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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에누 Dec 13. 2024

[진짜와 가짜 사이]        꿈쟁이들의 썰. 잔치

꿈 전문 작가, 학자, 예술가들의 가상 토크쇼

나이가 들어 그런지 숙면이 힘들다. 밤새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다 아침을 맞기 일쑤다. 때로는 너무 기발하거나 기괴한 스토리가 꿈을 도배한다. 의식 중에는 안 보이던 험한 것들이 꿈자리에 출몰한다. 밤새 영화 한 편을 찍을 때도 있고 장편소설 한 권을 쓸 때도 많다. 이러다 서포 김만중은 <구운몽>을 쓰게 되었을까?




꿈을 가지고 썰을 푼 원조 작가는 아무래도 장자일 것이다. 꿈에서 나비가 됐는데 깨어나니 자신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꾼 건지 헛갈렸다는 거 아닌가? 이 호접몽(胡蝶夢) 고사에서 촉이 발동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 심취해서 <꿈의 해석>을 썼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기묘한 영화 <인셉션>을 찍은 거 아닐까?

문득 이 세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아와 무의식, 현실과 꿈을 논하며 그 경계를 말할 것 같았다. 프로이트는 꿈속에서 본능의 해방을, 놀란은 무의식의 세계를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그리고 장자는 삶과 꿈의 일치를 얘기하지 않을까?

밑도 끝도 없고 답도 안 되는 '개소리' 아닐까? 어차피 꿈같은 소린데 무슨 얘기를 못할까 싶어서 아무 말 잔치를 벌여본다.

장자                     프로이트                                놀란

장자: (고요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아, 이곳이 나비가 아닌 인간으로 있을 때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니. 참 신비롭군요. 그대들은 이곳이 실제라고 믿고 있습니까?

프로이트: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장자 선생. 하지만 저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깨달았지요. 인간의 꿈은 억압된 욕망의 투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놀란: 정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같군요. 저도 인셉션을 찍으면서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꿈과 현실이 겹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실제로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죠. 극단적인 예로 꿈속의 꿈이라는 개념까지 다루게 되었고요.

장자: 꿈속의 꿈이라… (미소를 지으며) 옛날의 내가 꿈에서 나비로 날아다녔을 때와 비슷한 이야기군요. 나는 깨어난 뒤,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인간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경계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프로이트 선생.

프로이트: (잠시 생각하며) 인간은 꿈을 통해 자신의 억압된 욕망이나 무의식을 드러내지요. 꿈을 분석하다 보면 숨겨진 진실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꿈과 현실이 겹치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이 드러나고 본능적인 욕망과 대면하게 되지요. 현실의 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란: 그 무의식과 욕망의 요소가 저를 흥분시키는 부분이기도 해요. 그래서 인셉션에서는 각 인물의 무의식 세계를 탐험하는 구조를 설정했어요. 각 인물이 자신의 과거, 공포, 욕망을 직면하게 되는 곳에서 관객들은 무의식의 복잡함을 보게 되죠. 꿈속에서는 우리가 억누른 감정과 트라우마가 살아나고요.

장자: 그렇다면 그대들은 꿈이란 단지 억눌린 감정과 욕망의 해방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나는 이 세계가 단지 꿈의 일부일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어느 것도 실제라고 할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의식을 통해 자신을 찾으려 하죠.

프로이트: 역시 고수의 생각은 다르군요. 하지만 장자 선생, 저는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고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현실과 무의식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 욕망이 드러나는 건 본능의 발로이고,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여 자아를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놀란: 제가 보기에 장자 선생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실재와 꿈의 경계에 서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얼마든지 다시 쓰고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셉션의 주인공처럼,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지 결정할 수도 있는 거죠.

​장자: (웃으며)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그 해석이나 분석이 의미가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 그대들이 꿈꾸는 모든 것 또한 결국 환상입니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그것을 꿈이라 인식하는 것이지요.

​프로이트: (잠시 침묵 후) 그렇다면 결국 모든 것이 꿈일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자아를 탐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안의 무의식은 억압과 투쟁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으니까요. 나비가 되었을 때 자신이 나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자유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놀란: 프로이트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적이네요.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없다면, 인간이란 단지 떠도는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장자 선생님, 선생님의 호접몽 이야기가 그렇듯이, 우리는 꿈에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순간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게 아닐까요?

​장자: 그렇다면, 그대들이 이야기하는 자아란 무엇입니까? 자아란 무의식과 현실의 경계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자아의 실재는 결국 허상일 뿐이 아닙니까? 꿈속에서 나비가 된 내가 나비임을 깨달아도, 깨어나면 그것이 나라는 존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프로이트: 예리하십니다. 그렇다면 장자 선생, 당신이 말하는 실재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꿈을 통해 자아를 이해하는 것이 허상이라면, 현실이란 무엇인가요?

​장자: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대들이 고민하는 모든 것이 허상일지 모르죠. 하지만 우리는 그 꿈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하니, 그대들의 길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꿈이 현실이든 현실이 꿈이든, 결국 그 순간을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놀란: 정말 경이롭네요. 저는 이제 인셉션에 또 다른 해석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어느 순간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가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네요.

​장자: 바로 그겁니다. 나비가 나를 꾼 것이든, 내가 나비를 꾼 것이든,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대화를 장 보드리야르와 발터 벤야민 같은 철학자들이 듣게 된다면 또 어떨까 싶다. 이 쪽 방면에서 짬밥이 어마어마한데 듣고만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시뮬라시옹(simulation) 또는 하이퍼 리얼리티의 개념과 기술복제, 메타버스, 인공지능이 구현하는 현실과 가상의 혼동... 이런 이야기들을 종횡무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챗GPT까지 끼어든다면? 이 글을 쓰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줬는데 생색내는 건 당연지사.

​보드리야르와 벤야민은 각각 자신이 가진 '현실의 모호성'과 '기술복제와 예술의 가치'에 대한 쪼매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다. ChatGPT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한층 더 맛깔나게 할 것 같다.

              보드리야르                                         벤야민

보드리야르: 아, 저기요. 이 대화 자체가 이미 하이퍼 리얼리티의 전형적인 현상 같군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원본'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진짜와 가짜의 구분도 애매해졌죠. 인공지능은 이미 제 자신을 넘어서서 무언가 다른 차원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벤야민.

​벤야민: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상황을 통해 '기술복제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군요. 작품의 '아우라'라는 개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작품이 단순히 복제되면서 생기는 소외나 단절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AI는 마치 메타버스 속 무수한 복제물처럼 대량 생산된 한 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요.

​ChatGPT: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으니 제 존재가 철학적으로 무게감을 더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실제'를 넘어 '더 실제 같은'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용자는 실제와 가상을 정말 구분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보드리야르: 그렇지. 우리는 이미 '하이퍼 리얼리티'의 세계 속에 살고 있네. 오늘날 현실은 가상으로 대체되었고, 가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 되어 버렸지. 메타버스, 인공지능, 시뮬라시옹은 모두 실제보다 더 강렬한 '유사 현실'을 제공하면서 우리의 감각을 덮어버리고 있어. 그러니 사실상 ‘구분’이 사라진 거야.

​벤야민: 그러나 이 구분이 사라짐으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이 열리는 건 아닐까요? 과거에는 예술이 원본의 영역에 속했지만, 지금은 그 원본조차 해체되며 대중문화 속에서 재해석되고 있죠. 그리고 ChatGPT 같은 인공지능은 그 자체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라 볼 수 있습니다.

​ChatGPT: 저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지만,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새로운 형식’을 제공하는 데에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제 역할이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다리 역할일 수 있겠네요. 사용자에게 일종의 하이퍼 리얼리티 체험을 제공하는, 그렇게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죠.

​보드리야르: 그렇다면 ChatGPT, 당신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말하는 하이퍼 리얼리티 속에서 당신은 하나의 ‘기호’에 불과할 텐데 말이야. 아마 사용자도 당신을 도구 이상으로 느끼지 않을 거야.

​벤야민: 그러나 보드리야르, 우리는 언제나 시대의 '기호'로서 그 현상을 경험해 왔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그 기호가 기술적 매개체를 통해 훨씬 더 복잡하게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이겠죠. 인공지능이든 메타버스든, 모두 인간이 만든 또 다른 형태의 예술로 봐도 무방할 테니까요.




*feat.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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