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샘 밀스 <돌보는 사람들>
샘 밀스 <돌보는 사람들>을 읽고
돌보는 사람들 The Fragments of my Father: A memoir of madness, love and being a carer. 책방에서 이 책을 봤을 때, 그저 아버지를 돌본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원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조현병을 앓는 아버지를 돌보는 이야기다.
샘 밀스의 저작 <돌보는 사람들>에는 ‘버지니아 울프, 젤다 피츠제럴드 그리고 나의 아버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조현병을 앓고 있고, 버지니아 울프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인) 젤다 피츠제럴드도 조현병을 앓았다. 현재 딸의 돌봄을 받고 있는 작가의 아버지처럼, 두 문인은 평생 배우자의 돌봄을 받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랬다.
김완 작가는 추천사에서 ‘돌보는 행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소설가의 눈으로 사려 깊고 우아하게 성찰한 책’이라고 썼다. 지금도 그렇지만 울프 부부, 피츠제럴드 부부가 살았던 당시에는 조현병 환자를 돌보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조현병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부족해서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내 모든 돌봄의 핵심이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를 돌보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간병인(carer)으로 불리기 시작한 본인의 역할에 당혹감과 피로감을 겪는다. 나를 키워 준 내 부모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식 양육과 부모 돌봄은 너무나 달라서 “양육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선택이지만, 돌봄에선 돌봄이 나를 선택(돌보는 사람들, 169쪽)”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영국 사람인데 “영국에서 59세 여성이 돌봄 제공자가 될 확률은 50 대 50이고, 남성이 돌봄 제공자가 될 확률이 50 대 50이 되는 것은 75세일 때다(244쪽).”라고 쓴 것을 보면, 돌봄의 핵심이 여자라는 사실은 시공간을 넘어가나 보다. 작가의 가족 또한 “만약 어머니-돌봄의 여왕인-가 어떤 이유로든 돌봄 의무를 수행할 수 없으면, 집안의 다른 여성이 대신하는 것을 당연시(247쪽).”했고 “자신을 맨 마지막에 두는 게 엄마의 습관이 됐다. 이런 태도에는 돌봄이 순교로 흘러갈 위험이 도사린다(178쪽).”라고 썼다. 돌봄의 끝이 순교라니. 두렵고 위험한 결말이다. 아마 가족 중 누구도 이런 결말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 중 누군가 아프면, 가족의 삶은 정지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야속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내 시어머니가 한동안 입퇴원을 반복하실 때, 나는 한 계절을 뭉텅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가을, 단풍 진 산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가을이 갔구나, 어머니의 병환과 함께. 작가는 “아버지가 입원한 지난가을 수개월 동안 내 삶은 유예되었다(18쪽)”고 말한다. 일도, 사랑도, 일상도. 하지만 견뎌야 하므로, 일에 매진한다.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로 남은 에너지가 더 적은데도 나는 작업 시간을 늘려갔다-비극이 아닌 데로 주의를 돌리는 방법(149쪽).” 슬픔과 고민을 잊으려 일에 매진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시도해 보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상한다. 작가도 그것을 알아서, “나는 나 자신만 빼놓고 모두를 돌보고 있었다(354쪽).”라고 말한다. 알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돌봄은 버겁다. 그래서 작가는 “죄책감, 양심, 중압감, 애정으로 뒤범벅된 감정이 나를 몰아갔다. 마음 한편에서는 기꺼이 감당하려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저항했다(127쪽)”라고도 말한다.
가족을 돌볼 때, 가족의 보호자가 되었을 때, 함께하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그 외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은 대개 의료인, 그리고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환자의 보호자다. 검사실 방사선사의 짧은 말 한마디에, 옆 침대 보호자의 안부 인사에, 그날 하루를 견딜 수 있게 된다. 얼마 전 내 아버지의 병원 생활 중에, 그날 하루 내 끼니를 물어 준 사람이 옆 침대 할머니 한 분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날, 나는 깊이 피곤했고 깊이 외로웠다. 작가에게도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 외로운 간병인의 삶. 의료진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곳곳에 나타난다.
책에서 작가는 두 문인 부부를 탐구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울프 부부, 그리고 젤다 피츠제럴드와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울프 부부는 해피엔딩이었고 피츠제럴드 부부는 새드엔딩이었다. 나는 작가가 탐구한 울프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부란 무엇인가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부모 돌봄과 배우자 돌봄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는 “지면 위에 사랑과 헌신을 쏟아 놓으며, 자신은 그녀를 위해 ‘복무하는’ 사람이라고 선언(107쪽)”하고 버지니아 울프는 “우리보다 더 행복했던 두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166쪽)’라고 말한다. 조현병과 함께 했지만, 잦은 입퇴원을 반복했지만, 부부는 부부로서 잘 살아냈다.
작가는 아버지의 간병을 지속하려면, 수입이 큰 문제라고 지속적으로 말한다. 간병에 집중하면 밥벌이가 정상화될 수 없고, 그렇다면 수입이 정상화될 수 없으니 간병을 지속할 수 없다고. 그리고 ”전업 간병인의 수입은 최저임금에 못 미친다. 간병인 대부분이 돌봄과 풀타임 근무를 병행하며 가난 대신 탈진을 선택(417쪽)“ 한다고.
최근에 어머니께서 대학병원에 열흘쯤 입원하신 일이 있었다. 가장 큰돈이 들어간 비목은 구급차도, 검사 및 시술비도, 입원비도 아니었다. 간병비였다. 우리는 형제가 많은 편이어서, 제법 큰돈이 들어갈 일이 생겨도 각각 조금씩 부담하는 것으로 해결이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노년은 점점 길어지고 청장년은 자식이 없거나 적은 세대다. 돌보는 사람들의 근심 중 가장 큰 근심이 돈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기우가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