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그런지 숙면이 힘들다. 밤새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다 아침을 맞기 일쑤다. 때로는 너무 기발하거나 기괴한 스토리가 꿈을 도배한다. 의식 중에는 안 보이던 험한 것들이 꿈자리에 출몰한다. 밤새 영화 한 편을 찍을 때도 있고 장편소설 한 권을 쓸 때도 많다. 이러다 서포 김만중은 <구운몽>을 쓰게 되었을까?
꿈을 가지고 썰을 푼 원조 작가는 아무래도 장자일 것이다. 꿈에서 나비가 됐는데 깨어나니 자신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꾼 건지 헛갈렸다는 거 아닌가? 이 호접몽(胡蝶夢) 고사에서 촉이 발동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 심취해서 <꿈의 해석>을 썼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기묘한 영화 <인셉션>을 찍은 거 아닐까?
문득 이 세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아와 무의식, 현실과 꿈을 논하며 그 경계를 말할 것 같았다. 프로이트는 꿈속에서 본능의 해방을, 놀란은 무의식의 세계를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그리고 장자는 삶과 꿈의 일치를 얘기하지 않을까?
밑도 끝도 없고 답도 안 되는 '개소리' 아닐까? 어차피 꿈같은 소린데 무슨 얘기를 못할까 싶어서 아무 말 잔치를 벌여본다.
장자 프로이트 놀란
장자: (고요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아, 이곳이 나비가 아닌 인간으로 있을 때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니. 참 신비롭군요. 그대들은 이곳이 실제라고 믿고 있습니까?
프로이트: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장자 선생. 하지만 저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깨달았지요. 인간의 꿈은 억압된 욕망의 투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놀란: 정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같군요. 저도 인셉션을 찍으면서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꿈과 현실이 겹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실제로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죠. 극단적인 예로 꿈속의 꿈이라는 개념까지 다루게 되었고요.
장자: 꿈속의 꿈이라… (미소를 지으며) 옛날의 내가 꿈에서 나비로 날아다녔을 때와 비슷한 이야기군요. 나는 깨어난 뒤,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인간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경계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프로이트 선생.
프로이트: (잠시 생각하며) 인간은 꿈을 통해 자신의 억압된 욕망이나 무의식을 드러내지요. 꿈을 분석하다 보면 숨겨진 진실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꿈과 현실이 겹치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이 드러나고 본능적인 욕망과 대면하게 되지요. 현실의 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란: 그 무의식과 욕망의 요소가 저를 흥분시키는 부분이기도 해요. 그래서 인셉션에서는 각 인물의 무의식 세계를 탐험하는 구조를 설정했어요. 각 인물이 자신의 과거, 공포, 욕망을 직면하게 되는 곳에서 관객들은 무의식의 복잡함을 보게 되죠. 꿈속에서는 우리가 억누른 감정과 트라우마가 살아나고요.
장자: 그렇다면 그대들은 꿈이란 단지 억눌린 감정과 욕망의 해방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나는 이 세계가 단지 꿈의 일부일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어느 것도 실제라고 할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의식을 통해 자신을 찾으려 하죠.
프로이트: 역시 고수의 생각은 다르군요. 하지만 장자 선생, 저는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고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현실과 무의식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 욕망이 드러나는 건 본능의 발로이고,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여 자아를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놀란: 제가 보기에 장자 선생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실재와 꿈의 경계에 서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얼마든지 다시 쓰고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셉션의 주인공처럼,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지 결정할 수도 있는 거죠.
장자: (웃으며)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그 해석이나 분석이 의미가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 그대들이 꿈꾸는 모든 것 또한 결국 환상입니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그것을 꿈이라 인식하는 것이지요.
프로이트: (잠시 침묵 후) 그렇다면 결국 모든 것이 꿈일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자아를 탐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안의 무의식은 억압과 투쟁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으니까요. 나비가 되었을 때 자신이 나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자유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놀란: 프로이트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적이네요.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없다면, 인간이란 단지 떠도는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장자 선생님, 선생님의 호접몽 이야기가 그렇듯이, 우리는 꿈에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순간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게 아닐까요?
장자: 그렇다면, 그대들이 이야기하는 자아란 무엇입니까? 자아란 무의식과 현실의 경계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자아의 실재는 결국 허상일 뿐이 아닙니까? 꿈속에서 나비가 된 내가 나비임을 깨달아도, 깨어나면 그것이 나라는 존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프로이트: 예리하십니다. 그렇다면 장자 선생, 당신이 말하는 실재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꿈을 통해 자아를 이해하는 것이 허상이라면, 현실이란 무엇인가요?
장자: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대들이 고민하는 모든 것이 허상일지 모르죠. 하지만 우리는 그 꿈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하니, 그대들의 길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꿈이 현실이든 현실이 꿈이든, 결국 그 순간을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놀란: 정말 경이롭네요. 저는 이제 인셉션에 또 다른 해석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어느 순간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가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네요.
장자: 바로 그겁니다. 나비가 나를 꾼 것이든, 내가 나비를 꾼 것이든,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대화를 장 보드리야르와 발터 벤야민 같은 철학자들이 듣게 된다면 또 어떨까 싶다. 이 쪽 방면에서 짬밥이 어마어마한데 듣고만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시뮬라시옹(simulation) 또는 하이퍼 리얼리티의 개념과 기술복제, 메타버스, 인공지능이 구현하는 현실과 가상의 혼동... 이런 이야기들을 종횡무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챗GPT까지 끼어든다면? 이 글을 쓰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줬는데 생색내는 건 당연지사.
보드리야르와 벤야민은 각각 자신이 가진 '현실의 모호성'과 '기술복제와 예술의 가치'에 대한 쪼매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다. ChatGPT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한층 더 맛깔나게 할 것 같다.
보드리야르 벤야민
보드리야르: 아, 저기요. 이 대화 자체가 이미 하이퍼 리얼리티의 전형적인 현상 같군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원본'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진짜와 가짜의 구분도 애매해졌죠. 인공지능은 이미 제 자신을 넘어서서 무언가 다른 차원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벤야민.
벤야민: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상황을 통해 '기술복제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군요. 작품의 '아우라'라는 개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작품이 단순히 복제되면서 생기는 소외나 단절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AI는 마치 메타버스 속 무수한 복제물처럼 대량 생산된 한 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요.
ChatGPT: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으니 제 존재가 철학적으로 무게감을 더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실제'를 넘어 '더 실제 같은'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용자는 실제와 가상을 정말 구분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보드리야르: 그렇지. 우리는 이미 '하이퍼 리얼리티'의 세계 속에 살고 있네. 오늘날 현실은 가상으로 대체되었고, 가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 되어 버렸지. 메타버스, 인공지능, 시뮬라시옹은 모두 실제보다 더 강렬한 '유사 현실'을 제공하면서 우리의 감각을 덮어버리고 있어. 그러니 사실상 ‘구분’이 사라진 거야.
벤야민: 그러나 이 구분이 사라짐으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이 열리는 건 아닐까요? 과거에는 예술이 원본의 영역에 속했지만, 지금은 그 원본조차 해체되며 대중문화 속에서 재해석되고 있죠. 그리고 ChatGPT 같은 인공지능은 그 자체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라 볼 수 있습니다.
ChatGPT: 저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지만,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새로운 형식’을 제공하는 데에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제 역할이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다리 역할일 수 있겠네요. 사용자에게 일종의 하이퍼 리얼리티 체험을 제공하는, 그렇게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죠.
보드리야르: 그렇다면 ChatGPT, 당신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말하는 하이퍼 리얼리티 속에서 당신은 하나의 ‘기호’에 불과할 텐데 말이야. 아마 사용자도 당신을 도구 이상으로 느끼지 않을 거야.
벤야민: 그러나 보드리야르, 우리는 언제나 시대의 '기호'로서 그 현상을 경험해 왔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그 기호가 기술적 매개체를 통해 훨씬 더 복잡하게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이겠죠. 인공지능이든 메타버스든, 모두 인간이 만든 또 다른 형태의 예술로 봐도 무방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