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마라톤.
사실 2023년 때 적은 버킷리스트에서는 내 역량이나 실력을 고려하지 않고 순진무구하게 '40km 마라톤 완주'를 적어 내렸다. 그러나 올해 적은 버킷리스트는 현실을 반영해 '마라톤 10K'로 고쳤다.
그래서인지, 작년부터 이월된 버킷리스트를 드디어 올해 이루게 되었다.
이번 마라톤이
더욱 의미 있던 이유는,
내가 완주할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0K 마라톤은 5월에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3월 초에 마라톤을 신청했다. 온콜, 혼인신고 등 개인적인 일정들로 인해 훈련을 3월 말에 있는 한국 휴가때 하기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 글에 적은 것처럼, 한국에 가자마자 예정에 없던 수술을 하게 되었다. 한 달간의 회복 시간을 가져야 했기에 숨쉬기 운동만 열심히 했다.
평소 걷는 거나 수영은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어도, 뛰기는 잘 안 해서 그런지 5분만 지나도 헥헥거리면서 10분을 채운 적이 없다. 그래서 마라톤 하는 날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J는 나에게 "몸도 성치 않은데 왜 마라톤 신청을 미리 취소하지 않았냐"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J가 자는 사이, 내가 몰래 J 것까지 마라톤을 신청해 놔서 더 원망 섞인 핀잔을 듣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본다). 그 말에 "너라도 완주하면 되지"라고 답했으나 사실은 내 게으름으로 취소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J는 "너무 무리할 것 같으면 꼭 완주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했고, 나도 내 몸 상태가 어떠할지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웬걸? 마라톤 당일, 5분 달리는 것도 힘들어한 내가 5K를 완주한 35분 동안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1시간 12분으로 첫 마라톤 10K를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마라톤 뛸 훈련이나 연습도 안 했던 내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1) 같이 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얻는 시너지 효과와 2) 함께 참가한 지인이"30분만 쉬지 않고 뛰면 그 이후부터는 러너스하이 (Runner's high)처럼 별로 힘들이지 않고 몸 따로 정신 따로 뛰는 상태가 된다"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러너스하이(Runner's high): 주변의 환경자극이 있는 상태에서 운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행복감을 뜻함 (출처: 삼성서울병원)
그래서 '일단 30분만 쉬지 않고 뛰어보자!'라고 한 다짐이, 그래도 적정 속도를 유지한 채 적당한 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만들어줬다. 무엇보다 J가 옆에서 나랑 같이 속도를 조절해 주면서 내가 잠깐 쉬어서 걸으면 같이 걷고 또 열심히 뛰면 같이 뛰어줘서 달리는데 훨씬 수월했다.
이후 마라톤 완주를 끝내고 부스에서 제공하는 맥주와 음료, 과자, 바나나를 받고 같이 간 지인분들과 스크램블 에그, 고구마, 스위트칠리 빈이 나오는 간단한 아침까지 함께 먹었다. 마라톤 참가비로 인당 $70 냈는데 기대 이상으로 이것저것 주는 게 많아 '뽕 뽑았다!'라는 생각을 하며 상쾌하게 일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심지어 화분도 나눠주는데 줄이 길이서 그건 안 받았다).
무엇보다 마라톤 10K를 완주했는데 시간이 오전 9시 반 밖에 안 됐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평소에는 뭐 한 것도 없이 하루가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데, 이 날은 뭘 많이 한 것 같은데 아직 하루의 절반도 안 지났다니!
별로 대단치 못한 기록이지만 이번 마라톤 덕분에 앞으로 5K까지는 나름 편하게 뛸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오히려 역으로 하프 마라톤, 풀 마라톤은 더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전에는 뭣 모르고 겁 없이 생각했다가 이제 더 현실을 알게 된 것 같달까.
그럼에도 또 한 번 신기하다고 느꼈던 건, 적는 것과 확언의 효과였다. 작년부터 버킷리스트에 있던 마라톤 완주를 주변 지인들에게도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실제로 행함이 없었는데 우연찮게 지인 중 한 명과 얘기를 하면서 함께 마라톤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덕분에 '맞아! 내 버킷리스트!' 라며 그날 바로 신청을 했다.
10K 마라톤을 완주하며 기억 저 편에 잊힌 올해 버킷리스트를 다시 돌아보기 위해 노션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적은 버킷리스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 '내가 이런 걸 적었었나?', 그리고 '어, 이거 이뤄졌네?' 하고.
특히 '쉬지 않고 5K 뛸 수 있는 체력'은 적은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마라톤을 하며 저절로 이뤄졌다. 주 6일 필라테스는 올 초 2달간 무제한 이용권을 끊으며 그룹필라테스를 다녔다가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 그만뒀다. 물론 위에 적은 것들은 버킷리스트보다는 생활습관으로 만들고 싶은 항목들이기 때문에 계속 꾸준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대목표 4개 중 1개만 이뤘지만 소목표는 거의 다 "이루어졌다".
'이루어졌다'라고 말하는 건, 내가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외부적 환경으로 인해서 저절로 이뤄진 게 많아서다. 일하면서 군것질하는 습관을 고치는 게 어려웠는데 한국에서 뜻하지 않은 수술로 인해 소식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군것질 횟수가 주 1~2회로 줄어들었다.
이전에 적은 '내가 버킷리스트와 목표를 계속 적는 이유'글에서도 말한 것처럼,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그런 쪽으로 짜 맞추는 걸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매번 신기한 경험이다. 원래 삶은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적은 목표들이 안 이루어졌을 때 스스로에게 더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준다는 생각에 한동안 감히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의지조차 없이 살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적는 것들이 나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도장 깨기 하는 것처럼 성취감을 주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회색빛 하루하루를 조금 더 다채로운 색깔로 채워 넣어주기도 했다.
주 중엔 재택근무로 일이 바쁘면 집 안에만 있는 날이 3일을 넘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중간중간 있는 이벤트들 덕분에 즐겁다.
무엇보다 좋은 일을 함께 하자고 해 준 지인과 또 나와 함께 발맞추어 뛰어준 J에게 너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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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한국에서 마라톤을 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스크램블에그가 아니라 국밥을 먹으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