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선택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내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지금 지니엄에서 파티시에로 살아가기까지 나는 계속 길을 바꿨다. 헤매고 방황하던 그 시절의 나의 선택들은 결국 늘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들의 연속이었다. 어설프고, 거창하지 않았던 그 대답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나의 철학과 신념이 되었고 태도가 되었다.
그런데 그 대답들이 그리 논리적이지 않은 때도 많았다. 그리고 아마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할 나의 선택들은 그리 논리적이거나 멋있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때의 나는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스스로의 마음에 솔직하게 답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중학교 2학년 아이들 담임을 마치고 이번에는 고등학교 수학 전담교사로 배정이 되었다. 고등수학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아직 내가 카이스트 학생이라는 겉멋에 사로잡혀서 나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잘 인정하지 못하던 때였다. 교사로도, 한 과목의 강사로도 실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으면 그걸 메꾸기 위해 다른 선생님들에게 찾아가 질문을 하며 자문을 구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게 참 어려웠다. 아마도 내심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 '잘 가르치는 것' 에만 집중할 수 있게 1년을 보낼 수 있다니. 비록 고등학교 입시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지만, 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수학을 잘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해 보자.’
좋다. 수학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되겠지. 우선 과목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서 그다음 아이들을 케어하는 교사가 되어보자. 그 생각에 호기롭게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대학원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대학원에 붙어서 내년부터는 대학원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등록금도 냈다.
당시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은 이과아이들의 수리논술과 문과아이들의 입시수학이었다.
특히 문과 아이들은 수학을 거의 포기했던 아이들을 위한 반이었다. 하루는 시험문제를 냈는데 한 녀석이 시험지 답안지 양면으로 길게 '선생님전상서'를 써서 냈다. 그 답안지를 보고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지금 너희들에게 이 문제 몇 문제가 중요하겠니.'
그렇게 그 뒤로 아이들과 수학점수를 올리는 이야기보다, 따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기도해 주는 시간이 좋았다. 수학을 물어본다는 명분으로 교무실에 찾아온 학생들과의 대화가 좋았다.
동시에 이과 아이들은 똑똑했다. 가장 신이 나서 했던 수업이기도 했다. 대학교에서도 해석학을 좋아했던 나는 논리적 증명과 추론을 이어나가는 과정을 좋아했는데, 그 과정을 토론하면서 이어갈 수 있는 수리논술 시간이 즐거웠다. 수업할 맛 났다고 해야 할까. 아마 선생님들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수리논술 시간에 한 번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수업을 해보고 싶었다.
"얘들아. 나는 수학이 언어라고 생각해. 그러니 우리 이번 한 수업은 우리의 삶을 수학 언어로 표현해 볼까?"
"... 네?"
"예를 들어 그런 거지. 증가함수의 조건들을 보면.. 꼭 연속이 아니어도 증가하는 경우가 있잖아. 끊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 삶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이야기 말이야."
몇 가지 예시를 들어주며 설명을 했더니 아이들은 또 곧잘 내 말을 따라와 자기들 나름대로의 철학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억지로 짜 맞춘 것처럼 보여도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쌓아가면 되는 거고, 수학이란 과목이 우리의 철학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수학을 잘 가르쳐보겠다라고 다짐해 놓고,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을 결국 수학으로 이야기를 하는 일들이었다. 수학을 매개체로 삼아서 나는 어떻게든 우리가 배우는 이 지식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 수업이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는가를 떠나 실제적인 수학실력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입시수학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수학 문제를 더 많이 맞힐 수 있는가였으니까. 그 부분에서 나는 여전히 부족했다.
내가 잘 가르치는 게 맞을까 싶던 무렵, 한 선생님을 만났다.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그녀는, 나와 친해지게 되면서 아이들을 놓고 참 많이 울었다.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낼 줄도 알고, 같이 웃기도 하며 아이들을 지도했던 그녀는 그 당시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
'저게 교사구나.'
그런 그녀를 너무 사랑하고 응원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나는 저렇게까지 아이들을 위해 울어 줄 수 없는데.'
공대라는 길이 나와 맞지 않겠다 싶어 홀연히 떠나 이 길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어설픈 확신으로 교사를 시작했던 나에게 교사에 대한 소명과 사명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멋짐은 당시 나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같았다.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진짜 교사가 되고 싶은가를 물었다.
수학을 가르쳤던 순간들은 정말로 "수학"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고 싶은가를 물었다.
그 질문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자 바로 몸에서 신호가 왔다.
어느 날 문득 이명이 찾아왔다. 귀에서 들리는 소리가 밤낮으로 나를 괴롭혔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으면 조금 나아지다가도 다시 머리를 쓰려고 하면 귓속이 시끄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조금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
학교를 나가자.
대학원도 그만두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대학원을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학교에 있다가는 너무 바빠서 이도 저도 못한 채 시간이 갈 것 같았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적어도 이도저도 아닌 채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하면서 내 시간을 갖고 싶었다. 몸도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여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고 싶었다.
그게 정직한 나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수학 학원을 개업했는데, 파트타임으로 올래?"
하나만 하자 하나만. 수학 가르치는 것만 해보자.
"저.. 그럼 일주일에 3번만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