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용광로였다. 모든 것을 녹였다. 눈물도 분노도 미움도 갈등도 삼켜버리는 마법의 불가마였다. 선수들의 숨 막히는 긴장과 감당불가의 심박수는 그대로 관중과 시청자의 심신으로 동조되었다.
그들만의 리그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열혈 참견러로 돌변했다. 극한의 폭서기에 개최되는 부당함은 오히려 냉방의 효능을 극대화했다. 현지와의 시차를 극복하고 오밤중에 관전해야 하는 불편도 승전의 짜릿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올림픽은 블랙홀이었다. 모든 뉴스를 빨아들였다. 특검법, 명품백, 노란 봉투, 야당 전당대회, 미국 대통령선거, 블랙먼데이, 전기차 화재, 프로야구, 일본 지진, 전공의 미복귀...
일본 미야자키현 인근해역에서 발생한 강진 속보는 태권소녀의 통쾌한 발차기 낭보에 소리 없이 묻혀버렸다. 다가올 거대지진의 예감과 쓰나미의 공포도 승리의 쾌감을 덮진 못했다.
셔틀콕 여전사의 금빛 낭만서사는 찬란했지만 분노의 쓰나미는 여전히 때를 기다리고 있다. 무성한 뒷얘기만 매스컴에 회자되면서 태풍의 눈으로 커가는 느낌이다.
올림픽의 뽕끼에 가려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또 하나의 쓰나미가 있다. 대형 수련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수련의와 전공의들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인다.
정부와 의사단체, 환자단체 간의 치열한 신경전도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향후 몇 년간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아마겟돈급 폭풍의 전조 앞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형국이다.
국민들도, 정부도, 정치 세력들도 금메달 소식에 들떠 이상하리만큼 태평스럽다. 이 와중에도 올림픽 방송채널 사이사이로 탄핵, 방통위, 필리버스터, 청문회, 법률안 거부권 같은 난폭한 키워드들이 팝업 되고 있을 뿐이다.
전공의 사직과 의대생의 수업거부. 이 불편한 이슈는 실체를 건드릴수록 커지는 골칫덩이일지 모른다. 무지하거나 무신경하거나 무능하거나, 아무튼 당분간은 해법이 없어 보인다.
섣부른 진단, 준비되지 않은 무모한 접근이 초래한 혹독한 결과물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환자, 병원과 의료진들의 몫이다. 이전 정부의 포퓰리즘과 무책임을 탓하면서 차별화의 명분을 걸고 이른바 의료개혁은 발동이 걸렸다.
그런데 그 시점이 왜 하필이면 총선을 두 달 남짓 앞둔 때였을까? 국민 대다수가 지지한다며 여론을 등에 업은 포퓰리즘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의대증원이 강행되었음에도 그들은 왜 승자가 되지 못했을까?
정부는 천오백 명 정도 늘어난 신입 의대생을 전리품으로 챙겼고 의대생과 수련의, 전공의들은 전쟁포로의 신세로 전락했다. 정부가 비축한 실탄과 장비, 자금과 재정은 강압과 회유에 무차별 살포되었다. 조변석개의 시행령과 행정처분으로 겁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요지부동이다.
혼전의 신호탄은 '오픈런'과 '뺑뺑이' 두 단어였다. 국회의원 선거를 눈앞에 둔 2월 1일 대통령은 민생토론회라는 자리에서 소아청소년과와 응급실 상황을 선동적인 언어로 단순 명료하게 정리했다.
의료시스템 붕괴가 우려된다며 운을 뗐다. 이어서 4대 의료정책 패키지와 의대증원 방안을 선물꾸러미처럼 내놓았다. 내년 학년도부터 당장 의대신입생을 2,000명 증원하겠다는 거의 폭탄급 선언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엔 거의 완벽한 처방 같아서 여론은 일단 우호적이었다. 엄친아, 엄친딸 의사들에 대해 평소에도 부정적인 시선을 주고 있던 사람들은 특히 의대증원에 환호의 반응을 보였다.
다수의 국민들은 정부와 매스컴이 조성한 여론에 따라 의사 숫자의 부족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 단정 짓고 있다. 부족한 부분만큼 의대생을 더 뽑겠다고 하는데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턱없이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누리면서도 의사들을 이기적 특권 카르텔 집단으로 매도하는 양가적 심리는 정부의 의료개혁 정책에 힘을 실어 주었다. 수억의 연봉을 받으면서 느긋하게 진료와 수술을 미루는 것 같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개혁과 처단의 대상으로 지목된 의사들과 전공의들의 생각은 정부와 국민들의 현실 인식과는 달랐다. 정부가 제안한 의료사고 처리특례법 개정안의 일부 독소조항은 눈가림이고 개악이라는 주장이다.
비급여 항목 혼합진료 금지는 '내. 외. 산. 소'라 불리는 필수의료 분야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고 이 분야에 대한 기피현상을 오히려 부추길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림출처: 연합뉴스
무엇보다 일의 선후가 틀렸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구조적 불합리를 해결하는 것부터 개혁에 접근할 것을 수년 전부터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원인을 도외시하고 의대생을 아무리 많이 뽑아도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의협과 전공의 집단의 목소리였다.
늘려야 하는 의사 수에 대한 정확한 논거와 추계는 정부와 의사집단 어느 쪽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 몇몇 임상경험 없는 자문교수의 의견과 용역 보고서만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오히려 과잉배출에 따른 부작용을 걱정해야 될 때라고 얘기한다.
정부는 유럽 선진국에 비해 국민 일인당 의사 비율이 열세라는 이유를 들어 향후 5년 내에 만 명을 퉁쳐서 늘리겠다는 선언을 했다. 단 두 번의 회의를 거쳐 미리 정해 둔 숫자를 추인하는 절차를 거쳐 해마다 이천 명 증원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숫자를 개혁의 시그니처로 내놓았다.
몇 천명의 의대생이 늘어나기만 하면 낙수효과로 이 분야를 지망하는 의사도 늘어날 것이라는 정부의 발상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했다. 열악한 근무환경과 처우에도 불구하고 직업적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버텨왔던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종사자들의 자존심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안 그래도 인기 없는 직역이라는 오명을 감내하면서 심신을 갈아 넣으면서 일하고 있었는데... 모욕이었다. 늘어난 숫자로 빈자리를 메울 수 있다니 이 직업에 대해 더욱 정나미가 떨어지는 노릇이었다.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거의 전원 사직서를 내고 병원을 떠나자 정부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직서 수리와 개원 및 재취업을 막고 군 미필 전공의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며 압박 수위를 높여갔다.
의대 졸업 후 전공의 과정에 들어가지 않고 개원을 선택한 일반의는 놔두고 전공의만 때리는 이 상황이 필수 의료의 붕괴를 가속할 수 있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전공의들이 증원을 반대한 것은 졸속적인 처사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병원의 착취구조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전문의로 채워야 할 대학병원은 수련기관이라는 명분으로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관습처럼 감내해 온 전공의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병원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는 한 전공의는 자신의 처지를 영화 '벤허'에 나오는 노예선의 노잡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당직근무를 포함해서 일주일에 90시간 이상 근무를 하고도 오천만 원 이하의 연봉을 받는 그들에게 세상은 평균 4억이 넘는 고소득자라며 이기적 카르텔 집단으로 낙인찍고 있다.
전공의와 수련의들은 후배들의 운명에 대한 선배로서의 책무의식도 저버릴 수 없는 듯하다. 한꺼번에 60퍼센트 정도가 늘어나는 폭압적 증원이 강행되면 지금보다 더한 콩나물 강의실, 열악한 실습환경, 부실한 수련 프로그램은 불 보듯 뻔했다.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직무유기고 양심불량이라 여겨졌다. 법원은 이러한 저항행위를 원고부적격이라는 소송법 용어로 폄하했다. 당사자들도 아니면서 억지를 부리는 오지랖 넓은 참견으로 판결한 것이다.
지역 의료와 필수 의료 강화를 위해 추진한 의대 증원은 집단 카르텔과의 전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근거도 불명확한 적대감에 기반한 카르텔 깨부수기는 우리 사회의 편 가르기를 더욱 부추긴다.
고액의 수임료를 받는 법조카르텔, 거액의 출연료와 광고수입을 올리는 연예카르텔, 청년들의 소외감을 증폭시키는 대기업 노동자카르텔... 이런 식의 낙인찍기는 능력과 기여도의 차이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인정하는 건전한 자본주의에 심각한 적신호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진 것 같아 민망하고 참담하다. 아무 생각 없이 올림픽 방송이나 보면서 잠시 근심을 내려놓으면 이 또한 지나갈 일일까?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는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처럼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면 될 것인가?
어쩌면 의료대란의 쓰나미는 오지 않을지 모른다. 의과대의 학습환경은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우려처럼 열악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수업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의대생들은 몇 년 쉬다가 어려운 공부를 집어치우고 다른 학과로 눈길을 돌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년 신입생의 상당수도 선배들의 길을 따라 수업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강의실은 남아돌고 수련병원의 병상에는 평온이 깃들지 모른다. 앞으로 3-4년간 의사면허 보유자와 전문의가 배출되지 않아도 정부가 선택한 오천명의 금지옥엽들이 그 자리를 메우면 될 일이다.
사직서가 수리된 전공의들은 전문의 되기를 포기하고 생업을 찾아 동네병원이나 외국병원으로 나갈지 모른다. 수련병원은 텅텅 비어 있다가 하나둘 문을 닫을지 모른다. 교수들은 개업을 하거나 동네병원으로 돌아가고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을 몇몇 대형병원은 정부의 주도하에 영리 병원으로의 전환을 모색할지 모른다.
상급병원 응급실로 들이대던 성급한 환자들은 동네병원에서 느긋하게 진료를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열나는 아이를 출근길에 의사 선생님한테 못 데려가서 안달하던 워킹맘들은 해열제의 위력을 독학으로 깨우치고 있다.
학생들과 수련생들을 닦달하던 보건복지 관료들은 복지부동의 자세로 시간을 끌고 있다. 소아과 오픈런도 사라지고 응급실 뺑뺑이도 돌지 않는 의료선진국은 오고 있는 것일까? 이들 키워드를 빌미 삼아 참 쉬운 의료개혁을 꿈꾼 천진난만한 지도자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개혁의 시나리오는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주동자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 2024 런던올림픽 직후인 8월 13일에 쓴 글이다.
수련병원을 사직한 대부분의 전공의들은 이제 더 이상 전공의가 아니다. 정부의 조치에 따라, 지금 실업자이거나 다른 의료현장을 지키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현재 파업 중이 아닌 전공의들과 의사들을 계엄포고령은 처단 대상으로 특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