안 학생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선생님, 우리 이제 한국어 잘해요?" "우리 한국어 실력 어때요?" "선생님, 도현이는 아직도 선생님 말 잘 들어요? 몇 살이에요.?" "서점에 갈 때마다 선생님 책이 다 팔렸더라고요. 베스트셀러예요?"


내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니기 때문에, 종종 재고가 없는 지점들이 있다. '재고 없음'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이 친구들, 내 책이 너무 인기 있어 다 팔렸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너무 웃겼지만 맞다고, 선생님 책이 좀 인기가 많다고, 잘난 척을 하며 함께 웃었다.


도현이의 안부를 묻는 내 학생들, 도현이 많이 컸다며 기특해하는 그들, 나의 인생의 서사를 함께하는 그들, 나에게 그들의 인생 서사를 보여주고 말해주는 그들, 나의 첫 책의 독자가 되어준 그들, 내가 저경력에서 고경력 교사로 변신하기까지 나를 도와준 그들.


학생들은 나에게 친구이고 동료이고 선생님이고 기쁨이고 슬픔이다. 나의 유니버스의, 중심이다.


이전 10화 밥과 마음의 역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