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자고 일어나니 평소처럼 어깨가 뻐근하지도 않고, 어쩐지 몸이 가뿐했다. 간밤에 뒤숭숭한 꿈도 없이 단잠을 잔 덕분일까.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아내에게 툭 던졌다. "오늘 왜 이리 기분이 좋지? 복권이라도 하나 살까?" 아내는 나를 힐끔 보며 웃음 지었다.
아침 일찍 당구 동호회에 나가서도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평소에 그리 잘 맞지 않던 공도 딱딱 맞아떨어졌다. 네 시간 동안 네 번의 게임을 했는데, 그중 세 번을 이겼다. 대박 기운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12시 가까이 되어서 게임이 마무리될 무렵에 카톡이 왔다. 광고회사에서 일할 때부터 정이 든 귀염둥이 후배다. 늘 생글생글 밝은 얼굴, 재치 넘치는 말솜씨, 호쾌한 웃음이 행복을 전염시키는 전직 교수이자 지금은 시인이다.
"형님, 오늘 점심 아시죠?"
맞아, 어머니 장례 때 부의한 사례로 한글날 점심 쏜다고 했었지.
우리 어머니 장례 때 발인 전날 새벽까지 빈소에 머물면서 우리 가족들을 과도하게 위로했던 아우이기도 하다. 굳이 답례가 필요 없는 사이이긴 했지만 딱히 미룰 이유도 없었다. 게임도 잘 끝났겠다, 오늘같이 기분 좋은 날엔 초대에 흔쾌히 응하는 게 답일 것 같았다. 잠시 후 나는 한 시간 거리인 종로3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탑골공원 근처. 단골 돼지국밥집에서 이교수의 토크쇼가 시작되었다. 특유의 쾌활함으로 너털웃음 사이사이로 호기를 뿜어낸다. "형님, 이 집은 수육에 국밥이 좋습니다. 막걸리도 한잔 하시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육을 한 점 입에 넣고 한 잔 딱 걸치니 벌써 기분이 확 올라온다. 아무 말 대잔치의 서막이 열린다.
막걸리의 취흥을 느끼며 이교수의 가이드로 서울 중심가 투어에 올랐다. 서울에 살면서도 이런 기회가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는 곳들.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 그리고 복잡한 도시 속 조용히 숨 쉬고 있는 공간들. 익숙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멀게 느껴졌던 곳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사동, 탑골공원, 익선동, 피맛골, 운현궁, 경인미술관, 광장시장까지. 서울 중심가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햇살은 아직 따끈했지만 바람은 제법 선선했다. 길을 걷다 보니 빌딩 사이로 가을의 냄새가 묻어났다. 시간이 많지 않을 때면 쉽게 지나쳤을 법한 길들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평소 같았으면 복잡한 인파 속에서 놓쳐버릴 만한 것들도 천천히 걸으니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 할 동행자가 있어 더욱 그랬다.
시작은 낙원상가. 음악의 아우라 가득한 낙원상가는 여전히 그 독특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 안에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간직한 악기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뮤즈의 숨결이 느껴졌다. 예전처럼 거리 한켠에서 연주하는 버스커들과 자신만의 악기를 찾으려 발품을 파는 사람들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도 낙원상가만의 오래된 감성과 여전히 젊은 예술가들의 활기가 교차하는 여기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의 공간이다.
이층으로 발길을 돌려 실버존으로 들어서니 또 다른 서울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어르신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세대의 시간이 쌓여 있는 공간이다. 퇴색한 시네마스코프 영화들을 상영하는 극장도 있고 차를 마시는 장소도 있었다.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실버존의 정겨운 분위기는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의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평온함을 선사했다.
낙원상가를 지나 인사동의 화랑들을 구경했다. 예전에 일했던 광고회사 대홍기획에서 가까운 곳이라 익숙한 장소였지만 30년 세월 동안 너무 변한 모습이었다. 대학에서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던 동기들과 함께 가이드 기분을 내면서 둘러본 지도 10년이 더 지난 것 같다. 친구들의 정겨운 모습들이 스쳐간다. 그때로 거슬러 함께 머물렀던 장소를 되짚어 보고 싶었다.
길목 꿀타래 가게에서 과자 만드는 퍼포먼스에 홀려 한 상자를 사서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특유의 예술적인 감성을 자아내는 인사동은 골목마다 작은 화랑과 찻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골목을 돌아서면 마주치는 여러 갤러리들, 그리고 그곳에서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애니메이션 작가와 늑대를 그리는 화가, 다관을 빚는 도예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질문을 섞어 아는 체도 한다.
경인미술관은 한적하게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풍경보다는 제빵소와 카페의 분위기로 변모했다. 사람들은 정원을 둘러보며 도란도란 대화하기보다는 먹고 마시는 식탐에 도취해 있는 듯했다.
익선동으로 발길을 돌리자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익선동은, 옛 한옥과 현대적인 카페, 식당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익선동은 새롭게 변모하는 공간이었다. 옛 한옥의 정취를 간직한 골목길 속에는 세련된 카페와 가게들이 들어서 있어, 과거와 현재가 독특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절묘한 만남, 따스한 감성이 우리를 감싸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냈다. 익선동의 골목길을 헤매며 시간의 흐름을 잊고, 소금빵 가게와 토스트 카페, 바비큐 골목의 풍미에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줄을 서서 소문난 소금빵 가게에서 고소한 빵을 사서 걸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먹고 있었다. 바삭한 빵의 소금 알갱이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확행 아닐까? 외국인들의 표정에서도 그런 느낌은 확연했다. 곳곳에는 독특한 소품 가게와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카페들이 익선동 특유의 아기자기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어느새 운현궁에 도착했다. 서울의 도심에 이런 공간이 남아있다니? 복작복작한 인사동 거리와 경인미술관보다는 더 운치가 느껴졌다. 말 그대로 역사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공간이었다. 현대적인 도시의 풍경 속에서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에서 서울의 진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흥선 대원군의 기개와 오기가 서려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러니다. 운현궁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은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지낸 나를 잠시 멈추게 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가이드가 대접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홀짝거렸다. 늦여름과 초가을이 교차하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아무 말 대잔치를 한 시간 정도 이어갔던 듯하다.
탑골공원에 도착하니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순간들이 보였다. 고요한 공원의 한가운데 서 있는 원각사지 십층탑과 우물터, 독립선언 기념비를 둘러보았다. 한때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던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다. 잠시 머물며 시간을 되새기게 되었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벤치에 앉아 쉴 때마다 서울의 과거가 겹쳐 보이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 늦은 오후가 되자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피맛골을 따라 걷다 오래된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이 있던 자리에 도착했다.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옛 추억이 서려 있는 그곳을 지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종로 4가의 금은방 거리를 지나면서 문득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종묘의 광활한 공간과 그 안에 서린 고요함은 도시 한가운데에서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늘 바삐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서울이지만, 종묘의 고즈넉한 정원 안에서는 시간조차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느릿느릿 걸으며 자연스럽게 서울의 오래된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정제된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빛은 그 풍경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주었다. 고요한 공간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종묘를 지나 동대문광장으로 향하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현대적이고 거대한 건물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활기찬 사람들이 넘쳐난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현대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로 넘어오면 서울의 다양한 얼굴이 자연스럽게 대비된다. 10여 년 전 대학동기들과의 서울 투어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동대문광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잠시 옆길로 샜다. 배가 슬슬 꺼질 때쯤이어서 그랬을까? 광장시장의 먹자골목이 떠올랐다. 빈대떡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을 지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후배는 오랜 단골이라는 전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형님, 여기 전집에서 나오는 빈대떡은 이모님이 직접 해 주시는 건데, 무슨 요리든 다 맡겨보세요." 그렇게 우리는 이모카세 기분을 만끽하며 빈대떡과 함께 지평막걸리 두 통을 더 비웠다. 빈대떡과 막걸리에 취해 흐릿해진 정신 속에서 후배와의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카톡이 울렸다. 아내였다. "저녁 시간인데 아직 안 와?" 아차 벌써? 얼떨결에 한마디 날린다. "여기 광장시장인데, 혹시 뭐 사갈까?" 번개처럼 답이 왔다. "육회비빔밥!"
흔쾌히 육회비빔밥을 포장 주문해서 뿌듯한 마음으로 받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유난히 지하철도 제때제때 도착해 줬다. 땀과 술에 전 몸은 녹진녹진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비빔밥을 펼쳤다. 아내는 비빔밥을 먹으며 웃음을 지었다. "오늘 왜 이렇게 맛있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그저 흐뭇했다.
오늘 하루는 정말 모든 것이 술술 풀렸다. 컨디션도, 당구도, 후배와의 만남도, 길 위의 여행도, 지하철 시간도. 육회비빔밥을 싹싹 비우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