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gnes Jul 21. 2024

이 시대 우리가 죽는 장소

7. 김형숙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책 제목은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죽는다는 것>.


이 책은 목차만으로도 충분했는데, 특히 2장이 그랬다.


고립 : 우리는 낯선 감시자였을까
소외 : 나에 관한 일을 나에게만 알려주지 않는다면
침묵 : 왜 할머니에게 직접 묻지 않았을까
분노 : 생의 마지막을 폭력으로 보내게 한 책임은
공포 : 이들이 가진 두려움에는 이유가 있다
배제 : 나의 죽음을 왜 다른 이가 결정하는가

김형숙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2017(개정판), 뜨인돌.
2장 <중환자가 된다는 것, 나에 대한 결정에서 배제된다는 것>의 목차


고립, 소외, 침묵, 분노, 공포, 배제. 저자가 중환자실 간호사로서 느낀, 중환자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다양한 감정들이다. 하지만 환자들의 감정은 이렇게 유형화하면서도 정작 글을 쓴 자신은 많은 혼돈을 겪었나 보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바람직했는지 알지 못한다(217쪽)'라고 말한 것을 보면(왜, 안 그랬을까). 그리고 작가는 책 전체를 가로지르며 계속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피해 갈 수 없는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더 문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다(36쪽)'라고.


나는 20대 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비교적 자주 했다. 어떻게 살아도,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노화와 질병과 죽음이라는 것, 그 사실에 꽤 천착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이렇게도 생각해 봤다. 부자도 아름다운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결국 병들고 죽는 것을 보면, 그것만은 매우 공평하지 않냐고. 하지만 죽음을 자주 생각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이 커지면 현재의 내 삶을 좀먹을 거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젊으니까, 일단 무시하고 살아 보자고 생각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명제를 외면해 보자고. 그때가 27살이었다. 정확히 기억이 난다. 하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점이 어느 순간 왔고, 점점 더 자주 오고 있다.


2장의 제목 <중환자가 된다는 것, 나에 대한 결정에서 배제된다는 것>에는 중환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환자 중심으로 나열돼 있다. 수많은 처치와 의료술에 가려져 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는 환자는 고립되고, 의료진은 보호자만 찾으니 소외되고, 본인의 일에서 고립되고 소외되니 때로 침묵하고, 죽음 앞에서 당연하게도 분노하고 공포를 느끼며, 본인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결정에서 배제된다.


내 시어머니께서는 90세 8월에 요양병원에 들어가셨다. 요양병원에 입소하기 전까지 구급차를 종종 타셨는데, 한 번은 혼자 계시던 중 호흡 곤란이 와서 떨어져 사는 우리가 급하게 119를 집으로 보낸 적이 있다. 그때 구급대원은 남편에게 전화로 물었다고 한다. 연명치료에 동의하시냐고. 어머니께서 매우 고령이니 연명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될 수 있는데, 그 여부에 따라 이송되는 병원이 달라진다고. 매우 급박한 상황에서 남편은 '동의해야 더 큰 병원으로 이송된다'는 뜻으로 이해해 '동의한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90의 나이가 되실 때까지, 우리 가족은 어느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가족들 간에 그런 이야기를 나눠 적이 없다. 연명치료 여부를 선택하라니, 너무 느닷없지 않은가.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무지했다. 90의 나이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결코 이른 나이가 아니다. 어머니께서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계셨기에 그랬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하다. 나중에 시누이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그 이야기를 했다. 그냥 나는 너무 놀랐다고, 그런 질문을 받은 것이 너무 느닷없었다고, 푸념이나 하려는 참이었다. 헌데 시누이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걸 물었어? 근데 그건, 아들들이 결정해야지.


아마 시누이는, 본인이 그 당시 그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만약의 경우를 위한 의례적인 질문이었을 텐데, 혹시나 해서 묻는 질문에 이렇게 무겁게 답하다니 왜 이러실까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가부장적인 생각 아닌가, 어머니의 선택도 아니고 아들들의 선택이라니, 우리에게 그런 결정권이 있나. 그 정도만 생각하고 지나갔었다. 헌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우리는 너무 무지했다. 저자가 책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하는 메시지-'중요한 것은 환자나 가족, 환자와 의료진, 가족과 의료진, 의료진과 의료진 간에 삶의 마지막 시간이나 죽음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 아닐까 싶다(44쪽)'-는 딱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메시지였다. 시누이가 그렇게 반응한 데에는 아마도, '연명치료'라는 단어가 주는 어마어마한 무게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죄책감.


연명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가족들은 어떤 결정을 하든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 환자를 포기한 것은 아닌지, 혹은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의료진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책 (160쪽)


우리 가족이 어머니가 90에 이를 때까지 '연명치료' 등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다. 죄의식. 연명치료 거부를 선택함으로 인해 일어날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건 어머니의 죽음을 앞당기는 거 아닌가. 우리 가족은 어머니께서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해 논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먼 일'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외면하게 하고, '연명치료'에 대한 무지가 시간을 늦추고, 그리고 죄책감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고.


저자는 '사전의료의향서' 연명치료 동의여부를 환자 본인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결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왜냐하면 연명치료는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와중에 생을 마감하니, 가족들과의 작별을 제대로 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고. 그러한 (생생한) 사례들이 책에 켜켜이 들어 있다. 읽으면서 눈물도 나고 많이 아팠지만, 단숨에 읽었다. 재미있어서라기보다는 메시지가 콕콕 와닿았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용기 있게 써 준 저자에게 매우 감사하다. 책을 읽으며 내내 저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 작가님은 매우 섬세하고 다정한 분인데, 그런 분이 이런 글을 쓰기까지 매우 아팠겠구나, 그럼에도 이렇게 써내다니, 용기가 글을 읽는 내내 느껴졌다. 2012년에 초판을 낸 이 책은, 8쇄 재쇄를 찍고 2017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그리고 그 개정판도 6쇄를 찍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책을 만나, 참 다행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