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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긋 Sep 03. 2024

노부부의 에스컬레이터 연습기

 아빠의 취미는 한시(韓詩) 짓기다. 입문하신 지는 몇 년 안 되었지만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셔서 참방(공동 4위), 가작(공동 5위) 같은 입상을 여러 번 하셨다. 이번 한시대회에도 우리가 사는 지역 예선에서 단 2명만 본선에 진출하게 되셨다고 많이 좋아하셨다. 본선 장소가 서울이어서 새벽에 일찍 KTX를 타고 올라가셔야 한다. 평소의 철저한 준비성을 가지신 분답게 자식들 손을 빌리지 않고 손수 새벽에 택시를 불러 역까지 간 후 역에서 기차 타는 거, 서울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는 법 등 미리 공부를 많이 하신 것 같았다.


 옛날로 따지면 과거시험을 보시러 한양까지 가시는데 자식으로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약간의 용돈을 가져다 드리려고 부모님 집으로 올라갔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데도 왜 이리 얼굴을 자주 못 보여드리는지 반성의 마음도 함께 챙겼다. 일요일 오전이었는데도 부모님 두 분 다 집에 안 계셨다. 생각해보니 성당에 가실 시간이어서 더 기다리지 않고 아빠의 서재방에 들어가 책상에 용돈과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아빠, 서울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꼭 장원급제하세요. 파이팅!  
-  막내 드림-  

작년 한시 대회 참여하셨을 때 아빠 모습


 한 시간쯤 지난 후 아빠한테서 전화가 온다.

 "뭔 용돈을 갔다 놓았니? 고맙다. 서울 잘 다녀오마. 엄마가 꽃게를 찌고 있는데 12시에 와서 먹고 가거라. 요즘 네 얼굴을 통 못 봐서 궁금하다." 

 언니가 꽃게 한 상자를 사서 부모님 댁에 좀 갖다 드렸나 보다. 현관에 들어서니 고소한 꽃게찜 향이 나의 식욕을 자극하였다. 엄마가 먹기 좋게 손질도 해놓으시고 꽃게 자체에 살이 많이 차있어 너무나 맛있었다. 올해 첫 꽃게의 다리를 아작아작 씹으며 막내딸이 맛있게 먹으니 아빠, 엄마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보신다. 말씀하시는 걸 좋아하시는 아빠가 오전에 엄마랑 하신 외출썰을 풀어놓기 시작하신다.


(아빠) 엄마랑 아빠가 오전에 일찍 성당 미사 드린 후 시내로 나가 에스컬레이터 연습을 했다!

(나) 에스컬레이터 연습?

(아빠) 응! 이번에 서울 가면 역에 내려서 택시 승강장까지 많이 걸어야 한데.

(나) 승강기 타면 되잖아요?

(아빠) 승강기를 바로 못 찾을 수도 있고, 승강기 타려면 오래 걸어야 할 수도 있고 에스컬레이터가 바로 있다고 하니 그거 타는 게 나을 것 같다!

(엄마) 그래서 엄마랑 아빠랑 시내 나가서 에스컬레이터 타는 연습을 했어.


 우리 아빠는 오른쪽 다리가 많이 불편하다. 40대부터 오른쪽 다리 근육이 마르는 병이 발병한 것 같은데 나도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즈음 서울에 있는 큰 대학 병원부터 민간요법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노력을 하셨다. 정확한 병명은 잘 모르지만 오른쪽 다리만 불편하시다. 근육이 마르는 병이 상체로 진행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70대 중반이신 아빠의 오른쪽 다리는 삐쩍 말라 걸을 때도 많이 힘을 못주신다. 더운 여름에도 오른쪽 종아리를 시려하시고 발 토시를 항상 하신다. 그래도 걷기나 사이클 등 많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셔서 걸음걸이는 조금 불편해 보이지만 건강하신 편이다. 항상 걸을 때 다리에 힘을 주고 한발 한발 주의 깊게 걸으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도 많고, 병의 진행이 이 정도에서 멈춰 감사한 마음도 매우 크다.


(아빠) 처음에 에스컬레이터 탈 때 오른쪽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좀 휘청했어야. 그래도 여러 번 타보면서 연습하니 자신감이 생겼지. 첫 시도 때 양팔을 벌려 양쪽 손잡이를 잡았는데 불안하더라고. 그래서 왼쪽 발에 힘을 빡 주고 양손 모두 왼쪽손잡이를 잡으니까 훨씬 안정적이더라.

(엄마) 엄마가 더 긴 에스컬레이터 있는 쪽으로 가서 연습하자고 하니까 너네 아빠가 처음에는 안 간다고 했는디 그래도 데려가서 연습시키니까 맘이 놓인다잉.

(아빠) 거기는 에스컬레이터가 엄청 길더라. 처음에 겁이 났는데 요령을 터득해서 서너 번 연습을 더 하니까 확실히 자신감이 생겼어!

(나) 아빠, 사람이 많아도 너무 급하게 내딛지 말고 한발 한발 천천히 딛어잉! 정 안되면 주변에 젊은 청년한테 사정 이야기하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 좀 도와달라고 말하고잉!

(아빠) 응! 확실히 연습을 하니까 좋다! 양손을 왼쪽 손잡이에 딱 올리면 돼!

(엄마) 사람들이 없어서 연습을 편하게 했다야. 엄마는 아래서 지켜보고 아빠는 조심히 내려오고! 하하!


 엄마의 밝은 목소리가 나를 오히려 슬프게 만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꽃게살을 발라 먹었지만 막내딸의 마음은 아려왔다. 두 분이서 사람이 없는 에스컬레이터를 찾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아빠에게 맞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방법을 찾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엄마는 계속 아빠 옆에서 열심히 응원을 하셨을 거고 엄마 특유의 밝은 긍정의 힘으로 아빠를 더 힘내게 하셨을 거다.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때 약간의 거리가 있는 곳에서 부모가 양팔 벌려 응원하는 이미지도 떠올랐다. 아기가 설령 넘어질까 불안해하면서도 아기가 스스로 세상에 두발을 딛고 서야 하니 거리를 두고 응원을 해주는 그런 걸음마 말이다.

 

 아무리 성당에서 시내까지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요일 아침 집에서 놀고 있는 자식에게 전화해서 좀 데려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부모님이 야속했다. 우리 부모님은 평소 자식들이 작은 거라도 신경 안 쓰이게 하시려고 애쓰신다. 아빠는 76세, 엄마는 74세. 병원도 알아서 다니시고 건강검진 할 때도 혼자서 잘 다녀오신다. 필요한 물건을 사달라고 가끔 부탁은 하시는데 그냥 받지 않으시고 꼭 돈을 주신다. 자식들에게 뭔가 부탁을 할 때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을 먼저 표현하시는 우리 부모님에게 이럴 때마다 내 진짜 속마음과 달리 잔소리가 나온다. 자식들이 해주는 건 그냥 즐겁게 받으시고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면 된다고. 한평생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신 부모님을 보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든다. 효도는 별거 없다.


얼굴 자주 보여드리자.


  * 아빠는 제 32회 전국 한시현장백일장에서 참방(공동4위)이라는 입상을 하셨다. 그 모든 영광을 에스컬레이터 연습을 도와주신 엄마께 돌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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