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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un 26. 2022

부모가 필요치 않은 나이는 없는 것처럼

자식도, 인생 내내 존재해 주기를

아이를 키워 보니, 40년 넘게 살아 보니, 부모가 필요치 않은 나이는 없다. 어릴 때는 키워 줘야 하니까, 유년기에는 미성숙하니까, 그리고 청년기에는 청년의 자식에게 해 주어야 하는 부모의 역할이 있고, 장년기에는 존재해 주고 자식의 고향이 되어 주어야 하니까, 부모는 필요하다.


아이 때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날 도와줘야 하는 존재로서의 부모가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근래에는 사회 초년기뿐 아니라 자식이 자식을 낳고서도 부모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지만, 부모의 존재란 생활에 실제적 도움이 되는 것을 넘어선다. 청년에게는 노년에 접어든, 노년을 살아내는 부모가 있어야 한다. 장년을 살아내고 노년에 접어들고, 또 노년을 살아내고 종래에는 헤어지는 아픔을 겪어야겠지만, 인생 전체를 거쳐 내내 줄곧 부모라는 존재는 필요하다.


내 남편은 열두 살부터 부모와 헤어져 지냈다. 열다섯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때 이미 어머니는 늙어 있었다. 남편의 기억 속 젊은 엄마는 없다. 엄마는 외형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항상 할머니였다. 일찍 부모를 잊은 남편에게는 가슴 깊이 자신도 모를 결핍이 있을 것이다. 내 엄마 아빠에게는 사위가 단 한 명이고 아들이 없다. 단 하나의 사위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귀애하셨고 15년 넘게 예뻐하신다. 하느님께서 내 남편에게 일찍 하늘로 간 아버지와 일찍 늙어버린 어머니를 대신해, 살가운 장인 장모를 주신 것 같다. 축복이다.


내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중학생이 되며  품을 벗어날 준비를 하는 게 실감이 난다. 사람들이 자식의 효도는 일곱 살이면 끝이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 아마 미운 일곱 살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말랑말랑한 아기가 주는 행복, 우유 냄새가 나고 종일 나만 바라보는 존재가 주는 즐거움은 정말 경이로웠다. 그 후 내 아이는 말을 배웠고 나와 소통을 하며  인생에 다시없을 행복을 주었다. 아이가 커가며 부모와 갈등도 생기고 때론 불화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 결국 독립하겠지만, 부모로서 나는 그러한 아이의 인생도 보고 싶다. 확실한 것은, 바라만 보기에도 아까운 나의 아이는 계속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내 인생에 존재할 것이다.


자주 만나지 못하고 우리는 지나간 가족보다 새로 꾸리는 자신의 가족, 자신의 삶커질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자식도 인생 내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해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내 시어머니는 올해 90세가 되셨다. 함께 살지 않고 나는 경기도에, 어머니는 지방 소도시에 계신다. 물론 자주 뵙지 못한다. 가끔 주말에 내려가면 헤어질 때 죄스러운 마음으로 말한다. "또 올게요, 어머니" 그럼 어머니는 항상 같은 말을 하신다.


" 와도 돼. 니들끼리 잘 살면 돼. 엄마 걱정 하나도 하지 말고, 잘 지내. 차 타고 멀리 오는 것도 걱정돼서 싫어. 안 와도 되니까 잘만 살아."


옛날에는 그게 그냥 할머니들이 하는 레퍼토리라 생각했다. 뵈러 가면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왜 말끝마다 오지 말라고 하실까. 왜 노인들은 반대로 마음에 없는 말을 할까.

내 아이가 15살쯤 되니 이제 좀 알만한 이야기. 보고 싶은 마음은 참으면 되지만 자식이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차오르는 걱정은 참을 수가 없다. 그러니 제발, 꼭, 잘 지내 달라고, 마음을 담은 소망을 이야기하시는 거였다.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운 마음도 진심이고, 자주 못 보더라도 내 아이가 평생 안온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도 진심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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