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
요즘 월요일은 내가 기다리는 날이다. 기다리는 날이므로 당연히 직장인의 만성병인 월요병도 없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월요일이 바로 캘리그래피 수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에 수업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설레는 마음은 커진다. 중년의 나이를 맞아 뭔가에 몰입하고 빠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오랜만에 집중할 수 있는 취미를 만나는 것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한 달 전부터 내가 사는 지역구의 평생학습관에서 직장인들을 위한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고 있다. 매주 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10회 수업을 재료비 5만 원만 내면 들을 수 있다. 보통은 직장인들을 위한 야간 수업이 공공기관에서 개설되기 힘든데 야간반이 생겨 너무나 감사했다. 더욱이 수업이 끝난 후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자격증비를 내면 캘리그래피 3급 민간 자격증도 나온다고 하니 정말 좋은 기회였다. 몇 년 전쯤 캘리그래피에 한번 도전을 했다가 꾸준한 연습 부족으로 흐지부지 되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오랜만에 만난 캘리그래피가 생활의 활력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였다. 예전에도 10회 정도 수업을 받았었는데 화선지에 먹, 서예붓을 써서 당시에는 그다지 흥미를 많이 느끼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먹을 쓰긴 했지만 뚜껑이 있는 인조붓과 종이를 써서 준비와 사용법이 더 편해 자주 연습을 할 수 있어 좋다.
벌써 4번이나 수업을 들었다. 첫날에는 기본적인 선긋기와 비교적 따라 하기 쉬운 둥글둥글한 체를 연습하였는데 간단한 단어를 보고 따라 쓰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두 번째는 교재에 나와있는 다양한 단어와 문구를 보고 따라 쓰는 활동을 통해 붓에 대한 손의 감각을 좀 더 익혔다. 수업을 열심히 듣고 집에 와서도 연습을 많이 했다. 고등학생 아들을 기다리면서 캘리그래피를 쓰면 지루하지도 않고 시간이 잘 갔으며 무엇보다 긍정적이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문구를 많이 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루 집안일을 끝내고 캘리그래피를 연습하는 고요한 밤 시간이 나에게 안온함을 가져다주었다. 단순히 보고 따라 쓰는 수준이지만 남편에게 보여주면 짧은 감탄사와 함께 '대단하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여 뿌듯함이 올라왔다. '느긋'이라는 낙관까지 찍은 캘리그래피 엽서를 두어 장 챙겨가는 남편을 보니 성취감도 생겼다. 단 두 번의 수업치고는 엄청난 성과였다.
세 번째 수업에서는 책갈피를 만들었다. 강사님이 주신 예쁜 책갈피 종이의 샘플 작품을 보며 그대로 따라 하거나 교재에 나와있는 문구를 골라 몇 번의 연습 후 과감하게 작품을 만들어 갔다. 강사님에 의하면 세상이 너무나 좋아져서 예쁜 종이가 잘 나온다고, 예전에는 책갈피를 만들기 위해서 종이를 일일이 자르고 펀치로 구멍을 뚫고 그림도 그려야 하는 등 번거로웠다고 한다. 글씨만 썼는데 책갈피 종이 자체가 예뻐서 글씨까지 돋보이는 것 같았다. 그럴듯한 작품이 나와 신기했다. 다음 날에도 책갈피를 내 나름대로 만들어보기 위해 연습을 했다. 종이를 자르고 책갈피 문구에 어울리는 그림까지 그려 넣고 마지막에는 손코팅지로 코팅까지 하였다. 서툰 글씨지만 동학년 선생님들께 하나씩 드리니 정말 좋아하셨다. 감탄하고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선물을 주는 내가 더 행복해졌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 '다정한 말에는 꽃이 핀다', ' 매일이 행복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와 같이 각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문구를 가져가며 웃는 모습을 보니 캘리그래피 문구처럼 행복한 일은 나의 곁에 매일 있음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네 번째 수업에서는 캘리그래피 엽서를 만들어 보았다. 책갈피처럼 예쁜 그림이 있는 종이에 좋은 문구를 쓰는 연습 동안 마음이 따뜻해졌다. 드라마 '우영우'가 방영되었을 때 인기문구였다던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를 연습할 때면 봄이 내 옆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 같았고, '너의 모든 날을 응원해'는 이제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을 생각하며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썼다. '토닥토닥 수고했어요'는 오늘 고생한 나에게 주는 위로의 말이 되었으며, '우리 함께 있으니 더욱 좋은 날'은 남편과 함께 할 노후를 생각하며 완성해 나갔다.
문구를 생각하며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는 것도 좋았고 문구에 어울리는 스티커나 간단한 그림으로 글씨를 더 부각하면서 꾸미는 것도 꽤나 재밌었다. '다이어리 꾸미기(다꾸)'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유튜브에 '수채 캘리그래피'를 치면 다양한 팁들이 많이 나오는데 수성 사인펜으로 수채화 느낌을 낼 수 있는 영상도 보며 재미있는 공부를 하고 있다. 모나미 플러스펜 수성 사인펜을 꽃모양으로 그리고 물이 묻어있는 수채붓으로 살짝 터치해 주면 자연스러운 색감이 쉽게 연출된다. 미술 시간에 우리 반 아이들과 쉽게 해 볼 수 있는 가성비 좋은 팁들이 많아 어떻게 적용시켜 볼까 고민도 하게 되었다.
아직은 교재에 나와있는 강사님의 글씨를 따라 하는 정도지만 언젠가 내가 원하는 문구를 원하는 글씨체로 쓸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모창을 잘하는 사람이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보고 따라 쓰는 것이 캘리그래피의 70% 완성하는 것이라고 강사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꾸준히 보고 따라 쓰는 게 내 단계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또한 다른 캘리그래피 작가님의 다양한 작품들도 많이 보는 게 뇌에 무의식적으로 익혀져 구도 잡는 것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니 영상을 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익히면 30%도 채워질 거라 믿는다. 절대 욕심 내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지속적으로 연습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도 할 수 있을 거란 근거 있는 자신감도 생긴다.
아직 여섯 번의 수업이 남아있다. 앞으로 또 어떤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느긋'이라는 낙관을 찍을 때마다 지우개 낙관이지만 기분이 매번 좋다. 좋은 문구,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문구,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문구를 한 글자씩 써내려 갈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역시 사람은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으므로 좋은 문구를 많이 접할 수 있는 캘리그래피를 이 나이에 다시 만난 게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성격은 여전히 느긋하지 않지만 캘리그래피를 쓸 때면 잠시라도 느긋해지는 이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