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gnes Sep 17. 2024

명예로운 할머니, 이옥선 작가님의 책 <즐거운 어른>

10. 이옥선 <즐거운 어른>

나는 즐겨 듣는 팟캐스트 <여둘톡>에서 이옥선 작가님을 목소리로 먼저 만났다. 김하나 작가의 엄마라고 했고, 딸과 함께 딸이 어릴 때 기록해 놓은 육아일기를 바탕으로 책 <빅토리 노트>를 펴냈다고 했다. 48년생이시라고 하니, 내 아빠보다 한 살 아래시다. 이옥선 님은 결혼 초 잠깐 직장 생활을 했지만 평생 주부로 사셨다고 하는데 '얼마나 글을 잘 쓰시면 첫 에세이를 76세의 나이에 내셨을까? 얼른 읽고 싶다'라고 생각했는데, 배송을 기다리는 사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70대에 첫 책을 쓰실 정도라고 하니, 그리고 삼십 분 남짓 팟캐스트를 듣다 보니, 작가님 입담이 장난이 아니시다. 그래도 글을 안 쓰시던 분이 책을 내실 때에는 어떤 마음의 소리가 있었을 텐데 그게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그건 프롤로그에 바로 나와 있었다.


글을 쓰면서 나이를 먹어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고,
또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젊은 사람을 대변하는 글들이야 차고도 넘치지만, 그냥 보통의 주부 노릇을 오랫동안 해온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도 뭔가 할 말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옥선 <즐거운 어른> 2024, 이야기 장수. '작가의 말' 중에서


'그냥 주부 노릇을 오랫동안 해온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의 할 말을 꺼내 놓았다는 것이, 나는 정말이지 멋있어 보였다. 글은 필력도 중요하지만 필력을 넘어서는 것이 글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본인의 글감이 마이너리티 하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러니 써 볼게'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 작가님, 멋지십니다.


책을 펼치고 나서 곧,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웃겨 죽겠다며 옆에 있는 남편에게 몇 구절을 낭독해 주기도 했다. 나는 '아, 이 할머니 정말 재미지신데' 생각하며 단숨에 절반을 읽어 버렸다. 작가님이 찰지게 발음 나는 대로 쓴 '똘스또이'를 읽을 때는, 음성지원이 되는 느낌이었다. '노년의 루틴'이라는 목욕탕도 궁금하고, 각종 일러스트도 매우 귀엽다. 그리고 가장 최고는, 이옥선 작가님의 철학이다. 이른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 나이니 말할 수 있다'는 작가님의 이런저런 철학.


자식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오히려 나를 걱정할지도 모르는데,
자식들이 걱정한다는 것은 엄마로서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전화도 잘 안 한다.
엄마는 항상 씩씩하게 잘 산다는 메시지를 준다.

같은 책, 28쪽 '골든에이지를 지나며' 중에서


자식들이 걱정한다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책에 줄을 몇 번이나 쳤다. 나의 명예를 논하는 것은 군인이나 경찰,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의 누군가가 입에 올리는 단어라고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엄마로서 명예롭지 못하다'라니. 맞는 말이지 않은가. 한 사람을 나고 길러 한 명의 인간으로 키우는 내가, 명예롭지 못할 이유가 무언가. 내가 나를, '명예'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매우 신선했고,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제 할머니지 엄마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비겁하지 않다. 나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내 자식들은 성인이 되었고 엄마의 역할은 미미하다.
나는 중년의 내 자식이 자신의 업계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같은 책, 113쪽 <엄마가 되면 비겁해진다> 중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항상 내가 '을'이라고 생각했다. 내 자식의 안위는 세상 그 무엇에 비길 바 없이 최우선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그걸 알았고, 그 마음이 비겁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비겁한 마음을 가져서라도, 조금 비겁한 행동을 해서라도, 내 아이의 안위가 확보된다면 수치심도 견딜 수 있겠다 생각했다. 이옥선 작가님도 자식의 안위를 위해 '유명해지지 말라고' 십수 년 말해 왔으나, 이제는 유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능해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제 본인은 '할머니지 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지. 내 자식의 엄마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놓을 수 있는 것들은 놓고 노년의 정체성을 확립하라는 말이다. 자유의지로 엄마라는 짐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는 것, 너무나 능동적인 노년이다.


작가님이 이야기하는 책 이야기, 음악 이야기, 영화 이야기, 패션 이야기. 하나 같이 다 좋았다. 책 뒷면에 '칼칼한 유머'라고 쓰여 있던데, 진짜 합당한 표현이다. 서평을 썼으니, 이제 작가님이 추천하신 책들과 추천 유튜브, 추천 음악들을 섭렵하기 시작해야겠다.



이전 10화 나도, 돌보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